낙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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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에 맞춰 눈동자가 흔들리기라도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유진의 동공이 흔들린다.
많은 고민이 있었고, 지금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말로 힘들었을 거고, 진짜 회사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입 밖으로 진실을 내뱉지 않는 이상 상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앞서의 대화들과 그녀가 보인 반응을 통해 짐작해 보면, 그녀는 ‘과거’에 ‘미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를 추정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대학 다닐 때도 종종 보았고, 주변에서도 가끔 오고 가는 대화 중에 들은 바도 있다.
“나가서 할 것도 없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버텨야 산다.”
말하자면, 손익계산을 해보는 것이다. 변화의 선택이 자신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그러면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플러스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플러스를 선택하기보다 안정을 선택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더 큰 이익을 위해 변화를 감행하기 보다는 작은 이익을 유지하는 가운데 익숙한 방식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표현한다.
유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그녀 스스로 말했듯, 어린 시절부터 연예계에 뛰어들었고 못 볼 꼴도 많이 보았다. 부당하다 여겼던 것도 있을 것이고, 본인이 그런 사례로 인해 이익을 침해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 말한 사례도 그렇고.
하지만 그녀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고 ‘말로만’ 떠들 뿐, 실제로 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건, 이미 그런 방식과 대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어딘들 안 그런 곳이 어디 있겠어? 이런 반박에는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계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문제라는 판단이 아래 깔려 있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다면 차라리 여기서 버티는 게 낫지,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속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보냐? 왜 당하고 살아?”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받아칠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좋아질 거야.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
유진도 말했다. 여태껏 회사에서 받은 것도 많고, 대우도 좋았었다고. 자신이 드라마를 출연할 수 있었던 것도 회사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금 나가면 배신자가 되는 거라고.
‘배신’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배신이란 합의된 신뢰를 깨뜨리고 일방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때문에 ‘배신’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쌍방’이 존재하게 되고, 보통은 한쪽이 선한 편, 다른 한쪽이 악한 편으로 규정된다. 요컨대, 유진은 회사를, 일부 잘못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한 편으로 규정짓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려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이익’의 크기다. 보수적 선택을 하더라도 만약 어느 한쪽의 이익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보수적 경향을 무시하는 선택을 고르게끔 만든다. 로또에 당첨되면 상사의 면전에 사직서를 집어 던진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리라.
거꾸로 말하면 이익의 크기가 작을수록 보수적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지는 셈이다.
그게 유진의 고민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요컨대, D&D 엔터테인먼트가 지금 있는 회사보다 더 나을 것이란 확신이 없는 것이다.
대표가 전 매니저이고, 재무 이사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서, 연예 매니지먼트사의 역할이란 스타의 몸값을 올려주고 더 많은 매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끔 지원해줘야 하는 건데, 이것이 단순히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의 단유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D&D는 유진의 눈에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다.
갓 만들어진 회사가 ‘운 좋게’ 시은을 영입하여 그녀의 컴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시은이라는 스타 본인의 역량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판이다. 시은을 제외하면 아직 제대로 키워낸 스타도 없고, 그러니 실적도 없는 무명의 회사에 불과하다.
이런 곳으로의 이전을 용감하게 도전한다? 학연이나 지연 같은 이유로? 비록 지금은 어디에서도 불러주는 곳이 없고, 변변찮은 대본 하나 섭외 못 하는 회사라지만 그래도 실적 전무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는 신생 기획사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이리라.
어떤 의미에서는 영리한 선택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선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단유의 추측일 뿐이고, 단유가 전혀 예상 못 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내용. 하지만 여기까지 추정한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당장 회사를 뛰쳐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수긍하기에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단유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사실 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응?”
굳이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속사정까지 캐물어 가면서 그녀를 설득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억지로 도움을 강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설령 선의의 도움이라도. 오히려 친구니까, 그녀가 절실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조건 없이’ 도움을 제공하면 된다. 지금은 그런 도움을 제공할 타이밍이 아닐 뿐이니, 이쯤에서 그녀에 대한 설득은 접는 것이 좋다.
‘애초에 설득을 하지도 않았지만.’
단유는 여태 손도 대지 않았던 음료수를 집어 입술을 축였다.
“혹시라도 투덜대고 싶으면 아무 때나 전화해. 일이 많지만 네 전화는 꼬박꼬박 받아줄 테니까.”
“···단유야.”
“그리고 정말 가끔가다 마음이 동하면 전화 한 번 할게. 그런데 자주는 못 할 거야. 알지? 내 성격?”
마치 조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분위기를 바꿔 대화를 이끄는 단유의 모습에 유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뭐라도 대꾸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유진은 억지로 입술을 늘리며 대답했다.
“어, 어. 모르진 않지.”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오갔다. 도대체 조금 전까지 진실과 거짓을 따지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듯 하던 애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뭘까? 왜 화제를 돌린 거지? 혹시 뭐라도 들은 걸까? 혹시 속마음을 들켰나?
“그나저나 여기는 자주 와?”
“자, 자주는 못 오지.”
“바쁘지도 않다며? 일이 없어서.”
