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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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오랜만에 찾았지만 문에 달린 황동빛 종소리는 여전했다.
“오랜만이네?”
웃으며 반겨주는 예영이었다.
“유진이는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은가봐?”
“오전에 통화했잖아요?”
“통화하는 거랑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랑 같니? 무뚝뚝하긴. 아무튼 유진도 조금 전에 와서 저기 있어.”
단유는 예영의 손끝을 따라갔다.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할 때면 늘 앉던 그 자리였다.
“왔어?”
단유는 가볍게 손을 들어 유진의 인사를 받았다.
“너, 너무 바쁜 척 하는 거 아냐?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과장되게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는 유진을 보며 단유는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왜?”
“바쁜 건 너였겠지. 전화 한 번 안 했잖아?”
예전에는 틈만 나면 전화하던 녀석이 전화를 하지 않으니 많이 바쁜가 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단유의 설명에 유진이 목을 쭉 빼며 성난 얼굴을 해 보였다.
“야, 맨날 내가 먼저 전화해야 한다는 법 있어? 넌 내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어디서 혼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지 않아?”
“안 되던데. 네가 10살 먹은 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밥을 제대로 먹는지 걱정할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항상 곁에 매니저님이 붙어 계실 텐데. 그런데, 매니저님은 어디 가셨어?”
“잠깐 볼일 보러. 우리 단둘이 이야기하라고 자리 비켜준 거 같아. 그런데 너, 왜 말을 돌리고 그래? 그리고 친구가 바쁜 줄 알았으면 건강 정도는 걱정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정말 넌 나쁜 친구야.”
“건강식품이라도 사다 줘?”
“재미없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만약 너한테 문제가 생겼으면 예전에 연락이 왔었겠지. 연락이 없으니까 잘 지내다보다 생각하는 거고.”
“그런 식으로 넘어가시겠다?”
“알았어. 가끔 연락할게.”
마침 단유네가 앉아 있던 자리로 음료를 챙겨 가져오던 예영이 딴지를 걸었다.
“얘는 말만 이렇게 하고 연락 한 번 안 하더라. 나한테도 몇 년만에 전화한 건지 기억은 하니?”
“10개월 정도요?”
“얘는 보통 사람의 사고 방식이랑 달라.”
“맞아요. 달라요, 달라.”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통 사람은 어떠냐고 물었다.
“보통은 그냥 사과를 먼저 하지. 그리고 앞으로 자주 하겠다고 약속하고.”
“먼저 물으셨잖아요?”
“그게 대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이 아니잖아? 에휴, 도대체 니가 어떤 여잘 만날지 정말 걱정이다. 이렇게 센스없는 애를 남자 친구로 두면 일상이 피곤할 거야. 혹시 여자 친구 있어?”
“없어요.”
“여태 여자 친구도 안 사겼어? 바빠서 안 사귄 거야, 없어서 못 사귄 거야?”
“그다지. 억지로 연애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지 억지로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자연스럽게라도 할 마음이 생겨야 할 텐데, 널 보면 과연 자연스러운 연애라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오늘은 유진이랑 일 이야기를 하려고 왔으니까.”
“어머,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거야? 이제 내가 거추장스럽다는 거?”
“거추장스럽지는 않아요. 오늘은 일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까 거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거뿐이었어요.”
예영은 음료를 내려놓고 고개를 흔들었다. 재미없던 애가 점점 더 재미없어지는 것 같다며 중얼거리고는 유진과 눈을 맞췄다. 유진은 또 예영의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살풋 미소를 지으며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고, 단지 단유만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무언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지켜만 봤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일 이야기가 뭔데?”
예영이 자리를 떠난 후, 유진이 물었다.
“대표님이 너 설득하라고 하셔서.”
“아, 역시. 어쩐지 네가 그냥 날 보자고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듣기로는 너 회사에서 힘들다던데. 정말이야?”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뭔가 쉽게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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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그냥 이대로 나가라고요?”
