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Side dish 5.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 설탕이가.
1990년 6월 27일.
갈수록 지한이의 발길질이 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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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가 대가님께 들었던 많은 고민들 중에 가장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어.
어떻게 보면 그것도 자식 걱정의 연장선상에 놓인 고민이지.
당시에는 그냥 가슴이 저릿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억장이 무너져.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까 대가님에게 내 모습을 저절로 대입하게 되더라고.
살아 있을 때보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겨지는 고민.
그것은 이제 남들이 해결해 주지 않는 이상 영영 문제로 남게 되어 버리는 거니까.
오늘따라 대가님이 유난히 더 그리워지네.
갑자기 뜬금없지만 한참 심각한 와중에 또 떡볶이가 땡긴다.
난 떡볶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우리 지한이가 많이 좋아하나 봐.
산달이 다 되어가는 동안 시종일관 떡볶이가 눈앞에서 맴도는 거 보면.
입덧이 그렇게 심할 때도 떡볶이 냄새만 맡으면 신기하게 싹 사라졌으니까.
우리 지한이, 나중에 떡볶이 장사해서 대성하려고 이러나?
새로 추가된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강지한은 그것을 순식간에 읽고 나서 혀를 내둘렀다.
‘이건 거의 예언 수준이네.’
실제로 강지한이 요리로 먹고살 만해지기 시작한 건 제대로 된 떡볶이를 팔면서부터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의 강지한은 떡볶이를 정말 좋아하긴 했었다.
늘 설윤진이 먹고 싶은 거 없냐 물으면 떡볶이부터 말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요리 중에서 떡볶이를 가장 잘 만들었다.
그랬던 강지한이었는데 트라우마로 인해 요리와 관련된 기억이 전부 봉인되면서 말도 안 되는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다들 강지한을 이해 못 했다.
미각과 요리 실력이 늘어나며 강지한도 무슨 자신감으로 떡볶이 장사를 시작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지금에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떡볶이에 대한 사랑을 트라우마도 막지 못했나 보다.”
혼잣말을 흘린 강지한이 일기장을 덮었다.
지금까지 그가 푼 문제는 전부 넷.
과연 앞으로 몇 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을지, 내일은 어떤 문제가 나올지 기대됐다.
강지한은 일기장을 장롱에 다시 넣어놓고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 * *
5월 13일 목요일.
하경춘은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 망할 혼령이 떠나가지를 않으니 계속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한이 일었다.
그렇다고 혼령이 하경춘을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었다.
혼령은 강한 영력을 지닌 하경춘만이 자신의 뜻을 강지한에게 전할 수 있기에 붙어 있는 것뿐이었다.
한데 혼령의 기운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거기에 눌린 하경춘의 기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아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점심나절이 한참 지나서까지 참고 참던 하경춘이 스마트폰을 들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지한 정식의 브레이크 타임.
강지한이 직원들과 식사를 마치고서 저녁 장사 준비에 들어가려던 와중.
지이이잉-
하경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하 도사님.”
-강 대표,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 혹시 바쁘면 나중에 다시 전화하고.
“아니요. 쉬고 있어요. 괜찮아요.”
-아휴. 내가 정말 어지간해서는 강 대표 재촉하는 것 같아서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너무 견디기가 힘들고 답답해서…… 이해해 줘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저기…… 일이 어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이놈의 혼령은 나한테 딱 달라붙어서는 떠나가질 않으니 일분일초가 좀 곤욕스러워야지.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몰라. 그냥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
“그거 정말 힘드시겠네요. 일단 아직까지 영혼이 뭘 바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하나하나 문제가 풀려가고 있기는 해요.”
-그래요? 그럼 강 대표 어머님 유품에 진짜 실마리가 있었던 거야?
“네.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주세요, 하 도사님.”
-후우, 강 대표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나도 열심히 버텨야지, 별수 있나. 아무튼 여러모로 미안해요. 나 강 대표만 믿을게.
“걱정 마시고 조금 쉬세요.”
-그럴게요.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고.
하경춘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난 강지한의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일기장의 문제를 풀어 조금씩 내용을 완성해 나가는 작업이 대단히 재미있었다.
한데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하경춘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 * *
저녁 6시 반.
강지한의 집 마당으로 이향숙이 들어섰다.
“설탕아~!”
마당문을 열면서부터 그녀는 설탕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자 현관문이 열리며 예소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향숙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곱 시에 오기로 한 거 아니야?”
“설탕이 보고 싶어서 빨리 왔지. 언니는 아빠랑 약속 있다며?”
“응.”
“그럼 얼른 가~ 설탕이 가족은 내가 돌볼게.”
둘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설탕이가 집 안에서 걸어 나와 이향숙을 반겼다.
왕! 헥헥.
반갑게 짖은 설탕이가 꼬리를 팽팽 돌리며 이향숙의 앞에 다가와 펄쩍펄쩍 뛰었다.
“설탕아~ 꺄악!”
