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77화 (177/220)

177화

내가 멍해져서 묻자 가만히 있던 대사제가 나섰다.

“사제로서 말레드레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왕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왜 수하를 죽이고 말레드레드와 성기사를 구했는지, 당신의 생각을 말해 주면 됩니다.”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마왕과 그렇고 그런 사이고, 아론을 구하기 위해 인간임을 포기한 상태라고. 나는 목 아래가 묵직하게 얹히는 걸 느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편하게 말해 주시면 돼요. 마왕이 당신에게 그런 호의를 보인 이유에 대해서요.”

대사제가 부드러운 어조로 재촉했으나 나는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다른 면모를 이들에게 다 밝힐 수 있을까. 참담한 심정으로 입술만 달싹거리자 보라만 백작이 멋쩍은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 하긴 그럴 만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대사제와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보라만 백작이 긴밀한 목소리로 어조를 바꾸며 말했다.

“괜찮다면 저의 추측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를 쳐다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나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마왕은 성기사가 아닌 마족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것만 보면 성기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마왕이 처음에 말을 건 상대가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사악하고 무도한 존재가 당신의 귀에 무슨 이야기를 흘려 넣었는지 몰라도 멀리서 지켜본 사제들이 그러더군요. 마왕이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고요. 오히려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당신의 애정을 얻기 위해 애쓴다는 느낌이었다나?”

“…….”

보라만 백작이 눈을 빛냈다.

“상황을 종합하건대 마왕은 성기사가 아닌 당신을 위해서 마족을 처단했다고 보입니다. 말레드레드, 당신을 위해서요.”

나는 보라만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차분했지만 어떤 흥분이 느껴졌다. 그는 다독이듯이 말했다.

“사제로서 이 추측이 얼마나 불쾌할지 압니다. 그래서인지 안색이 몹시 창백해져 있군요. 허나 마음을 잘 다독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마왕이 당신을 위한다는 것은, 신성 제국이 세워진 이래로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이 될 테니까요. 벌써 항간에선 ‘헤르간의 사태’로 사람들의 입에서 이번 일이 뜨겁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마왕이 위하는 자가 사제가 될지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제2 행정관에서도 이 대사건에 대해서 모두 들떠 있는 상태입니다.”

“드, 들떠…… 있어요?”

멈칫한 내 물음에 보라만 백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빛나는 눈에서 이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고 싶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보라만 백작은 신중한 목소리로 열의를 더해 말했다.

“우리는 이 사건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마계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는 기회요.”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야심 가득한 마음이 느껴지고 만 것이다. 그는 조금 더 흥분된 목소리로 설득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말레드레드도 사제이니까 잘 알 겁니다. 우리 신성 제국이 해마다 마계에서 오는 불쾌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을 국방비에 쏟고 있는지요. 일반 제국이었으면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서 훨씬 큰 부를 낳았을 돈이었겠죠. 하지만 늘어나는 마물과 마족으로 우리나라는 외부와의 교류도 줄인 채, 내부 치안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마계를 이번 일로 억누를 수 있다면 우리 제국이 국제적으로 크게 도약할 기회라고 보입니다.”

“하, 하지만…… 마왕이 이번 일로 약해졌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사제로서 신성 제국의 평화와 안정은 늘 바라던 것이었다. 하지만 마계란 존재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어둠 속에서 우리를 노렸고 방심한 순간에 우리를 덮쳐 커다란 피해를 입히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으나 보라만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폐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지요. 말레드레드를 직접 설득하고 싶어서요.”

대사제가 끼어들었다.

“말레드레드의 도움이 왜 필요한지 알겠지요? 마왕이 그토록 말레드레드에게 친근감을 느꼈다면 말레드레드가 그의 곁에서 그의 상태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되겠지요.”

대사제는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은 날카로움과 경계가 있었다.

“사제로서 그 일을 하는 겁니다. 엘크리찬의 종으로서 이 위대한 임무를 맡는 것이지요.”

“저, 전…….”

마왕의 붉은 눈,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 저릿저릿한 손길이 내 몸에 와닿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제 나는 더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마기를 뿜어내는 지하세계의 존재가 되고 말겠지.