“착오가 있나 본데 별일 없을 거야.”
대훈이 나간 이후 새로 배정된 매니저는 6개월 정도를 같이하다가 다른 팀으로 배속되어 떠나고, 지금의 매니저가 담당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큰 불만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이제까지 담당이었던 매니저들과 달리 매사가 시큰둥하고 의욕이 없어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유진의 회사 내 입지를 설명하는 듯해서 매니저와 동행할 때마다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유진은 한 유명 의류 브랜드의 지점 개장에 초청이라는 이름으로 섭외되어 온 참이었다. ‘유명’하다는 기준이 국내 한정이라는 점만 빼면 꽤 그럴싸하게 꾸며진 행사였다. 사실 이런 곳에 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드라마 조연으로 활약할 때, 한참 인지도가 올라갈 즈음에는 여러 곳에서 유진을 불렀고 유진은 한껏 물오른 미모를 뽐내며 손을 흔들어주고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단지 유진의 인지도가 예전만큼 낮아졌다는 점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그때는 최소 한명 이상의 경호원을 함께 대동하고 나섰다면, 지금은 검은 정장 입은 경호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라도 왔나 궁금해서 고개를 쭉 빼고 선 사람들의 무리만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일 없었잖아. 나머지는 내가 커버할 수 있어.”
매니저는 얼른 차에서 내리지 않고 뭐하냐고 유진을 채근했다.
“시간 없어, 빨리 내려. 다음 스케줄은 지방이라서 서둘러야 돼.”
차에서 내리는 유진의 뒤로 ‘왜 이렇게 까탈스러워’라고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유진이 못 들을거라고 생각하고 뱉었을까? 아니면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일까? 생각하기 싫어서 유진은 일단 차에서 빨리 빠져나왔다.
“와!”
환호와 탄성이 사람들에게서 터져나, 오길 바랬지만 기대만큼 크진 않았다. 대신 ‘누구’냐고 묻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비수처럼 꽂혔다. ‘걔, 있잖아. 걔’, ‘누구?’ 같은 속삭임들도 천둥소리처럼 귀에 들려오지만 유진은 애써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이며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매장 측 사람들이 나와서 통로를 만들어 준 덕에 군중과 부대끼는 일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먼저 사진부터 찍으시고요, 한 시간 정도 싸인회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개점 행사에 찾아온 브랜드의 고위직과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은 후, 해당 브랜드에서 새로 출시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가게 바깥에 선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지도 모를’ 유진을 찍고 있었고, 그 근처에서 매니저가 어슬렁거리며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책상이 준비되고 의자를 가져다 준 직원에게 작게 고맙다고 인사한 유진이 앉자 곧 싸인회가 시작되었다. 어슬렁거리던 매니저가 매장 직원과 함께 인원을 통제하여 싸인회에 참석할 사람들을 줄세우고, 유진은 앞에 선 ‘팬’에게 싸인한 카드지와 웃음을 넘겨주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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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묘하게 신경이 쓰였어. 복장이 유별나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로부터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고 해야 할까?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 같이 줄 서 있던 사람들도 느꼈던 것 같아. 앞뒤로 선 사람들이 힐끔힐끔 돌아보는 모습도 보였거든. 그런데 자세하게는 보지 못했어. 그때도 나는 앞에 선 사람들에게 싸인해주고 팬서비스를 해주느라고 시선을 돌릴 틈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공백에 시선이 닿으면 그 남자로부터 이질적인 시선이 느껴져 신경이 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내가 마침내 유진의 앞에 섰을 때,
“팬입니다.”
사내가 말을 꺼냈고,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인사하고는 옆에 놓인 카드지를 집어 사인을 하며 물었다.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보통은 이름을 불러준다거나 혹은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팬네임 따위를 알려주는데 그 사내는,
“떡볶이요.”
라고 말했고, 유진은 혹시 잘못 들었나싶어 되물었다.
“네?”
“떡볶이요. 떡볶이를 좋아하거든요.”
