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Side dish 4. 여인 김숙자
조선에 선농제(先農祭)라는 것이 있었다.
곡식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올리는 제사다.
농업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조선이었으니 이는 자연스레 정착된 문화였다.
선농제는 봄에 임금이 직접 올렸다.
선농단(先農壇)과 선잠단(先蠶壇)이라는 제단을 꾸려 놓고 제를 올린 것인데, 선농단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제단이고, 선잠단은 양잠(養蠶:누에를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일)의 신을 모시는 제단이다.
제사를 올린 후에는 임금이 직접 밭으로 행차해 백성들과 함께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이것은 고려시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농사 권장의 방책이었는데 친경례(親耕禮) 또는 경적례(耕籍禮)라 했다.
친경례가 끝나면 백성들은 왕이 내려주는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때 백성들이 먹었던 음식이 소고기와 뼈를 이용해 오랜 시간 푹 고아서 만든 것으로 그 이름을 선농제에서 따 선농탕(先農湯)이라 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설렁탕의 기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설렁설렁 먹는 탕이라서 설렁탕이라고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다행스럽게도 강지한은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임금이 백성들과 밭일을 하고 하사한 음식. 정답은 선농탕이다.”
강지한이 자신있게 정답을 내놓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새로운 문제가 12시간 이후 추가됩니다.]
“응? 어제 내가 문제를 푼 게 이맘때쯤인데 이미 12시간이 지난 거 아닌가?”
강지한의 의문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강지한님께서 문제를 확인한 그 순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는 건 오늘 같은 패턴으로 생활할 때 하루에 한 문제씩밖에 풀어나갈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을 마감하고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은근 소소한 재미로 다가오는 강지한이었다.
문제를 다 풀고 난 뒤, 완성된 엄마의 사라진 일기는 어떤 내용일지도 퍽 궁금했다.
강지한이 1990년 6월 27일의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미완성인 일기에 기억의 잉크를 투자했다.
[기억의 잉크 한 개를 투자했습니다. 일기장의 내용이 조금 더 나타납니다.]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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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큰오빠와 작은오빠 얘기를 하며 먹먹한 한숨을 내쉬곤 했으니까.
사람들은 대가님을 오래된 고목처럼 든든한 분이라 말한다.
그런데 내 눈에는 지치고 말라비틀어져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나무 같다.
사적으로 나를 대하는 대가님은 늘 고민과 근심으로 가득했거든.
하여튼 하나같이 너무 보이는 것만 믿는 거 아닌가 싶다.
대가님을 향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러하니 정작 대가님은 어디 한 명에게라도 마음 둘 곳이 없으셨어.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나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았는지 모를 일이야.
대부분이 자식 걱정이었고.
근데 내가 대가님께 들었던 많은 고민들 중에 가장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어.
일기의 내용은 거기에서 끊어졌다.
한참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는 순간이었는지라 강지한은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마치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궁금한 장면을 해소해 주려 하는 듯싶다가 ‘다음 주 이 시간에’ 하며 끝나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정신 대가님의 큰 고민. 그게 뭐였을까.’
한껏 궁금해진 강지한은 내일을 기대하며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 * *
5월 12일 수요일.
지한 정식의 브레이크 타임.
강지한은 밥을 거르고 이향숙의 회사로 찾아갔다.
이향숙이 꾸려 나가는 인터넷쇼핑물 향스리닷컴의 사무실은 명동의 빌딩건물 3층을 통으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똑똑.
이향숙은 사장실에서 여러 가지 서류작업을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누군가 사장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똑똑똑.
여전히 이향숙은 업무에 열중해 있었다.
기어코 똑똑 소리가 쾅쾅!으로 바뀌고 나서야 문을 바라봤다.
“누구세요?”
“향숙아, 나 들어가도 돼?”
“지한 오빠? 들어와.”
강지한은 이향숙에게 프리패스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향숙은 그를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사장실 안으로 들어온 강지한을 보며 이향숙이 물었다.
“어쩐 일로 찾아왔어? 브레이크 타임 아니야? 밥 먹어야 되잖아.”
“그 밥을 포기하고 너 보러 왔다.”
“대박. 오빠 같은 대식가가 밥까지 포기하면서 왜…….”
말을 하던 이향숙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엄마가 보냈지?”
“향숙이 눈치 어디 안 갔구나.”
“그 얘기라면 별로 하기 싫어. 그만 가줘.”
“꼭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네 얼굴도 볼 겸, 부탁도 하나 할 겸해서 왔어.”
“부탁? 뭔데?”
“그 전에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궁금한 거 뭐?”
“진이랑은 언제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한 거야?”
“……어떻게 알았어?”
“진이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모를 수 있을 리가.”
그 말에 이향숙이 진절머리를 냈다.
“헐. 눈치가 발바닥에 달라붙은 오빠까지 알 정도면 이미 지한 푸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네. 진이 오빠는 뭘 어떻게 하고 다닌 거야?”
열 내는 이향숙을 보며 강지한이 키득댔다.
“연애하니까 좋아?”
“좋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래도 좋은 게 더 많지?”
“그런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이향숙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자리했다.