나는 몸서리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없어요, 할 수 없어요…….”

“겁나는 걸 이해해요.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 정말 그럴 능력이…….”

“엘크리찬만을 떠올리세요. 마왕의 곁에서도 당신은 타락하지 않고 일을 해낼 겁니다.”

보라만 백작이 말하고 대사제가 말한다. 그들은 내가 제국을 위해 마왕에게 접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말레드레드가 도와준다면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일관적인 목소리에 나는 절망하듯 고개를 수그리고 말았다.

밤이 깊었다.

“……불을 좀 더 밝힐까요?”

에나는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힘없는 내 반응에 에나는 걱정된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도, 도와줘서 고마워.”

“아, 아니에요! 제 일인걸요. 마땅히 해야 하는 제 일인데…….”

어스름 속에서도 쑥스러워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순수하고 해맑은 사제. 그녀는 이 세계에 물들지 않았다. 그게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나에게는 왠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호, 혹시 내게 연락 온 거 있니?”

나는 아론을 떠올렸다. 헤르간에서 헤어진 소녀도 걱정되었다. 그들의 안부를 누군가라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에서 묻자 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백작 가문은 조용하다고만 들어서요.”

“백작 가문? 설마 메리옹……?”

그 이름을 얼마 만에 입 밖에 꺼내보는지. 에나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가문을 말씀하신 게 아니세요?”

“……거긴 오래전에 떠나와서. 아무튼 소식이 없구나. 전해 줘서 고마워.”

내 대답에 에나는 머뭇거렸다. 망설이는 것 같아서 쳐다보자 에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사제님께서 말을 꺼내지 않으셔서 제가 말씀드려도 되나 싶은데요. 어젯밤에 성기사 한 분이 말레드레드를 찾아왔었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중하게 한 자 한 자 말했다.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지만 알고 계신 분이셔서요. 대사제께서도 그분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신 터라…….”

“……혹시 아론나이드 경?”

내 대답에 에나가 맞다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떤 일로 오셨는지 밝히진 않으셨어요. 말레드레드 님의 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시고 잠깐 들어가셨다가 바로 나오신 터라서…….”

에나는 내 눈치를 살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대사제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라 저도 딱히 말릴 수는…….”

“괜찮아.”

어젯밤 흐릿하게 보았던 아론의 얼굴이 꿈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왜 그가 조용히 서 있다만 간 걸까를 생각해 보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이만 쉬세요. 전 가 볼게요.”

에나가 문을 닫고 가자 정적이 찾아온다. 나는 문득 아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론에게는 그날 있었던 일을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전부는 아닐지라도 내 마음에 대해서. 그를 구하고 싶었던 내 진심에 대해서. 나는 눈을 꼭 감으며 날이 밝는 대로 아론을 찾아보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어서도 아론과 만날 수 없었다. 대사제에게 아론과의 만남을 요청했으나 대사제는 그가 바쁘다는 이야기를 하며 만남을 주선하지 못했다고 했다.

실망감으로 우울해졌을 때 보라만 백작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마왕을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으면 좋을지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열의를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가슴이 무거워졌고 막막해졌다.

내가 만약 마왕을 다시 보러 가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내게 있어 사제로서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걸 모르는 보라만 백작은 나를 조금만 더 설득하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 줄 거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뚜렷한 사건 없이 하루가 더 흘러갔다. 나는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 식욕이 없어졌고, 흥미가 사라졌다. 침대에서 나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걱정된 에나가 창밖을 구경하자고 억지로 나를 데려간 게 오늘 하루 중 침대에서 걸어 나온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런 내가 만나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아론이었으나, 나를 피하는 것인지 아론은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실망스러웠고 착잡하기까지 했다. 아론과 헤어져야겠다 각오했던 나인데, 막상 그를 볼 수조차 없다고 하자 왜 기분이 이리 가라앉을까.

나는 이대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마왕에게 종속되어 버리고 마는 걸까. 나는 어느덧 거의 다 나은 목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때, 손님이 찾아왔다.

“말레드레드!”

그녀는 눈가에 벌써 물이 고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