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황제는 놀란 듯 멈칫했다. 아론이 마저 말을 이었다.
“황태자가 되고 싶습니다. 정식으로요.”
“……으음.”
황제는 미묘한 신음을 뱉어냈다. 눈살을 찌푸리며 아론을 노려보던 그녀는 곧 기침을 크게 해 댔다. 그 소리는 마기에 깊숙이 침식된 폐를 보여 주듯 탁했다. 그녀는 사제가 쉬셔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 아론에게 말했다.
“어째서냐. 여태 관심 없다가 지금에 와서야…….”
“이제 관심이 생깁니다.”
아론이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그에게선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번 사태를 겪고 나니, 제국 전체를 지키는 데 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감히.”
아론은 나를 안은 채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내 놀란 움직임에 아론이 살짝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어찌 됐든 황제에겐 티를 내지 않은 채로, 아론은 말을 이었다.
“폐하의 뒤를 잇게 해 주십시오. 마계의 침입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도록.”
“……훌륭한 목적이구나. 신성 제국의 군주가 고민해야 할 법한. 하지만 여기서 결정할 일은 아니야.”
황제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가신들과 상의가 필요해. 형식적이나마 그들의 동의도 있어야 하고……. 네가 신전이나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론은 이해한다며 더욱 깊게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공손한 청년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빛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곤란함과 석연찮음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아끼며 사제에게 가겠다는 고갯짓을 했다.
그녀는 가기 전 아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그 문제와 관련해 너를 황성으로 부르겠다. 그동안 승리를 만끽하려무나. 쉬면서 너를 향한 지지와 환호를 느껴보려무나. 모든 이가 너만을 바라보는 이 환상적인 기분을 말이야.”
아론을 따르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황제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 사제들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몸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아론은 그녀가 완전히 멀어지고서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서 황제가 되겠다고 했어?”
“황제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마계의 침입을 대비하는 것은요.”
“성기사로서는 안 돼?”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행정권과 입법권, 통수권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 바로 제위를 물려주시지 않을 텐데.”
황제는 아직 젊다. 몸을 회복하는 대로 제국을 다스리는 데 전념하려 들 것이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언제 그런 비굴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이 이번 승리를 당신의 것처럼 치장하여 아론의 공적을 가로채려 들 수도 있다. 아론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결국 자신이 승리를 이끌어 낸 것처럼. 사람들은 그녀의 능란한 말발과 정치공작에 빠져, 아론이 아닌 그녀를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아론은 그녀의 수족일 뿐이라고 믿게 하면서.
“어쩌면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수도 있어.”
“알아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말했는데 뜻밖에 아론은 덤덤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아론의 입가에 미소가 은은하게 피어난다.
“하나의 부품처럼 버려질 수도 있죠. 예상한 바예요.”
“그, 그럼, 어째서…….”
“그 전에 황제가 되려고요. 버려지기 전에 쟁취할 것이고 이용당하기 전에 활용하겠어요. 긴장을 늦추지 않을 거예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아론의 눈빛은 확고한 신념과 의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이가 되어 황금의 관을 쓰겠어요.”
“아, 아론.”
조금 놀랐던 걸까. 더듬거리고 말자 아론이 그런 나를 보며 은근하게 미소 지어 왔다.
“왜요, 황금의 관을 쓴 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당당하게 황제를 원하는 모습이 낯설 뿐이라고, 나는 더듬거리고 말았다. 아론은 그런 나를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시원한 미소에는 내 가슴까지 뜨거워질 만한 열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 착실하고 선한 것만으론 안 돼요. 제 것을 지키려면.”
아론이 말했다. 나긋하면서도 귓가를 깊게 저며 드는 목소리로.
“강해지고 현명해져야 해요. 더 빠르고 냉정해져야 해요. 절대 뺏기고 싶지 않으니까.”
아론이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안다. 나는 왠지 긴장하고 말았다. 마왕은 시간이 제 편이라고 했다. 아론의 시간을 우스워하면서. 그런데 아론은 그걸 모두 예상한 것처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면서.
“이런 제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리가.”
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론이 예전부터 고집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냉혹하고 결단력 있는 남자라는 것도.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다독였다.
“무섭지 않아. 어떤 모습이어도 너는 너야.”
“정말이죠?”
“응. 나는 너를 알아.”
네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내 말에 아론이 미소 짓는다. 나는 그런 그의 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아론은 눈을 감았다. 그 손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려는 듯.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여느 때보다 원대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룰게요. 그러니 제 곁에서 이런 저를 지켜봐 주세요.”
“꼭 곁에 있어야 해? 멀리서 지켜보면 안 되고?”
왠지 장난치고 싶어 말하자 아론의 눈빛이 갑자기 심각해진다.
“세 발자국 정도 거리는 허락할 수 있어요.”
“됐어. 내가 무슨 네 어깨에 걸치는 망토도 아니고.”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하자 아론은 그제야 웃었다. 내 손을 끌어다가 입술을 맞추면서 눈웃음 짓는 그는 참으로 근사하다. 쉽지 않은 여정을 앞두고도 이렇게 자신에 차서 웃을 수 있다는 건 그가 진정 강하다는 의미겠지.
나는 완전히 온화해진 기분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와의 시간은 늘 이렇듯 따뜻할 것이다.
‘성적으로도 그렇겠지?’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중하고 상냥한 아론과의 밤은 언제나 달콤할 테니까. 나는 가슴속이 충만함으로 꽉 차는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아론의 눈빛이 깊어졌다.
“왜?”
“아뇨, 말레드레드가…….”
아론은 미소 지었다. 그윽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그 미소에 담긴 의미가 성적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혹적이어서요.”
