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Restaurant 276. 레토르트 전쟁
8월 중순.
삼영식품의 공치산 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일을 맡겨 놓은 한정국과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
아무리 늦어도 9월 중순에는 신제품을 출시해야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정국은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 했었다.
그러나 전화 통화까지 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이건 돈이 오가는 일이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중요했는데, 진행 과정을 알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래 놓고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기만 해봐.’
공치산은 한정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그가 신푸드를 분명히 잡겠다고 하며 받아간 금액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한정국은 당초 공치산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높은 몸값을 부르며 자신만만해했다.
이에 공치산이 그 금액은 좀 어려울 것 같다는 늬앙스를 보이자 스스로 나서서 각서까지 써주었다.
만약 신푸드를 잡지 못하면 받았던 모든 돈을 토해놓겠다는 내용이었다.
공치산은 각서 같은 걸 강요하지 않았다.
술에 한껏 취해 자존심 상한 한정국이 스스로 작성한 것.
공치산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으니 그 각서를 받았고 결국 두 사람의 계약은 성립이 되었다.
물론 공치산이 바라는 건 한정국에게 건네준 돈이 다시 돌아올 일 없는 것이다.
그가 받은 만큼의 값어치를 해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시작부터 지금껏 원활한 소통도 없이 계속 삐걱거리는 기분이 드니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공치산의 히스테리는 갈수록 심해졌다.
직원들도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회사에 나오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공치산은 결단을 내렸다.
“이 인간 집에 찾아가서 잡아와야겠어.”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을 때.
지이이이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한정국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양반은 못 되는군.’
액정에 뜬 그의 이름 세 글자만 봐도 욕이 한 바가지는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공치산은 꾹 참고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한 대가님. 언제 연락 주시려나 하고 목이 타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공치산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피로한 한정국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제 조리연구실로 와주세요. 다섯 가지 메뉴들 완성했습니다.
기대도 안 했던 말에 공치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입니까?”
-나 한정국입니다. 끊습니다.
한정국이 거만하게 대답하고서 통화를 끝냈다.
하지만 공치산은 그런 그의 태도가 조금도 괘씸하지 않았다.
돈값만 해준다면 업고 다닐 수도 있었다.
“남 과장.”
남주호 과장.
잘린 서재용 대신 들어온 사람이었다.
“네, 부장님.”
“상황 파악 됐지? 나가자.”
“넵.”
공치산과 남주호가 바쁘게 사무실을 나섰다.
* * *
한정국은 공치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마지막까지 음식의 레시피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푹 파인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다.
신푸드의 즉석식품을 먹고 약간의 충격을 받은 그는 이를 뛰어넘는 즉석식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먹고 자고 싸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근래 들어 놀고먹기만 한 한정국이었다.
그가 요리 연구에 이토록 집중해 본 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한정국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된 음식들을 다시 맛보았다.
‘확실히 신푸드의 즉석식품보다 훨씬 맛이 있어.’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마 삼영식품 관계자들도 이 맛을 보면 분명 납득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공치산과 남주호가 한정국의 조리연구실에 도착했다.
그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한정국에게 인사를 건네며 굽신거렸다.
“이런, 한 대가님의 안색이 말이 아니십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남주호 과장입니다. 한 대가님의 말씀을 공 부장님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존경합니다.”
달달한 두 사람의 사탕발림에 한정국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둘을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엔 한정국이 만들어서 맛봤던 음식들이 차갑게 식은 채 놓여 있었다.
한정국은 그 음식들을 전부 치워 버리고서 말했다.
“지금부터 음식을 만드는 과정부터 들어가는 재료까지 전부 보여드리겠습니다.”
“눈도 깜빡 않고 지켜보겠습니다, 한 대가님.”
공치산과 남주호가 보고 있는 가운데 한정국의 조리가 시작되었다.
* * *
김치찌개, 된장찌개, 제육볶음, 언양식불고기, 떡갈비의 다섯 가지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
“드셔보시죠.”
공치산과 남주호는 음식들을 차례차례 맛봤다.
“어떠십니까?”
한정국이 자신 있게 물었다.
“아, 맛있습니다.”
“썩 괜찮은데요.”
둘 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데 뭔가 좀 미적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정국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어째 대답이 시원시원하지가 않은 것 같은데. 제 기분 탓입니까?”
한정국의 말에 남주호가 공치산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고민하던 공치산이 결국 총대를 멨다.
“한 대가님, 이 음식들이 맛이 없는 건 아닙니다. 확실히 맛이 있습니다. 한데 신푸드의 음식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공치산의 정확한 평가가 한정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럼 신푸드의 음식보다 못하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신푸드의 음식보다는 맛있습니다. 문제는 들어가는 재료들이 너무 고가예요. 이렇게 되면 레토르트 식품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 면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맙니다.”
“맛이 더 있는 만큼 조금 더 비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소비자들을 잘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소비자들의 미각은 전문가들처럼 섬세하지 못합니다. 정말 확연히 다른 차원의 맛이 아니라면 몇백 원이라도 더 싼 음식을 찾는 것이 소비자들입니다.”
한정국은 기가 막혔다.
