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79화 (179/220)

179화

“알겠어요. 조용히 알아볼게요.”

비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비키와 이야기를 하고 나자 가슴이 조금 시원해진 것 같다. 과정만큼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 목숨을 걸고 좋은 결과를 이뤄낸 것은 중요하다는 표현들이 왜인지 긴 여운을 남기며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아론.’

나는 볼 수 없는 청년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얀 뼈마디가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를 정녕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아 갈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친구분을 만나서 그런지 얼굴이 밝아진 거 같네요.”

대사제였다. 그녀는 인자한 미소로 내 얼굴을 살피며 들어왔다.

“함께 일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인 가문인 일레그레는 아주 훌륭한 수도의 명문가이지요. 대대로 성스러운 임무에 일생을 바쳐 왔어요. 그의 숙부 라드 경 또한 우리 신전에서 이름난 성기사로 널리 알려져 있고요.”

“…….”

내가 대꾸하지 않자 대사제는 굳이 물었다.

“이미 알고 있죠? 라드 경에 대해서.”

묻는 의도가 뭘까. 그녀가 나의 결혼 상대로 거론됐던 그에 대해서 모를 리 없다. 황제가 뒤에서 주선한 이 결혼은 아론과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추진됐었다. 나는 건조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잘은 몰라요. 함께 싸웠던 적이 있을 뿐이죠.”

내 어조가 딱딱하게 들렸는지 대사제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사실 그분이 걱정했다는 걸 전하고 싶었어요. 헤르간의 사태가 있고 나서 말레드레드의 안부를 우리 쪽에 계속 물어보고 있어요. 혹시라도 만나 보고 싶다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사제는 멈칫하더니 다시금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쉬고 싶다고 전하겠습니다.”

“저는.”

나는 대사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죠? 이제 거의 다 나아서 혼자서 움직이는 것도 무리가 없는데요.”

대사제는 말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어쩐지 내 외출을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폐하만이 그 답을 알고 계십니다.”

“간단한 외출만이라도 할 수 없나요?”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 수확 축제를 앞두고 있어서 수도엔 인파가 북적입니다. 많은 이들이 신전을 방문하고 있어요. 그들 중 대부분은 소문의 사제를 보고 싶어 합니다.”

“소문의 사제?”

내 중얼거림에 대사제는 찌를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말레드레드죠. 물론.”

“…….”

“헤르간의 사태라 불리는 사건이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어요. 뜨거운 관심이 우리 신전에 몰려 있죠. 따라서 이런 시기에 가벼운 맘으로 외출하는 건 결코 현명한 생각이 아니에요. 마계를 혐오하는 집단에 끌려갈 수도 있고, 위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지시가 있을 때까진 이 방에서만 머무는 게 좋아요.”

대사제는 ‘그리고, ’하며 덧붙였다.

“보라만 백작의 제안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말레드레드를 향한 불쾌한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라도요.”

“불쾌한 소문이라뇨?”

내 물음에 대사제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마왕을 유혹해 이 신성 제국에 그를 끌어들였다는 것이죠.”

“……!”

“혹자들은 당신이 우리 신성 제국을 마왕에게 바치고 그의 사랑을 얻은 거라고 떠들기도 해요.”

“그런……!”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 성생활과 제국은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내 사제로서의 삶은 멀리 떨어뜨려 놓고 그하고는 순전히 욕망하는 여자로서 관계하고 싶었을 뿐이다. 처참하게 일그러져 구겨진 종잇장처럼 입술을 구기자 대사제는 선뜻 위로해 왔다.

“걱정 말아요. 우리는 말레드레드가 그런 사람이라고 보지 않으니까. 말레드레드가 여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마족을 물리쳐 왔는지 이미 조사를 통해 확인했어요. 물론 의아한 점은 남아 있어요. 마계의 군주라고 불리는 마왕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에 대해서요. 하지만 차원의 문을 여닫는 소환사라면 이상한 일을 드물게 겪곤 하니까, 그런 연유가 아닐까 추측하지만요.”

그녀의 추리는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실제로 소환사로서의 힘 때문에 마계로 끌려가서 마왕과 대면한 것이 아닌가. 대사제는 동요하고 있는 나를 보며 한층 꾀어내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레드레드가 사실을 말해 준다면 좋겠어요. 우린 어떤 이야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엘크리찬의 성실한 종에게는 충분한 자비를 베풀 겁니다. 어떤 위험에서도 보호할 각오가 되어 있고요.”

“저는…….”