“야, 일이 없다 뿐이지 한가하진 않아. 계속 레슨도 받아야 하고.”
“레슨? 연기? 그런 건 연습생 때나 하는 거 아냐?”
“뭘 모르는 소리야, 그건. 경력이 쌓여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게 이 바닥이야. 발성이나 연기의 기본기 같은 건 혼자 하는 것보다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도움이 되니까, 일부러 강사를 고용해서 레슨을 받아. 나 말고도 그런 사람 많아.”
“그래? 그건 몰랐네. 데뷔하고도 계속 레슨을 받는구나.”
“중견 배우들이 남는 시간에 그저 마사지나 받으며 지내는 줄 알았어? 아냐, 나보다 선배인 사람들도 강사 불러서 레슨 받고 그래. 사실 학원 등록하고 배우는 그런 것과는 다른 개념이고, 일종의 관리 같은 거지.”
“그렇구나. 근데 너 피부 관리는 해?”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왜? 나 피부 많이 상했어?”
“딱히 상했다기 보다는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살이 좀 찐 건가?”
“안 쪘거든?”
버럭 화내던 유진은 단유를 노려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조금 쪘는지도 몰라. 최근에 주전부리를 자주 찾는 편이라. 그래도 야, 아무리 내가 편해도 여자 앞에서 살쪘냐고 묻는 건 실례야.”
어느새 두 사람 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암묵적으로 이전의 이야기는 덮어두자는 뜻이 합의되었음이다.
친구라는 게 어렵다가도 편한 부분은 이런 것이다. ‘적당히’ 덮을 수 있다는 것. 다만 그로 인해 생기는 무언의 거리감은 ‘적절한’ 기회가 오지 않는 이상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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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에게 손을 흔들고 차에 오르는 유진의 뒤를 지켜보던 단유는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매니저와도 인사를 한 뒤, 그녀를 떠나보냈다.
“혼나려나?”
설득의 미션을 받고 나온 자리에서 설득 대신 잘 지내라고 덕담이나 건넸으니 대훈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미움받을 일은 없다. 앞서 운을 떼놓기도 했으니.
―···그렇습니까?
대신 아쉬움 가득한 대훈의 음성을 들으며 단유는 살짝 미안해지긴 했다.
―어쩔 수 없죠. 뭐, 지금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죠.
글쎄. 기회란 게 필요할까 싶다. 친구지만, 친구니까 굳이 우리 회사에서 잘 돼야 해, 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거니와 친구니까 더 잘해줘야지, 라는 의무감도 느끼지 못하는 단유였다.
대훈은 그렇지 못한 듯 했고.
―아, 그리고 약속 잡았어요.
“···아, 네.”
유진을 제외하고 대훈이 영입하려 하던 한 사람. 그 얼굴을 떠올리니 단유는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익숙치 않은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는 게 부끄러워서.
이어지는 대훈의 이야기를 절반은 흘려들으며 통화를 마무리한 후, 단유는 겨우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혼잡한 대로와 달리 거칠 것 없이 푸른 하늘을 질주하는 하얀 구름을 보며 괜히 뭉클해지는 기분.
한때 저 하늘, 저 구름을 보며
“저 구름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라고 말하던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단유는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라면 대훈이 약속을 잡은 날짜가 며칠 뒤였다는 것이고, 그래서 단유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불행이라면 그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렸다는 것.
그리고 약속 장소에 다다른 단유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마음의 준비가 된 건지 확신이 없다는 것.
짧게 숨을 내쉬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오래전부터 핫스팟으로 통칭되던 가로수길에 사람이 적은 이유는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단유는 여유를 회복할 시간을 얻었다. 터벅터벅 거리를 걷자니 곧 전면이 개방된 복층 구조의 카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은 건지, 평소의 관찰력 덕분인지 단유는 그 카페 안쪽에 미리 도착해 앉아 있던 이를 금방 찾아냈다.
아직 상대는 단유가 도착한 상황을 모르는지 카페에서 나눠주는 티슈를 꼬깃꼬깃 접으며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고, 그 외에는 브런치를 즐기다 온 건지도 모를 젊은 커플 한 쌍이 다른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도치 않은 친절에 카페 내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덕분에 단유를 기다리던 상대와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쉽게 붉어지는 얼굴. 그리고 슬쩍 시선을 내리는 상대에게서 단유는 또 하나 간과하고 있던 하나를 발견해냈다.
‘저걸 아직도 하고 있네.’
소중히 간직해주길 바랐지만, 그때로부터 흐른 시간이 벌써 10년 가까이 된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그때의 광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목걸이를 보니 괜히 뭉클해진다.
“오랜만이네요.”
“응. ···오랜 만이야.”
마주 앉아 인사말을 교환하는 순간, 문득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낯설지만 싫지 않은 느낌, 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사용되는 것인가보다.
인사 이후, 말을 쉽게 꺼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단유가 먼저 물었다.
“잘 지냈어요?”
수줍은 듯 볼을 붉히며 단유를 바라보는 그녀.
“응.”
10년이 지났지만, 10년 전의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한 그녀, 나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