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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앤 다크-215화 (215/220)

215화

그게 뭐라고, 그를 무한정 믿고 싶어질까. 나는 얼떨결에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상해져서 묻고 말았다.

“‘우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이라니?”

“우리가 죽은 뒤까진 신경 쓸 순 없잖아요. 전 그렇게 대단하지도 건방지지도 않아요. 우리가 죽은 뒤까지 신성 제국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도 않고요. 그저, 저와 말레드레드가 살아 있는 동안 철저하게 마계의 기운을 차단하고 싶을 뿐이죠.”

어떻게 보면 지독하게 현실적인 말이었다. 냉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아론을 쳐다보았다. 아론은 그런 내 눈에 잠깐 슬픈 듯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다신 살아생전 그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요. 잠시라도 제 전부를 잃은 거 같은 기분을.”

“……나를 말하는 거야?”

아론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설사 말레드레드가 다시 그에게 가고 싶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론.”

나는 그의 지독히 슬퍼지려는 눈을 보면서 얼른 그를 불렀다. 고통과 비릿함,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휩싸이는 그에게 내가 어찌 더 무정할 수 있을까. 그가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할 수 없다. 이미 그러기엔 나는 내 마음을 깨달은 상태였고, 그라는 존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버린 후였다.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장면을 떠올리고 또다시 울먹였다.

“아까 네가…….”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죽는 줄 알았어……. 널 다시 못 보는 줄 알고, 너무 놀랐었어…….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라……. 네가 없다고 하니까…….”

아론은 조용히 나를 보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

아론은 멈춰 섰다. 그 눈은 무척이나 고요했고, 깊었다. 자신이 갈구하는 걸 참을성 있게 기다릴 만큼. 나는 그에게 고백했다.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마왕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놀랍고 슬펐지만 이런 기분은 아니었어. 내가 존재할 의미가 없다는 기분……. 숨도 쉴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무서웠어…….”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랑 헤어져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난 네가 있어야 해.”

“정말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없으면 안 돼. 내가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말레드레드.”

아론은 속삭였다. 지독히 애가 닳은 것처럼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말 무슨 의미인 줄 진정 아는 거죠? 말하면 다시 돌릴 수 없다는 것을요.”

“알아. 나는.”

나는 울먹이며 말을 끝냈다.

“네가 필요해.”

아론은 그 말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내 목을 들어서 꽉 나를 껴안았다. 너무 강하게 끌어안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 아론…….”

“미안해요, 너무 기뻐서.”

얼른 다시 나를 제대로 안은 아론은 진정한 기쁨에 휩싸인 사람처럼 눈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말레드레드가 그 말을 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냥 따라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론은 눈을 감았다. 너무 황홀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너무 좋아요. 진정,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나는 기뻐하는 아론을 보며 웃고야 말았다. 눈물을 살짝 닦으며 나는 그에게 경고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근데 정말 괜찮아? 나 제멋대로에 변덕스러운데. 만약 내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괜찮아요.”

아론은 대답했다.

“그게 제가 사랑한 말레드레드니까.”

처음으로 회귀한다. 그가 나를 보고 있고, 내가 그를 보고 있는 시점으로. 슬픔과 고독이 서로를 보며 치유되고 결국 웃어 버리게 했던 그 어린 시절로.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고 지금에서야 완성된 것이다. 아론과 내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는 현재로.

“전 정말 걱정하지 않아요. 어차피 말레드레드는 절 떠나지 못할 테니까.”

“뭐……?”

“저만 생각하고 저만 원하도록 만들 테니까요.”

금욕적인 얼굴로 욕망 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다니. 나도 모르게 볼이 뜨거워지고 만다. 그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순정의 불길이다. 갈망과 욕구의 상징이다. 온 불길이 나를 향해 뻗쳐 오는 태양의 남자. 나는 그 불길 하나하나에 감싸여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마저 왠지 가빠졌을 때, 아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이 아름다운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이고 부어 버릴 만큼 키스하고 싶지만,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네요.”