하지만 나는 그 꾀함에 순순히 응할 만큼 어리석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오히려 뻔뻔한 편에 속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마왕이 왜 저를 살려 준 것인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요? 헤르간의 사태가 일어난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죽인 수하가 우리 도시를 괴생명체들로 변하게 하려고 했던 것과 별개로, 마왕이 당신을 구한 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뭔가 떠오르는 게 있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왜 제가 관심을 받고 있는지.”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그녀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내가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하자 그녀의 미간은 곧 깊게 주름졌다. 그녀는 기억상실을 흉내내는 나를 완전히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왕의 능력이 다양한 터라 내게 어떤 작업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었다.

“강한 마기에 노출되면 신체가 예상 밖으로 반응하기도 하죠. 마왕은 누구보다 마기가 강력한 자인 만큼, 기억에 혼란을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실제로 마왕에게는 룬이란 애완동물이 있어 기억을 조작하거나 망친다. 나는 입이 간지러웠지만 실제로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대사제는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없군요. 마왕을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지 않을까 했는데.”

“…….”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수 있죠. 당신이 마왕의 호감을 산 이상 접근하여 그의 약점을 알아내면, 어쩌면 당신은 역사에 남을 성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대사제는 미소 지었다. 조금 딱딱하고 냉랭한 미소를.

“좋은 쪽으로 어서 결론을 내리기 바라요.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걸 명심하고요.”

그녀가 나가자 침묵이 내려앉는다. 나는 가만히 침대 위로 올라가 고개를 숙였다. 마왕이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은 늦으면 나를 찾으러 인간계에 온다는 뜻인가? 그리고 인간계에 왔을 땐, 순순히 나를 데려가지 않겠지? 파괴하고, 죽이고. 마왕이 인간에게 해야 하는 본연의 일을 할지 모른다.

나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가라앉은 마음과 무거운 어깨. 나라는 존재가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나는 침대에 앉아 두 손으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몸을 수그리고 눈을 감았다. 무엇을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에 고통스럽다. 신전에 있어도,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아도 나는 이제 인간일 수 없을 테니까.

“……?”

어느샌가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희미한 빛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먼 곳에서 나를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따뜻함이 몸을 감쌌다. 꿈인가 싶었는데 이내 눈을 뜨자 아스라한 빛무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가는 인기척의 소리를 들었다.

“……잠깐!”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일지 모른다고, 아니 그일 거라고.

어떻게든 잡고 싶은 맘에 나는 털신도 신지 않은 채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막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는 갑옷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살짝 흔들리는 금발을 확인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러나 복도를 가로질러 그를 뒤쫓기 전에 내 팔을 잡는 이가 있었다.

“방 안에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요!”

“어서 들어가십시오.”

“하, 하지만 그가……!”

나는 팔을 잡은 성기사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들의 악력은 우악스러웠다. 어떤 설명도, 항변도 통하지 않았다. 그들이 양쪽으로 내 팔을 끌고 가자 나는 힘없는 나뭇가지처럼 딸려 가야만 했다. 그들은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만 실망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기 전에 보고 싶었는데…….’

왜냐고 묻는다면, 나도 대답할 수 없다. 그냥 그가 보고 싶다. 보고 싶기 때문에 그를 붙잡고 싶다.

‘앞으로 영영 못 보게 되는 걸까.’

그 결론만이 덩그러니 가슴 속에 떠오른다. 나는 그만 아프도록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다음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맑고 상쾌한 아침이다. 움직이기 훨씬 좋아진 몸이 느껴졌다. 남다르게 돌고 있는 신성력도 흡사 내 것처럼 친근했고.

“왜 몰래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날 싫어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치료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도 할 수 없었고. 아론은 밤에 나타나 내게 놀라울 만한 신성력을 쏟고 사라졌을 뿐이다. 대사제에게 물어봐도 그의 행방이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으니 이제는 그가 일부러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내게 화났나?’

그럴 이유가 있겠지만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인상을 쓰며 테라스로 눈을 돌렸다. 아침 해가 커튼을 뚫고 눈이 부시게 들어온다. 그 빛이 꼭 그를 닮아 얄밉도록 화사했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천을 투과한 햇살을 응시했다.

결국 끌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라스로 걸어가 아래를 보자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제, 신전 일꾼들, 그리고 저쪽에서 걷고 있는 성기사 무리가 보인다. 나는 시선을 더욱 아래로 바짝 숙였다. 5명 정도 되는 성기사의 선두와 투구를 쓴 성기사 하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반갑다는 듯이 손을 부딪친 상태였다.

‘어?’

나는 그들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이야기하는 성기사 옆으로, 투구를 그대로 쓴 채 이야기하는 성기사가 내 눈길을 끈다. 머리를 가려져 있었지만 체격이며 분위기며 내가 알고 있는 그와 비슷했다.

‘아론이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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