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Restaurant 277. 한민국의 분노
오늘이 바로 약속의 날이었다.
이향숙은 아침부터 일어나 열심히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조각공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먼저 기다리고 있던 독고진과 만나 자신의 솜씨가 고스란히 담긴 도시락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과연 독고진이 뭐라고 할까,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도시락을 순식간에 비워 버린 독고진이 그런 이향숙에게 말했다.
“강 대표님한테 열 번이나 강습을 받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늘었어요?”
“……네?”
당연히 칭찬할 것이라 기대했던 이향숙.
그런데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오니 기분이 확 상했다.
좀 전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하얀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런 이향숙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고진은 계속해서 요망한 입을 나불거렸다.
“이렇게 요리 실력 더디게 늘어서 누가 데려가겠어?”
이향숙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독고진을 쏘아봤다.
“다 처먹고 한다는 소리가 참 가관이시네요. 앞으로 요리 잘하는 여자랑 데이트하세요. 나 같은 여자 만나느라 시간 버리지 말고.”
이향숙이 도시락을 챙길 생각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때 독고진이 미리 준비해 둔 회심의 멘트를 날렸다.
“그러니까 내가 데려가야지. 나랑 결혼합시다.”
“……?”
이향숙이 이건 또 무슨 개수작질이냐는 시선을 독고진에게 던졌다.
사실 독고진은 데이트에 나오기 전 ‘100가지 여심 저격 비법서’라는 서적을 여러 번 완독했다.
이제 몇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까지 꿸 정도였다.
독고진이 그 책을 죽자사자 읽은 이유?
모태솔로는 아니지만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
연애의 경험은 세 번.
그것조차도 고딩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말만 연애지 사귀는 사람과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한 달이 채 가기 전 모두 헤어지고 말았다.
가볍게 만나서 가볍게 끝이 난 것.
독고진의 당시 최대 관심사는 ‘여자’보다 ‘돈’이었다.
편모 가정에서 자란 그는 가난이 싫었기에 어떻게든 돈을 벌 궁리만을 해왔다.
아무튼 그런 입장이다 보니 독고진이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한 것도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를 모르니 글로 배울 수밖에.
지금 독고진이 사용한 것은 100가지 여심 저격 비법서 중 37번째 비법이었다.
처음엔 여자를 토라지게 만들었다가 반전을 줌으로써 본인의 매력을 어필하고 그녀의 마음이 열리게 하라!
독고진은 비법서의 내용을 충실히 따랐다.
이향숙의 도시락이 맛있었음에도 괜한 핀잔을 주며 이래서 누가 데려가겠냐고 하더니 자신에게 오라는 말로 반전을 주며 마음을 전했다.
이향숙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독고진은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먹혔다.’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이미 자신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빡!
“억!”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고통이었다.
“아야! 으억.”
독고진이 정강이를 움켜쥐고 팔짝팔짝 뛰었다.
그런 독고진을 보며 이향숙이 한마디 했다.
“독고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히 또라이시네요.”
“아니, 향숙 씨. 또라이라니요?”
“연애를 글로 배우셨어요?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정곡을 찔렸다.
‘이게 아닌가?’
아무래도 철썩같이 믿었던 비법서가 잘못된 모양이다.
여자의 마음을 열기는커녕 정강이만 얻어맞았으니.
독고진이 아프고 놀라고 당황한 와중에도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향숙 씨, 그게 아니라 제가 향숙 씨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했던 게 그만…….”
“우리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요.”
“네, 그렇죠.”
“근데 프로프즈부터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그, 그렇죠. 제가 미쳤죠.”
“일단 연애부터 해요.”
“맞습니다. 일단 연애부터…… 네? 방금 뭐라고……?”
“제대로 연애해 본 적 없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 나이 되도록 뭐한 거예요? 내가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가르쳐 줄게요.”
“향숙 씨!”
이것 또한 예상 못한 전개였다.
독고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방금까지 아팠던 정강이가 씻은 듯이 나았다.
“방금 한 말 진짜지요? 무르지 못합니다.”
“저 괜히 이런 말 하면서 남자 홀리는 다니는 또라이 아니거든요.”
“그럼요. 아니죠! 향숙 씨는 또라이가 아닙니다! 하하하!”
“근데 그 전에. 도시락 어땠어요?”
“엄청 맛있었습니다. 진짜 대박이었어요.”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는 괜히 머리 쓰지 말아요. 있는 그대로 얘기해요.”
“네.”
“나 얼마나 좋아해요?”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하죠.”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첫눈에 반했죠.”
“그럼 손잡아요.”
“감사하죠.”
독고진이 이향숙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몸에서 찌릿찌릿 전기가 흘렀다.
사랑의 시작이었다.
* * *
9월 중순.
삼영식품의 레토르트 신제품이 출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광고 활동 또한 활발하게 이어졌다.
삼영식품은 신선정이라는 이름을 대문짝만 하게 내걸었다.
신선정의 유력한 차기 신선숙수 한정국이 직접 레시피를 개발했다는 문구 또한 크게 넣었다.
신선정이라는 이름에 혹한 소비자들은 삼영식품의 신제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평가는 대부분 괜찮았다.
