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4
Side dish 3. 맛있는 음식을 즐겨라
“다시 말해 보라니까.”
이향숙의 채근에 김숙자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그러니까…… 엄마…… 재혼하려고 한다고.”
“재혼? 엄마 지금 재혼이라 그랬어?”
이럴 줄 알았다.
딸내미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익히 짐작했기에 김숙자는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 제정신이야?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판에 다 건너띄고 재혼?”
“향숙아, 엄마 말 좀 들어봐.”
“싫어!”
이향숙이 소리를 빽 질렀다.
“좀 들어!”
김숙자의 목청이 더 컸다.
목소리에서 지고 들어간 이향숙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기세를 잡은 김숙자가 이때다 싶어 몰아붙였다.
“내가 오죽하면 너한테 연애니 뭐니 말도 않고 있다가 재혼 얘기 꺼냈겠어? 네가 난리블루스 칠 게 눈에 훤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니야.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엄마 마음은 편했는 줄 알아?”
“난리블루스 칠 걸 알았으면 연애 안 하면 되잖아.”
“너도 잘만 하는 연애 엄마도 좀 하면 안 돼?”
“그럼 아빠는!”
“…….”
“평생 엄마만 바라보고 엄마만 사랑하다가 하늘나라 가버린 아빠는! 아빠 불쌍하지도 않아? 엄마는 벌써 아빠가 잊혀져? 난 못 그래. 지금도 열흘에 한 번은 꿈에 아빠가 나온단 말이야! 딸인 나도 이러는데 어떻게 엄마가 그래? 엄마가 어떻게 그러냐고!”
이향숙이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햐, 향숙아! 향숙아!”
김숙자가 뒤늦게 따라 나갔지만, 이미 이향숙은 보이지 않았고 활짝 열린 현관문 너머로 찬바람이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하아아.”
김숙자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랑 연애하는 건지 알게 되면 아주 혀 깨물고 죽겠다고 하겠네.”
앞날이 막막한 김숙자였다.
* * *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강지한은 예소린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자정이 넘은 시각.
예소린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들자 강지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장롱에 있는 설윤진의 일기장을 꺼내 빈 페이지를 펼쳤다.
1990년 6월 27일.
[내용이 잠겨 있습니다.]
[기억의 잉크를 투자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강지한은 낮에 획득한 기억의 잉크 하나를 투자하고자 마음먹었다.
그에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기억의 잉크를 투자하겠습니까?]
“응.”
[기억의 잉크 한 개를 투자했습니다. 일기장의 일부 내용이 나타납니다.]
메시지가 사라지가 날짜 말고 아무것도 없던 일기장에 글자가 나타났다.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빨리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요동치는가 봐.
지한(旨憪). 이름 참 잘 지었지?
맛있는 음식 지, 즐길 한.
맛있는 음식을 즐기라는 뜻인데 처음에 내가 이 이름을 내밀었을 때 민태 씨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어.
근데 생각해 봐.
항상 맛있는 음식을 즐기려면 경제적으로 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걸 설명해 줬더니 한 박자 늦게 좋아했지.
평생 맛있는 음식을 즐기면서 살게 될 내 애기야~
엄마가 빨리 보고 싶어.
[이후의 내용이 잠겨 있습니다.]
[기억의 잉크를 투자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일기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강지한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진짜 우리 엄마답네.”
설윤진은 밝은 에너지를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는 주변 사람들까지 전부 밝아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일기장을 보다 보니 그런 엄마의 모습이 하나하나 다시 떠올라 생생하게 느껴져 좋았다.
강지한이 일기장의 맨 끝장을 펼쳤다.
거기엔 어제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메모가 추가되어 있었다.
‘더운 여름철 양반들의 더위를 달래주고 영양을 보충해 주었던 국수. 이 국수의 주재료는 신라의 진공품(進貢品)으로도 유명했음.’
‘신라의 진공품.’
강지한은 바로 인터넷에 ‘신라의 유명한 진공품’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다.
그러나 이렇다 할 정보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해서 강지한은 다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더운 여름철 양반들의 더위를 달래주고 영양을 보충해 주었던 국수.
이는 곧 온국수가 아닌 냉국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냉국수라 하면 콩국수가 일반적이다.
한데 서민들이 아닌 양반들이 즐겨 먹었던 냉국수는 무엇이 있을까.
강지한의 머릿속에 선뜻 떠오르는 요리는 오이냉국수와 잣국수밖에 없었다.
강지한이 바로 인터넷창에 잣국수부터 검색했다.
“아……. 이거네.”
잣국수는 양반들이 주로 해먹는 여름 음식이었다는 설명과 신라의 진상품 중 유명했던 것이 잣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설명들이 딱 들어맞으니 더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정답은 잣국수야.”
해답을 구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새로운 문제가 12시간 이후 추가됩니다.]
‘어라.’
이번에는 새로운 문제가 바로 추가되지 않고 12시간이라는 딜레이가 걸렸다.
아마 새로운 문제를 연달아 오픈하는 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계산해 보니 첫 번째 문제를 보고 난 뒤, 답을 맞춰 두 번째 문제가 오픈되는 사이에도 12시간 이상의 텀이 있었다.
어차피 12시간 이후 문제가 추가 된다면 지금 일기장을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단은 기억의 잉크부터 사용해 볼까.”
강지한이 기억의 잉크 하나를 추가로 일기장에 투자했다.
그러자 이후의 내용 일부가 더 드러났다.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
.
.
엄마가 빨리 보고 싶어.