나는 조금 떨떠름해져서 말하고 말았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줄 몰랐는데.”

“말레드레드가 신경 쓰잖아요.”

그는 내가 체면이나 시선에 민감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내 가면이란 걸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 저도 말레드레드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거칠게 입술을 탐하고 그 안을 빨아먹으면 좋아서 헐떡이는 말레드레드를.”

“그, 그만해.”

아론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마왕과의 끔찍한 싸움이 끝난 후 이런 달콤한 시간이 이어져도 되는 것일까. 불안해져서 보고 있노라니, 아론이 저편을 응시하며 말했다.

“신전의 사람들도 무사하군요. 소녀까지도요.”

“아…….”

나는 신전에서 걸어 나오는 이들을 발견하고 감격하고 말았다. 소녀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우리 주변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기사들, 시민들, 괴생명체들. 그들은 아론을 마치 신의 사도처럼 우러르고 있었다. 아론이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숭배할 것처럼 경탄의 표정으로 바라보며.

“사람들이…….”

나는 놀라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론은 그들의 기척을 느낀 것처럼 멈칫하고는 내게 말했다.

“제가 워낙 소란을 떨긴 했나 봐요.”

“소란이다니. 그런 말로 표현될 게 아니야. 너는, 우리 시대의 영원한 악을 물리친 거니까.”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업적을 강조했다. 감히 어느 누가 마왕에게 대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황제도 두려움을 느껴 위대한 나이트와 수만 명의 군사를 동반했다. 그러고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해 도망갔는데, 감히 아론이, 단신으로, 혼자의 역량으로 그걸 해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도 무언가를 하긴 했지만 아론이 한 일에 비하면 큰 건 아니다. 오히려 아론 덕분에 마계로 끌려가지 않았고, 마족이 되지 않았으니까. 나도 그에게 빚을 진 셈이다.

따라서 마왕을 진실로 상대한 이는 아론이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나는 말했다.

“이제 누구도 널 무시하지 못할 거야.”

설사 황제라도.

내 뒷말을 알아챈 것처럼 아론이 눈에 이채를 띄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서 순간이지만 예리한 면모를 엿보았다. 그저 닥치는 대로 마왕을 상대한 게 아니란 느낌이. 그리고 그건 황제가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분명해졌다.

“……대단하군.”

황제는 사제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세 명의 고위 신관이 황제에게 달라붙어 신성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하지만 마왕의 마기를 몸으로 받아낸 게 생각보다 위험했던지 그녀의 안색은 좀처럼 제빛을 못 찾고 있었다. 회색빛 얼굴로 황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마왕을 물리치다니. 아주 훌륭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론을 보았다. 경외심마저 느껴진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에서 나는 황제가 아론을 기특하면서도 어려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론의 힘이 예상보다 더욱 거대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자신의 나이트들이 모두 한 수 접어 줘야 할 아론의 실력에 진정으로 놀란 듯 말했다.

“그런 힘을 가졌다니! 가히 압도적인 신성력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그런 아론을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내게 눈을 돌렸다. 과연 나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황제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내가 묘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그녀를 지켜 냈군.”

“운이 좋았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했지만 황제는 믿지 않는 눈이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운이 아니야. 이번 일은.”

“…….”

“나도 알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지.”

그녀는 아론의 뒤쪽에 모여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닌 아론을 따르고 있는 그 모습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지배자로서 조금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거 같다. 그녀는 잠깐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네가 마왕을 상대로 영리하고도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심지어 너까지도 알고 있겠지.”

“…….”

“그래, 무얼 원하지?”

황제는 일부러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제국에 위대한 승리를 안겨 준 네게 무엇이든 주고 싶구나! 나이트가 되고 싶다면 당장에 나이트가 될 것이고, 제일의 부호가 되고 싶다면 황성의 금고에서 가장 비싼 보석들을 챙겨 주마.”

“저는.”

고개 숙인 아론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안겨 있는 나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폐하의 뒤를 잇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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