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비키……?”
“절 기억하는군요! 말레드레드! 이게 얼마만이에요?”
내 양손을 덥석 잡아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기뻐하는 아가씨는 일전에 함께 일했던 일레그레 가문의 아가씨였다. 열정과 활기가 넘쳤던 그녀.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말랐냐며 눈물을 훔쳤다.
“말레드레드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수많은 마족과 마물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요? 얼굴을 보니 알겠어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을 말레드레드가요, 전 벌써 보여요!”
그녀는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이곳 수도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만남을 요청했어요.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허락이 떨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어요. 말레드레드 얼굴이 나쁜 걸 보니, 몸에 좋은 걸 좀 가져올 걸 그랬어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근데 목소리가 좀 다르게 들려요. 목을 다친 거예요?”
그녀는 내 목에 아직 남아 있는 붉은 상흔을 보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말레드레드의 고운 목청을 망친 마족이라니! 나중에 만나면 뺨이라도 때려 주고 말 거예요!”
그녀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나는 모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냈죠. 그날 가문으로 돌아오고 부모님 때문에 저택에 갇혀 있다시피 했지만요. 제가 어디 가만있을 사람인가요? 저택을 뛰쳐나와 마물 공부도 하고, 전술 공부도 했어요.”
그녀의 눈은 신중한 빛으로 반짝였다.
“사절단으로 있으면서 겪었던 일이요. 제가 그동안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들게 하더라고요. 안락한 수도 저택에 앉아서 시종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걱정했던 제가 어리석게도 느껴졌어요. 진짜 싸움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 선 전사들에게 있는 것이었는데요.”
“비키 같은 고민도 필요한걸요. 누군가는 책상에 앉아서 미래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전장에서 현재의 위험을 없애죠. 다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 대답에 비키는 진하게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으면 와닿지 않았을 텐데, 역시 말레드레드가 말하니 뜻깊게 느껴져요! 그리고 말레드레드를 말할 때마다 용기와 희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요. 그날 고생했던 모습도 떠오르고요. 이 어둡고 위험한 세상에서도 우리를 구해 줄 환한 빛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상기하며 안심하죠.”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쓰린 미소를 지었다.
“늘 저 좋을 대로 해 왔어요. 남들은 잘 모르지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능력을 발휘했고 선두에 섰어요. 위대한 목적, 어떤 훌륭한 도의를 갖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존중받고 싶어서.”
왜일까. 곧 사제로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따뜻한 손의 감촉과 선망 어린 촉촉한 눈동자를 보자 그동안의 죄책감이 스며 나온다. 나라는 존재가 사실 무척이나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운이 좋아 사람을 구했어요. 신성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말레드레드…….”
“괜찮아요. 전 제가 이런 사람인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제게 실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비키가 절 너무 좋은 사람으로 봐 주는 것 같아서, 말해 주고 싶었어요.”
비키는 내 말에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미움이나 실망에서가 아니었다. 비키의 눈동자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이 깔려 있었다.
“제가 그래서 말레드레드를 좋아하는 거예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자 비키가 웃었다.
“자신에게 가혹하잖아요! 좀 더 잘난 척해도 좋은데, 그렇지 않고 상황을 돌아보고 반성하죠. 마치 내가 비를 맞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정말 성숙하면서도 경건한 느낌이에요.”
“비키, 전 그런 생각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알아요. 전 단지 말레드레드가 좀 더 자신에게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말레드레드가 자신을 위해 사람을 살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닌걸요. 오히려 칭송받아야 마땅하죠. 저도 유명해지고 싶어서 잘하려는 것도 있으니까요. 누구나 다 그런 면이 있을 거예요.”
“전…….”
나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비밀, 욕망을 알고 나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비키는 나쁜 생각은 말라는 듯이 내 손을 꽉 쥐었다.
“가끔 말레드레드가 고통을 참고 감정을 감추는 느낌을 받았어요. 왜 그럴까 했는데 이제야 알겠어요. 자신의 동기가 신성하지 않아 결과도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거라는 걸요. 하지만 말레드레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결과는 동기만큼 중요해요. 말레드레드가 어떤 생각을 했든 분명 좋은 일을 목숨을 걸고 한 거예요.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을 구한 거예요. 그건 아주 중요한 결과에요.”