이향숙이 그런 설탕이를 품에 안고서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설탕이의 프로펠러 꼬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이향숙은 자신의 뺨을 마구 핥는 설탕이와 거의 한 덩이가 돼서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때 소금이가 설탕이 주니어 육 남매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이제 완연한 성견이 된 육 남매는 우르르 이향숙에게 달려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혓바닥 공격을 펼쳤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어어어어~”
이향숙은 눈이 반쯤 풀린 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 나 향숙이 믿고 가도 되지?”
“당연하지!”
“알았어. 애들 잘 부탁할게~”
예소린은 이미 외출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기에 방으로 들어가 핸드백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이향숙은 본격적으로 설탕이와 놀아줄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설탕아~ 누나 잡아 봐라~!”
이향숙이 마당을 마구 뛰어다니자 설탕이가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그런데,
멍!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금이가 짧게 짖었다.
그러자 설탕이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소금이에게 다가갔다.
“엥?”
이향숙이 얼떨떨해하며 설탕이를 지켜봤다.
설탕이는 소금이와 마당을 활보하며 알콩달콩 애정행각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이향숙이 부르면 다가와서 몇 번 핥는 척만 하고는 다시 소금이에게 가기 바빴다.
이를 본 이향숙은 기가 턱 막혔다.
“와아. 설탕이 너 이제 와이프 생겼다고 나 이렇게 찬밥 만드는 거야?”
항상 자신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서 곁에 딱 달라붙어 있던 설탕이였다.
그런 설탕이가 자기보다 소금이를 더 챙기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이향숙이었다.
“하여튼 사람이나 동물이나 사랑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라니까.”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독고진에게 전화가 왔다.
이를 본 이향숙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은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향숙의 음성이 평소와는 확 달라져 있었다.
이를 본 설탕이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향숙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고는 전화를 받는 이향숙의 이곳저곳을 핥고 앞발로 툭툭 치고 곁에서 높이 점프하며 자꾸 방해했다.
이향숙은 독고진과 통화를 하는 이 꿀 같은 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설탕이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전화가 끝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설탕아~ 누나 전화 받는데 자꾸 그러면 어떡해.”
약간은 격앙된 말투로 설탕이를 꾸짖는 순간, 이향숙은 깨달았다.
“……설탕이가 소금이만 따라다닌다고 뭐라 할 게 아니네.”
본인 또한 자신의 연인에게 집중하려고 설탕이를 피하지 않았던가.
“사랑 앞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이 별수 없는가 봐.”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동시에 이향숙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가 마당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이향숙에게 육 남매 녀석들이 달려가 장난을 치려 했다.
순간,
왕!
설탕이가 짖었고, 육 남매는 깜짝 놀라 이향숙의 곁에서 멀어졌다.
설탕이는 지금 이향숙이 충분히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었다.
‘엄마도 사랑 앞에서는 나와 똑같은 마음이겠지.’
비로소 김숙자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려 노력하는 이향숙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향숙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설탕이의 행동을 보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사람의 생각을 바꿔 버리는 일.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낸다, 설탕이가.
* * *
이향숙은 강지한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히 귀가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제대로 인사도 주고받을 새 없이 후다닥 집을 나섰다.
보통은 설탕이와 헤어지기 싫다고 온갖 꼬장을 다 부리다가 억지로 집에 가곤 하는 그녀였다.
때문에 그런 이향숙의 모습이 강지한은 낯설었다.
“설탕아, 오늘 무슨 일 있었니?”
강지한이 설탕이에게 물었다.
왕왕!
녀석은 뭔가를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신나게 짖었다.
강지한은 그런 설탕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대충 알겠다.”
레벨 업 시스템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강지한과 설탕이의 뛰어난 교감은 여전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
오늘은 간만에 혼자서 잠들어야 하는 밤이었다.
예소린이 친정에서 일박을 하기 때문이다.
애견 카페의 강아지들도 오늘은 오래간만에 예경천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럼, 오늘은 어떤 문제가 추가되었나 볼까.”
강지한이 설윤진의 일기장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리고 추가된 문제를 확인했다.
‘왕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
“어? 이건 너무 쉬운데.”
문제를 보자마자 강지한은 답을 떠올렸다.
‘모주(母酒).’
대동야승(大東野乘)이라는 책이 있다.
조선시대의 일화나 야사 등을 마구잡이로 담아 엮은 책인데, 여기에 보면 모주의 기원에 대해서도 짧은 설이 적혀 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부인은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된다.
이 노씨부인은 그곳에서 술지개미를 재탕해 막걸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곤 했다.
‘왕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는 대목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해서, 사람들은 이를 ‘대비모주(大妃母酒)’라 불렀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모주’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모주는 지금도 파는 곳이 여러 곳 있다.
그 맛을 보면 막걸리의 풍미가 담겨 있으나 도수가 무척 낮고 상대적으로 연하다.
때문에 취하기 위해 먹는 술로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가끔씩 높은 도수의 모주를 만들어내는 곳도 있으나 그것은 전통적인 모주라 보기 어려웠다.
“정답은 모주야.”
강지한이 답을 말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한 줄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문제의 답을 맞췄습니다.]
[기억의 잉크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위령환(慰靈丸) 한 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새로운 문제가 12시간 이후 추가됩니다.]
위령환이라는 글자에 강지한의 시선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