가격이 조금 비싸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믿을 수 있는 브랜드 ‘신선정’의 이름이 붙었으니 그럴 만하다는 분위기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기존 신푸드의 제품들과 비교하는 리뷰글 또한 제법 많이 올라왔다.
열에 일곱은 삼영식품의 신제품이 신푸드의 제품들보다 맛이 조금 더 뛰어나다는 평이었다.
나머지 셋은 그다지 큰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평이었다.
어찌 되었든 여론은 삼영식품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푸드 이상의 즉석식품은 없을 것이라는 게 소비자들의 생각이었는데 그걸 넘어서는 제품이 탄생했으니, 너도나도 먹어보고자 했다.
그 증거로 삼영식품의 신제품 판매고가 쭉쭉 올라가는 중이었다.
반면 신푸드의 매출은 갈수록 조금씩 떨어졌다.
* * *
“정국아. 내 말이 우습게 들렸어?”
한민국이 한정국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얼굴을 보자마자 건넨 말이었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형제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형, 내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건 미안해. 근데 지금 시장 돌아가는 판 안 보여? 다들 난리야. 삼영식품이 신푸드를 잡고 있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잘 생각해 봐. 이건 신선정이라는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야. 대한민국 최고 한정식당 신선정. 그거 누가 몰라? 다 알고 있지. 워낙 유명하잖아. 그런데도 아무나 와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우리 식당에서 가장 싼 한식 코스 메뉴가 20만 원이야. 그래서 경험할 수 있는 문턱이 높아. 난 그 문턱을 낮춰준 거야. 레토르트 식품으로나마 신성정의 맛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보여준 거라고.”
한정국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민국은 바로 쓴소리를 날렸다.
“누가 그래? 네 손맛이 신선정의 맛이라고.”
“……뭐?”
“소비자들에게 신선정의 문턱을 낮춰 줬다고? 내 생각엔 소비자들이 그 맛을 신선정의 맛이라 오해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불거질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말을 듣는 한정국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그는 자신의 실력이 형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차기 신선숙수의 자리도 자신보다는 형이 어울린다는 것 역시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본인이 무시당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이 조금 센 거 아니야?”
“그나마 부드럽게 얘기한 건데, 귀에 쏙쏙 박히도록 제대로 다시 말해주길 바라니?”
한정국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참고서 한민국을 설득하려 했다.
“형이 아직 안 먹어봐서 그래. 막상 삼영식품 신제품 한두 개라도 먹어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자신 있냐.”
“있어.”
당당하게 대답하는 한정국을 보며 한민국은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삼영식품에서 한정국의 레시피로 내놓은 다섯 가지 즉석식품이었다.
접시 위에 담긴 즉석식품들을 보며 한정국이 놀라 물었다.
“이게 다 뭐야?”
“네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삼영식품의 신제품들. 이미 다 먹어봤다. 그런데 한 입 이상은 도저히 못 먹겠더구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물론. 신선정의 맛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먹으면 먹을 만했겠지.”
“…….”
한정국의 말문이 턱 막혔고 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민국은 동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에 대못을 쾅! 하고 박아 넣었다.
“이따위 걸 만들어 놓고 감히 신선정의 이름을 갖다 붙이다니. 네가 정신이 있는 녀석이냐, 없는 녀석이냐.”
한정국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되었다.
하지만 쥐도 급하면 고양이를 무는 법.
늘 형을 하늘처럼 바라보던 그였으나 오늘은 가시 돋친 말을 참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형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방금 뭐라고?”
“나는 형을 항상 인정해 왔어. 언제나 형이 최고라고 생각했어. 형이 날 속으로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왔다고. 근데 형은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네.”
“네가 스스로 판 무덤을 내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야?”
“하, 늘 그랬어. 항상 형만 잘났지. 이번엔 내가 맞을 테니 두고봐.”
한정국이 한민국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간 형의 그늘에 가려 억누르고 살아왔던 설움이 전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정국은 한민국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내 앞에서 썩 사라져. 꼴도 보기 싫으니.”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한정국이 현관문을 쾅! 닫으며 떠났다.
결국 두 형제 사이엔 깊은 골이 패이고 말았다.
하나 한정국은 이런 상황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모자란 놈.”
오히려 아둔한 동생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 * *
한정국의 얘기는 한남선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삼영식품에서 신제품 광고에 그토록 열을 올리고 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늦은 밤.
한남선은 저택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고민에 빠졌다.
‘정국이 이놈을 어찌해야 하나.’
장남은 모든 일을 알아서 잘 해나가는데 늘 차남이 문제였다.
애초에 신선숙수 자리를 포기한 건 알았다.
해서 한남선도 큰 기대 없이 그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게끔 놓아두었다.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런데 한정국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한남선의 술상 위에는 한정국이 참여한 삼영식품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이따위 음식들 앞에 신선정의 이름을 사용하다니.”
신선정을 이용하는 단골들이 이 레토르트 식품을 접하게 될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한남선이 무언가 결단을 내린 얼굴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종양은 그대로 두면 암이 되는 법. 최악의 경우…… 아파도 도려내야겠지.’
신선정을 위해 최악의 경우엔 자식까지 버릴 결심을 세우는 한남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