“아, 네. 떡볶이 씨라고 적어도 될까요?”
“그냥 떡볶이 좋아, 라고 적어주세요.”
유진은 사내의 요구대로 적는대신 고개를 들어 사내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이제 갓 30대 정도가 되었을까 싶은 얼굴에 살짝 벌어진 얇고 긴 입술에선 어쩐지 축축한 느낌이 드는 공기가 새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좁은 콧망울은 연신 벌렁거렸고 검은 눈동자는 카드지에 올려진 유진의 손을 바라보고 있어 당장이라도 손을 감추고 싶은 기분이지만, 어쨌거나 기분 때문에 싸인회를 망칠 순 없는 법이다. 프로니까.
유진은 카드지 위에 싸인을 하고 그 아래로 ‘떡볶이 좋아’를 쓰는데,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떡볶이 좋아해요?”
“저요? 뭐, 조금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매운 건 잘 못 먹어요.”
“매운 맛이 좋아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유진은 억지로 웃음을 짓어보는데,
“한 달에 한 번은 떡볶이를 먹어요.”
“네?”
“한 달에 한 번은 떡볶이를 먹어야 돼요.”
뭔가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느낌에 유진은 고개를 틀어 매니저를 찾았으나, 매니저는 이쪽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줄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직원의 뒤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랑 떡볶이 한 번 먹을래요?”
“네, 아니, 저기 괜찮아요.”
여기서 좀 더 차분한 대응을 한다면,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같이 먹을 수도 있겠죠? 라고 웃으며 농담처럼 넘기거나 팬들과 다 같이 떡볶이 먹는 팬미팅이라도 할까요? 라고 재치있게 대응할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런데 사내의 음산한 분위기에 밀린 나머지 굳어버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싫은 내색을 해버렸다.
그 탓일까. 사내의 분위기가 더 음침해졌다.
“왜요? 좋아한다면서요? 단 둘이서 날 잡고 떡볶이 먹어요. 내가 제대로 매운맛 보여줄게요.”
“네?”
“내꺼 맛보면 완전 가요. 다 좋아해요.”
그러면서 사내가 자신의 바지춤을 움켜쥐고 다가오는데, 순간 놀라버린 유진이 비명을 꽥 질렀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바로 그때 유진에게로 접근하던 직원 한명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고,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는 그 순간에 뛰어와 사내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사내를 저지한 직원과 몸싸움에서 다른 직원들이 달려와 끼어들었고 덕분에 사내는 바닥에 깔린 채로 제지당했다. 어슬렁거리던 한심한 매니저가 달려왔으나 사태파악이 되지 않아 창백해진 얼굴의 유진에게 괜찮냐는 말 대신 무슨 일이냐며 물을 뿐이고, 놀란 유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괜찮습니까?”
물어온 것은 해당 매장의 점장이었고, 매니저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로 유진과 점장을 번갈아보다가 겨우 매니저답게, ‘더 진행하기 힘들겠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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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도 미친 사람이지만, 더 열받는 건 매니저였어. 어떻게 자기 담당이 곤경에 처했는데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덕쿵덕 뛴다며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 유진이다.
“매니저 때문에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야?”
“매니저도 매니저지만, 지금 회사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어. 원래는 그런 행사 있으면 경호원 한명은 섭외해 준다 말이야, 보통은.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안 된거잖아. 뒤에 들어보니까 뭐가 누락되어서 제대로 고용이 안 됐다는 말을 하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전화 한 통만 제대로 했어도 될 일인데 말이야. 그리고 매니저도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지금 상황에서 줄만 잘 서면 직급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실은 우리 둘이 대화하라고 비켜준 게 아니라 자기 볼 일이 급해서 자리를 피한 거야. 누구랑 통화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살아. 내 스케줄 잡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단유는 힘들어하는 내색이 역력한 유진을 보며 ‘힘들었겠구나’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물었다.
“그래서 회사를 옮기고 싶은 거야?”
질문을 받은 유진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