본인의 입맛에는 자신이 만들어낸 음식들이 신푸드의 음식들 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남의 음식은 깔보거나 냉정히 평가하지만 본인의 음식에는 후한 한정국의 뒤틀린 기질이 작용한 것이다.
공치산은 골치가 아팠다.
그 대단한 신선숙수 한남선의 차남이라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다.
각서까지 써주는 기개를 보고 분명히 그가 잘 해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아니올시다였다.
‘분명 신푸드의 레토르트 식품보다 맛은 한 단계 높지만…… 이런 재료들을 사용하게 될 경우 단가가 최소 천 원 이상은 오른다.’
3,900원과 4,000원이라는 숫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소비자다.
고작 백 원 차이인데 앞자리 숫자가 달라지는 것에 예민해진다.
그런데 천 원이 올라 버리면 한 단계 끌어올린 맛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게다가 그 정도의 미각을 자랑하는 소비자도 많지 않다.
확실히 더 나은 맛이라 어필하려면 몇 단계는 뛰어나야 했다.
‘이걸 어찌하면 좋지.’
지금이라도 계약을 파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공치산.
그때 한정국이 한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삼영식품과 손을 잡고 신제품의 레시피 작업에 참여했다는 걸 밝히는 겁니다.”
그 말에 공치산의 눈이 커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한 대가님께서 절대 비밀로 해 달라 하시는 바람에 우리도 입단속을 철저하게 하고 있었는데요.”
한정국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묻겠습니다. 제 이름값이 얹어지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을 소비자들이 납득하겠습니까?”
공치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사실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건 아니었다.
한정국이 삼영식품의 레토르트 작업에 참여했다는 걸 밝히는 건 실상 한정국 한 사람만 놓고 보면 별 도움이 안 됐다.
중요한 것은 그의 배경이었다.
한정국은 한국 최고의 한정식당이라 인정받는 신선정의 신선숙수 한남선의 핏줄이었다.
때문에 한정국이 참여했다는 걸 밝혀도 된다 허락한 순간, 삼영식품은 신선정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게 되는 것이다.
신선정의 브랜드파워는 어마어마하다.
때문에 그 이름을 가져다 쓸 수 있다면 광고 효과는 물론 소비자들의 신뢰도 크게 오를 터였다.
소비자는 몇백 원 차이에 민감한 반면, 확실한 브랜드에는 너른 이해심을 보이기도 한다.
공치산은 비로소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함께 온 남주호의 안색도 밝아졌다.
이를 보는 한정국은 비로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확실히 자신의 이름값이 무시 못 할 정도는 된다는 걸 인정받은 것 같았기 때문.
물론 신선정과 한남선의 후광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건 짐작했다. 하지만 그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치부했다.
그런 한정국을 보며 공치산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장남과 그릇이 이렇게도 차이가 나서야. 쯧쯧.’
이런 속내는 싹 감춘 채 공치산이 혹시 몰라 가져온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럼 방금 말씀하신 조항을 서로 수정하도록 하죠.”
“그럽시다.”
대답을 하는 한정국의 마음 한편이 살짝 무거웠다.
그가 삼영식품과 함께 일을 벌였다는 것이 한민국의 귀에 들어가면 좋은 소리는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됐어. 확실한 성과를 내면 신선정의 이름값이 더 올라가니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한정국은 그가 내놓은 신제품이 신푸드의 신제품을 찍어 누를 것이라 자신했다.
* * *
“어떠세요?”
강지한은 기존에 서비스되고 있는 신푸드의 제품과 이번 년도 하반기 신제품까지, 총 30여 가지의 음식들을 마련해 놓고 신장호를 집으로 초대했다.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어본 신장호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 이거 하나같이 놀랍도록 맛있습니다. 신제품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 제품들의 맛이 더 업그레이드됐군요?”
“맞아요. 대신 재료의 고급화로 단가가 이백 원 정도씩 더 올라갈 것 같아요.”
“맛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이백 원이 문제입니까? 저 같으면 더 올라도 사먹습니다.”
“맛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집니까?”
“그럼요. 소비자들도 분명히 아실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참 대단하십니다. 어찌 강 대표님께서는 제자리걸음을 모르십니까? 이렇게 한 번씩 만나 뵐 때마다 제가 깜짝깜짝 놀랍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느낌이 아주 좋아요.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삼영 식품에서도 대단한 셰프를 모셔서 하반기 신제품 연구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절대 밀리지 않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하.”
“분명히 그리될 겁니다. 누가 이 음식들을 레토르트 식품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덕분에 저도 바빠지겠군요.”
신장호는 기존에 나오던 제품들은 신제품이 서비스되는 순간 바로 교체해서 내놓을 생각이었다.
맛과 질이 훨씬 좋아졌으니 기존의 제품들은 이름 앞에 NEW라는 영단어 하나를 더 붙일 셈이었다.
아울러 강지한이 내놓은 신제품은 양식 세 가지와 중식 세 가지였다.
한식 위주의 레토르트 식품을 서비스하는 신푸드로서는 그들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장호는 어서 이 제품들이 세상에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말하고 강지한의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