“향숙아,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사랑받으면 기분이 어때.”
“좋지~ 많이.”
“그렇지. 숙자 아주머니도 그렇게 좋으실 거야, 지금.”
“…….”
이향숙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회를 잡은 강지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향숙아. 숙자 아주머니도 너희 엄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이자 사람이야. 엄마라고 멋진 남자가 다가오면 안 설렜을까? 오랜 세월 널 혼자 키우시면서 연애하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 적 한 번 없었겠어?”
이향숙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뭔가 골똘히 고심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와 숙자 아주머니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여자로서 살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거야. 향숙이 너한테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기 싫으셨을 테니까. 그저 이향숙의 엄마로만 억세게 살아오셨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이향숙이 지기 싫은 마음에 억지로 한마디를 짜내 뱉었다.
“그렇게 본인보다 너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아주머니에게 다시 여자로서의 모습을 찾게 해준 사람이 나타났어. 누군지는 알고 있지?”
“어제 들었어.”
어젯밤, 김숙자의 폭탄선언을 듣고 난 이향숙은 집에서 뛰쳐나와 회사에서 밤을 샜다.
도저히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다.
“그래. 우리 장인어른과 숙자 아주머니가 마음을 나누셨지. 근데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두 분 모두 대단히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해. 가족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주변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하니까. 그래서 난 더 응원하고 싶어.”
“…….”
“향숙아. 숙자 아주머니는 널 위해 포기하고 있던 자신의 삶을 이제야 다시 찾겠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응원해 주면 안 될까?”
이향숙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반박할 이야기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끝내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결국 이향숙이 찾아낸 방법은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부탁하겠다는 건 뭔데?”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되니? 7시쯤.”
“퇴근할 시간이니까 되긴 하는데.”
“잘됐다. 그럼 우리 집 와서 설탕이 가족이랑 놀아줄래?”
설탕이라는 말에 이향숙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눈동자에는 초롱초롱 생기까지 돌았다.
“설탕이? 갑자기 왜? 요즘엔 정미가 봐주고 있는 거 아니야?”
“내일 정미가 일이 좀 생겨서 저녁에 시간이 안 된대. 하필 소린 씨도 장인어른이랑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집에 있을 사람이 없네.”
“근데 설탕이는 애견 카페에 있을 시간이잖아.”
“아니야. 설탕이 좀 쉬라고 일주일 정도 애견카페 안 나가기로 했어. 집에서 가족하고만 있게 해주는 중이야.”
“아, 그렇구나. 알았어. 내가 봐줄게. 내일 7시까지 가면 되는 거지?”
“응. 부탁할게.”
“걱정 마. 좀 일찍 도착해도 상관없지?”
“물론.”
“오케이. 내일 연락할게.”
“그래. 그만 가봐야겠다. 오늘 내가 했던 말 그냥 넘기지 말고 깊이 한 번 생각해 줘. 고생해.”
강지한이 떠나고 홀로 남은 사장실에서 이향숙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 *
이리나는 10평 정도 되는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혼자 지낸 지도 6년이 지났는데 밤이 내리면 찾아오는 외로움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아니, 용성우와 연애를 할 때는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그 외로움이 다시 깨어나 이리나를 괴롭혔다.
방구석 한편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던 이리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주소록을 열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통화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전화가 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누를 용기가 없었다.
과연 자신의 전화를 받아줄지도 의문이었고, 만약 받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제대로 눕지도 않고 쪼그려 앉은 상태로 짧게 선잠을 잤는데도 꿈을 꿨다.
잊고 싶지만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악몽 같은 기억이 꿈속에서 생생히 펼쳐졌다.
“안돼…… 안돼…….”
악몽을 꾸던 이리나가 신음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러다 눈물을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하아. 하아.”
잠에서 깨어난 이리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미안해. 정훈아. 미안해…….”
이리나는 정훈이라는 이름을 연신 부르며 한참 동안 울먹였다.
* * *
오늘도 예소린이 잠들자마자 거실로 나와 설윤진의 일기장을 펼친 강지한.
마지막 페이지엔 새로운 문제가 추가되어 있었다.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바로 나왔다.
“이건 효종갱 같은데.”
효종갱(曉鍾羹).
풀이해 보면 새벽 효, 종 종, 국 갱.
즉, 새벽종이 울리면 먹을 수 있는 국이라는 뜻이다.
효종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먹었던 해장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이라 알려져 있다.
새벽종이 울리기 전에 끓여서 항아리에 넣고 이불로 싸서 달구지에 실어 놓은 것을 새벽종이 울리자마자 양반들에게 배달을 했다고 한다.
양반들이 아침에 즐겨 먹던 이 효종갱은 송이버섯, 전복, 소갈비, 해삼 등 고가의 재료들이 잔뜩 들어간 고급 음식이었다.
강지한이 문제의 답을 맞추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새로운 문제가 12시간 이후 추가됩니다.]
“맞았네. 그럼 바로 기억의 잉크를 투자하겠어.”
[기억의 잉크 한 개를 투자했습니다. 일기장의 내용이 조금 더 나타납니다.]
강지한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990년 6월 27일의 일기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