“함께할 시간이 없을 거야. 지금은.”
나는 저 멀리 우리를 돕기 위해 몰려오는 사제들을 바라봤다.
“각자 할 일이 있어.”
아론의 뒤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그들은 아론이 무언가를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 승리가 명백한 현실이라는 것을. 나는 그들의 눈에 담긴 선망을 읽어 내며 아론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그들에게 가 봐.”
“기다려 줘요.”
아론은 떠나려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빛이 금빛으로 하나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늘 한 방향으로 흐르는 순정처럼.
“전 말레드레드에게 돌아갈 테니.”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에게서.
“언제나, 반드시, 요.”
나는 그만 웃고야 말았다. 그 확신과 고집에 완전히 반해서. 무섭다기보다 유쾌하게 느껴질 정도의 선언에 나는 도리어 ‘어디 한번 잘 쫓아와 봐’라고 말해야 했다. 아론은 그 모습에 화답하듯이 진하게 웃었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어느새 멀어진 아론이 사람들을 향해 망가진 대검을 치켜든다. 그것은 다난했던 대결의 상징이며 치열했던 생존의 증거이다. 아론은 모두가 집중한 가운데 입을 열었다.
“승리의 영광은.”
사람들은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든 시민이든 괴생명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침착하면서도 고고한 목소리. 가슴까지 후련해지는 외침이다.
“우리는 절대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치켜든 대검에서 환한 빛이 뿜어지자 환성이 터져 나온다. 아론은 외쳤다.
“우리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겁니다!”
울림은 마침내 도시 전체를 흔들 만큼 커졌다. 나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 너나 할 것 없이 기뻐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치료 사제가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어찌 그것을 이루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가볍게 건넨 한마디에 나는 그저 미소 짓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그녀는 어딘가 아픈지 물으며 내 상처를 치료해 갔다.
“그래도 마기가 깊게 침투하지 않았네요.”
“…….”
기운을 금세 차리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 이유가 아론과 마왕의 덕분이라 생각했다. 아론이 치료한 것과 마왕이 자제한 덕분일 테니까. 치료 사제는 친절하게 물었다.
“누워 쉬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쉴 때가 아니었다. 저편에서 소녀와 괴생명체들을 불편하게 보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검을 들고 있던 기사들이 주춤한다. 내가 누구에게 안겨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제인지를 대충 알아챈 얼굴이다.
나는 소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소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기사 하나가 외쳤다.
“그 존재는 악이 아닙니까?”
“마물이나 마족이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에요.”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사들은 헷갈린다는 눈이었다.
“그럼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까?”
“인간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족도 분명 아니죠. 그녀는 다른 존재예요. 선과 악 모두 지니고 있는.”
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내가 눈을 맞추자 들꽃처럼 웃어 왔다. 그 모습이 예뻐서 나는 그만 가슴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감정들이 울렁거리며 일어난다. 내가 나라는 존재를 깨달았던 그때처럼. 수녀원으로 가기 전 깨달음을 얻었던 그 순간처럼.
나를 얽어맸던 고정관념들. 나를 속박했던 제약들이 사라지며 마음의 부담이 없어졌다. 나라는 존재가 어떻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자, 해방감에 가슴이 시원해진 것이다.
나는 소녀의 미소에서 사제는 어때야 하고, 인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편견들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소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지만 인간이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 자였으니까.
그녀를 정의할 수 있는 건, 그 옛날의 관념이 아니다. 이제 그녀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가 중요했다. 우리가 서로 공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끝없이 증명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그리고 인간들이 그 증명을 해낼 것이라 믿는다. 나태하고 모순적인 내가 나를 인정하고 살아 있음을 해낸 것처럼.
나는 믿음으로 차서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여전히 헷갈린다는 얼굴이었다.
“선과 악? 그런 존재도 있습니까? 선이면 선이고, 악이면 악이지…….”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런 존재도 있어요. 앞으로 많이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없을 거예요. 아군이 될지 적이 될지는, 그들 개별로 판단해 구분해야 할 테니까요. 혼란스러운 자들도 있으니까 시간을 줘요. 다짜고짜 공격해선 안 되고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는 불안해하며 묻는 기사에게서 눈을 떼었다. 소녀를 보았다. 외양은 달라도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다. 살고 싶다는 것.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는 것. 나는 그녀에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내 우아하고 청순한 외모가 빛을 발할 수 있게, 좀 더 기사들에게 반감 없이 전달되게.
“그건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섣불리 단정 짓지 마요. 왜냐하면 우리도 선과 악을 지니고 있으니까. 어떤 면이 더 드러날지는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하듯,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지켜봐야 할 겁니다.”
나는 지나온 과정을 돌이켰다. 백작 가에서 여기까지 다다르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하는 깨달음이 걸음걸음마다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차곡차곡 쌓여서 나라는 존재가 더욱 단단해졌다고.
“편견 없는 눈으로 봐 주세요. 함부로 적의를 품지 말고.”
나는 말레드레드. 신의 사제이자 소환사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욕망을 지녔는지 깨달은 여자이기도 하다. 신성력으로 사람을 구하면서도 위대한 성기사를 유혹해 내 다리 사이에 머물게 한 모순덩어리 여사제.
“본연으로 봐 주는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를 헷갈리지 않았으면 한다. 마왕과 성기사가 등장했지만 이건 빛이 어둠을 이겼고, 어둠이 빛에 패했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용사의 일생이나 마왕의 최후를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말레드레드. 가죠.”
빛과 어둠 모두 지닌 한 여자의 이야기란 것을.
다가온 아론의 손을 잡았다. 아론은 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이제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이.
라이트 앤 다크, 마침.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