“비키, 날 너무 좋게 봐 주는군요.”
나는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 눈앞의 긍정적인 아가씨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고 만 것이다.
“그런 면도 있어요. 왜냐하면,”
비키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전 말레드레드를 아주 좋아하니까!”
비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약 저처럼 말레드레드를 좋게 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하지 말아요. 그 상대가 말레드레드를 무척 좋아하고 있음을!”
불현듯 그 말에 머리를 스치는 한 사람. 나를 보고 여전히 달콤하고 상냥하다고 말했던 그가 떠오른다. 날 선망했던 눈동자도.
‘윽…….’
가슴이 욱신거리는데 비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이제 가 봐야겠어요. 만남을 잠깐만 허락한다 했거든요.”
비키는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가겠다고 했다.
“다음에도 오려면 지시 사항을 잘 지켜야 할 거 같아요.”
“와 줘서 고마워요.”
“뭘요. 몸이 좋아지는 대로 저희 저택에 놀러 오세요. 맛있는 거 볼만한 거 제가 잔뜩 준비해 놓을게요!”
“고마워요.”
“물론 원한다면 숙부도 부를 수도 있는데…….”
비키는 그렇게 말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내 표정이 조금 굳어진 걸 확인했는지 그녀는 재빨리 얼버무렸다.
“하지만 여자 둘이 노는데 안 오는 게 더 좋겠죠!”
“비키.”
“네?”
가려는 그녀에게 서둘러 물었다.
“바깥에 제 소문이 현재 어떻죠?”
“어, 어, 그러니까…….”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망울을 한 바퀴 굴리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신전에서 안 말해 줬나요?”
“대략적으로만요. 제 이야기로 뜨겁다는 정도만.”
“그렇군요. 사실 밖에선 연일 말레드레드와 마왕의 관계를 추측하는 소문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아마 직접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거예요. 성기사 아론나이드 경까지 추문에 합세한 상태라…….”
비키는 눈썹 위를 기이하게 찡그렸다. 곤란함과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추문이 더욱 지저분해졌죠. 그나마 얌전한 표현을 고르자면 빛과 어둠을 모두 사로잡은 그 유명하신 사제라고 할까요? 비꼬아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부럽고 대단하다는 평가가 주예요. 말레드레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다행히 신전에서 엄격하게 외부인을 차단하고 있어요. 저도 여기 들어오기까지 한참 걸렸으니까. 말레드레드와 친분이 없는 사람은 아예 들어올 수도 없겠죠. 그나마 수확 축제가 곧 시작되어서 그런지 화제성이 좀 잦아들었어요.”
“…….”
비키는 내 얼굴을 살피고는 자신을 책망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봐요. 말레드레드, 몸도 안 좋은데.”
“아니에요, 고마워요. 계속 궁금했거든요. 여기에만 있으려니 정보를 들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어요.”
“아마 보호를 위해 그런 걸 거예요. 수도에선 말레드레드를 안 좋게 보는 귀족들도 있다 보니…….”
“그래요?”
“하, 하지만 신경 쓰지 말아요. 어디까지나 일부예요! 신전에서 말레드레드를 보호하고 있는 걸 보면 신전도 이 상황을 나쁘다고만 보지 않는 거고요!”
신전에선 이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감시라고 봐야겠지.’
혹시나 내가 말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혹은 마왕하고 무슨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일거수일투족을 점검받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도움이 필요할까.’
그런 생각을 문득 할 때 비키가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와서 소식을 전할게요! 수확 축제 기간에 함께 나가면 정말 좋겠는데, 쉽지 않겠죠?”
나는 그럴 거라며 쓰리게 웃었다.
“저기 비키.”
몸을 돌리는 그녀에게 나는 서둘러 부탁 하나를 했다.
“혹시 헤르간의 생존자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요?”
“아뇨, 따로 들은 건 없는데요.”
“그렇다면 몰래 알아봐 줄 수 있나요? 살아남은 자들에 대해서. 특히 어린아이들과 괴생명체에 대해서요.”
“근데 왜 몰래 알아봐야 하는 거예요?”
비키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역시 목청을 낮추면서 말했다.
“신전에선 제가 그런 걸 신경 쓰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현재 이런 상황 속에 있다 보니 작은 거라도 조심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