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아, 아론……!’
마음이 부산하다. 부산함은 마왕의 손에 올라온 일렁이는 검은 마기를 발견하자 다급함으로 바뀌었다. 마기로 만든 장검. 그의 기운이 갑자기 잠잠해진 이유는 힘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나는 절규했다.
“아, 아……!”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코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목에서 비린 맛이 느껴졌음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꺽꺽거리며 아론을 불렀고. 애타게 응시했다.
섬뜩한 살기가 공중을 지배한다. 차원의 문은 마왕의 기운에 반응한 것인지 천둥소리를 내며 마왕에게 힘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왕은 그 불안정한 힘을 일시적으로 이용해 아래로 내리쳤다. 아론의 목과 가슴을 동강 내 버리기 위해서.
파앙-.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눈가가 뜨겁다. 아마도 눈물이 흐르는 것일 텐데 생각하기가 어렵다. 아론. 그가 없는 세상이란 건 어떤 것일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는 머릿속이 공백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숨조차 굳어 갈 때, 어둠의 잔영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의 뒤편에 작은 빛이 번쩍였다. 생명을 상징하고 자비와 용서를 의미하는, 온기 가득한 빛이. 거기 숨어있었다니.
나는 작게 입술을 움직이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눈부신 빛의 반전이 이어졌다.
빛의 휘황찬란함은 어떤 의미에선 압도적이었다. 세상을 순간적으로 금빛으로 물들이고 하늘을 대낮처럼 환하게 만들었다. 그 빛이 특별한 건 그런데도 망가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생명을 뿌리듯이 온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었으며, 오염된 대지를 제 색으로 정화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
시야가 맑아진다. 작게나마 목소리도 원래대로 나오자 나는 기적을 목격한 기분으로 앞을 바라보고 말았다. 이토록 강한 신성력, 세상을 치유할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바로 마왕의 뒤에서, 어둠의 등 뒤에서 발현하고 있었다.
“!”
나는 아론이 그의 등에 바짝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마왕은 그걸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다 마왕이 고개를 내렸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검을.
“……!”
나는 어느 때보다 놀란 상태였다. 내 시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아론이 그의 뒤를 기습한 것이다. 아론이 힘이 남아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를 기습할 정도의 노림수가 있었다는 것도 굉장했다.
나는 놀란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떨리는 걸음을 옮기는데 마왕이 자신의 배를 뚫은 대검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그 끝을 잡는 것이 아닌가. 일반 존재는 아니란 듯이 곧 그의 손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대검을 가루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2차전. 아론은 그대로 마왕의 몸에 직접적인 충격을 줄 셈인지 손을 뻗었다. 마왕은 이번엔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아론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그는 아론에게 물었다.
“이걸 노린 건가, 애초에?”
아론의 손에서 빠져나온 신성력이 마왕의 마기를 흔들고 있다. 이미 차원의 힘을 이용한 만큼 불안정해 있는 마기에 충분히 무리가 갈 기운이었다.
“내가 다치면 차원의 문이 나를 잡아먹을 테니까.”
마왕은 잠시 위로 눈을 올렸다. 그곳에선 차원의 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신성력의 분출로 1차 충격을 받은 차원의 문은, 아론이 마왕을 찌른 것으로 인해 더는 회복 불가능한 파괴로의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았다. 그곳에서 몰려오는 바람으로 마왕과 아론의 머리카락이 격하게 흩날릴 때, 마왕은 입가를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군. 한낱 성기사에게 이렇게 당하게 될 줄이야. 아니.”
마왕의 핏빛 눈이 상처가 터진 것처럼 진해졌다.
“이렇게 나를 속여서 승리를 취할 정도면 한낱 성기사가 아니겠지.”
“…….”
“내가 그대를 죽일 거라는 것까지 예측한 냉철한 수완가라고 봐야겠지. 내가 곁에 올 때까지 인내심 있게 죽은 척도 해야 하고, 힘이 떨어진 척 연기도 해야 하니까. 모든 게 그대의 뜻대로 진행될 때까지 말이야.”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알고 있나, 네가 이렇게 지독한 남자라는 걸? 철저한 계략가라는 걸?”
아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를 죽이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마왕은 그걸 보며 약간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알고 말고. 우린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지. 이런 대화조차 서로에겐 아까운 시간인 것처럼.”
마왕은 발끝에서부터 부서져 갔다. 그는 아론의 손을 꽉 붙든 채로 말했다.