다음 달 출산예정일을 앞두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질 때가 많다.
특히 한정신 대가님 생각이 자주 난다.
나는 아직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모성애가 철철 넘치나 봐.
태어날 아이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뛰잖아.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어떤 건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대가님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항상 큰 오빠와 작은 오빠 얘기를 하며 먹먹한 한숨을 내쉬곤 했으니까.
추가된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엄마의 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한남선과 한돈선이 얼마나 인성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이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일기장에 더 볼일은 없었다.
‘자자.’
강지한은 일기장을 장롱 안에 넣어 놓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 * *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
강지한은 설윤진의 일기장을 챙겨서 나갈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앞으로 일기장의 문제와 관련된 것들은 집에 돌아와서만 고민하기로 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일단 본인의 마음가짐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근심을 가지고 요리를 하면 음식에 근심이 담기고, 화가 난 상태에서 요리를 하면 음식에 화가 담기는 법이다.
강지한은 요리를 만들 땐 오로지 요리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의 식당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예의일 테니.
* * *
지한 정식의 점심 피크 타임이 끝나가는 시각.
식당에 반가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바로 김숙자와 예경천이었다.
두 사람은 상당히 상기된 모습으로 홀에 들어섰다.
그러자 그들을 알아본 여직원이 바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사모님 안녕하세요.”
“아, 그래요. 우리 사위 지금 많이 바쁘죠?”
“이제 곧 브레이크 타임이라 그렇게 바쁘시진 않아요. 장인어른께서 오셨다고 말씀 넣어드릴까요?”
“부탁할게요.”
“네.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다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강지한이 홀로 나와 김숙자와 예경천에게 다가왔다.
“장인어른 오셨어요. 아주머니도 오셨네요? 어쩐 일로 두 분이 함께 오셨어요?”
예경천이 뭔가 말을 꺼내려 할 때 김숙자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 전에 강 대표. 나 땡땡이 아니야. 지한 김치 브레이크 타임 두시 반부터인 거 알지? 그 시간 딱 맞춰서 나온 거야.”
“알죠, 하하.”
강지한이 대수롭잖게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두 사람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저…… 강 서방.”
“네, 아버님.”
“내가, 아니 우리가 자네한테 고백할 게 있네.”
“두 분이 연애라도 한다고 하시게요? 하하하.”
강지한이 딴에는 농담이라고 그런 말을 던졌다. 한데 이를 듣고 난 두 사람의 반응이 이상했다.
예경천은 헛기침을 했고 김숙자는 갑자기 천장을 쳐다봤다.
“……설마, 두 분. 정말로 그런 거예요?”
“하아. 강 서방. 그렇게 됐네. 우리 연애하네. 아니, 우리 결혼할 생각이야.”
강지한이 김숙자를 쳐다봤다. 딴 곳만 응시하다가 슬쩍 눈을 맞춘 김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됐어, 강 대표. 우리 너무 주책이지?”
두 사람은 당연히 강지한에게 좋지 않은 얘기가 튀어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와아, 축하드려요. 두 분 진짜 멋지십니다. 정말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저, 정말이야?”
“그럼요. 두 분 다 어른이고 싱글이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역시 강 서방이야! 내가 사윗감 하나는 정말 잘 봤지! 으하하하하! 내가 말이야.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를 안 했어. 소린이도 몰라. 근데 우리 강 서방한테 가장 먼저 고백하러 온 거야! 강 서방이라면 이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고! 으하하하하!”
예경천이 우락부락한 팔로 강지한을 와락 끌어안았다.
“컥!”
무지막지한 그 힘에 강지한이 켁켁 대고 있을 때 김숙자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다행이네 정말. 강 대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콜록. 콜록. 말씀하세요.”
“우리 향숙이…… 어떻게 설득 좀 안 되려나?”
* * *
김숙자의 고민을 듣고 난 강지한이 그녀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향숙이는 아주머니의 재혼이 아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긴다 이거죠?”
“응.”
“근데…… 두 분은 결혼 날짜까지 이미 잡아둔 상황이고요.”
“맞아.”
“그게 6월 초인 거죠?”
“그렇지.”
“……확실히 진도가 엄청 빠르긴 하네요.”
그 말에 예경천이 나섰다.
“강 서방, 그건 말이야. 우리가 연애한 기간은 얼마 안 되지만 전부터 계속 알아왔던 사이잖아. 이미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고, 나이도 있으니 시간 낭비 말고 속전속결로 다가 해버리자고 내가 밀어붙여서 그리된 거야.”
“꼭 이이가 밀어붙여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야. 나도 결단력 있게 진행하지 않으면 힘들겠다 싶어서 그러자고 했어. 무엇보다 향숙이 때문에 이렇게 저지르지 않으면 평생 재혼 힘들 수도 있거든.”
두 사람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이향숙이 듣게 되면 쌩난리를 칠 이야기였다.
연애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6월에 예식 날짜까지 잡아두었다니.
“일단 제가 여유 되는 대로 향숙이한테 연락해서 좋게 얘기 한 번 해볼게요.”
“휴우. 미안해. 괜히 부담만 줘서.”
“나도 면목이 없어, 강 서방.”
“괜찮아요. 두 분은 이왕 마음먹으신 거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만 마세요.”
강지한이 미소로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 * *
하나의 문제를 안고 집에 돌아온 강지한은 예소린이 잠들자마자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설윤진의 일기장을 열어 맨 뒷장을 펼치니 새로운 문제가 추가되어 있었다.
‘임금이 백성들과 밭일을 하고 하사한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