“우리는 한 명만이 살아남을 거야.”
마왕은 미소 지었다.
“끝내 누가 될지 궁금하지 않나?”
마왕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한없이 냉담했다. 그는 차원의 문이 쿵쾅거리며 폭발의 전조 증상을 드러내는 걸 보면서 아론에게 말했다.
“시간은 내 편이야.”
마왕은 부서져 가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잠깐 승리했다고 안도하지 마. 이 승리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 무한한 생을 추구하는 초월자를 이길 수 없다.”
아론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마왕만큼 살기에 휩싸여 있었고, 분노와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마왕은 그 무자비한 혐오가 맘에 든다는 듯이 짙은 미소를 뿌렸다.
“나는 언젠가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와서.”
그의 시선이 이동했다.
“내 것을 되찾겠다.”
“……!”
나를 쳐다보고 있다. 분명하게. 아론의 표정이 더욱 매서워졌음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때까지 잠깐의 수완이 만들어 낸 평화를 누려 보도록. 그녀를 온전히 가진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 어차피 꿈 같은 한시가 될 테니까.”
“으아아-!”
마왕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론의 입술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내 모든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아론은 환히 빛났다. 차마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기세의 신성력이 뿜어졌고, 마왕을 감쌌다. 마기를 쥐어뜯고 소멸시키며 그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혼란과 소란함 가운데서 마왕은 지그시 눈을 가늘게 뜨고 아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에 아론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
그러나 그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폭풍의 바람이 전달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뭐라 했든 아론의 심기를 거스른 건 분명하다. 아론의 몸에서 피어나는 신성력이 최대치로 커져 버렸으니까.
파앙-
거센 신성력에 결국 차원의 문이 폭발했다. 그 소음과 여파는 천지를 뒤흔들 만큼 우렁찼다. 마기는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차원의 문을 포기했고, 원천을 잃어버린 차원의 문은 고장 난 것처럼 털털거리다가 마왕을 빨아먹으며 사라지고 말았다.
“아…….”
마왕이 정말 사라진 거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차원의 문은 그저 사라진 게 아니라 검은 불꽃을 남겼고, 나는 그게 터지면 이 일대가 폐허가 되리란 걸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내 지팡이를 찾아 허리를 더듬거릴 때, 아론의 손이 움직였다.
작은 빛. 아론은 제 온몸을 쥐어짜는 것처럼 마지막 신성력을 뿜어냈다. 이윽고 한 줄기의 광선처럼 눈부신 빛이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오자 검은 불꽃이 도망 다니듯 날아갔다. 그러나 결국 빛에 이기지 못해 잡힌 채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구체에서, 작은 주먹 크기로. 그리고 점점이 작아졌다. 마침내 푸른 하늘이 보일 정도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세상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과 녹색 대지. 느슨한 바람이 전해지자 나는 그만 안도해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 오직 이 말밖에는.
잠시 후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부드러운 파도처럼 나를 들고 가는 사내가 있다. 아론이었다.
“아, 아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른 것이었는데 아론은 고개를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만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멀쩡하지 않았다. 마왕과의 싸움이 그의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한쪽 눈은 실핏줄이 터져 완전히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입가와 코에 흐르는 피는 그가 내부 장기가 무리가 갈 정도로 힘을 썼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괜찮냐고 묻고야 말았다.
“그럼요.”
아론은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칠어진 그의 목이 그가 얼마나 고전했는지를 또다시 증명하고 있었다.
“말레드레드와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정말 끝난 거야? 정말 그가 떠난 거야……?”
“네.”
아론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오직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싸워 온 것이라고 눈으로 말하듯이. 나는 그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고마움을 느끼면서 소음이 들려오는 주변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은 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왕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지하며 환호했다. 죽은 동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마왕이 물러났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 기쁨을 표현하듯이 서로를 껴안으며 우는 자들을 보니 가슴이 숙연해진다. 죽어 있는 동료들의 시체가 그 뒤로 눈에 밟힐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정말 끝난 거겠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참담해져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직 끝이 나지 않은 거면 어쩌지……?”
불안해진다. 한 번 마왕이 나타났을 뿐인데 이 셀 수도 없는 죽음의 대열이라니.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나타난다고 선포했던 마왕이 기억난다. 아론은 무겁게,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그럴 일을 없을 거예요.”
“뭐……?”
“절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
아론은 이상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아론은 미소 지었다.
“약속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