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쾅!
얼마나 잠을 잤을까. 무언가 충돌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뜬 나는 어둑한 밤하늘을 요란하게 밝히는 번개를 발견했다.
“흣.”
뻣뻣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자 금세 목이 아파 온다. 어깨에서부터 데일 듯한 통증이 목까지 눌러 왔다. 저릿저릿함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집중하여 하늘을 바라봤다.
“……아.”
하늘에서 충돌하는 두 개의 빛. 검은 기운과 하얀 기운이 부딪칠 때마다 하늘이 번쩍거렸다. 번개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상반된 두 힘의 충돌이었던 걸까? 깨닫는 순간 다시 검은 빛과 흰빛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대체 얼마나 잔 걸까.
나는 뻐근한 몸을 움직였다.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찾아 줍고 무릎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를 보자, 어느새 도시 전역을 가득 밝힌 횃불이 보인다. 횃불은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단이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인 기사단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흰빛이 별빛처럼 뿌려졌다. 마물은 그 공격에 몸부림을 치면서 괴성을 질렀고, 마족들은 열이 나서 달려들었다.
쾅, 쾅!
거대한 빛이 쏟아지자 마족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물러서야 했다. 아주 강력한 신성력. 그것은 일개 성기사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나는 성기사 무리 중 앞서서 싸우는 자들이 매우 강력한 능력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트들인가?’
어떻게 이곳에 모여든 것인지 새삼스레 궁금해졌지만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에레나의 모습이 떠오르자 걸음이 느려졌다. 이대로 도망쳐도 될까? 변해 버린 기사단장의 모습과 죽은 사제의 모습까지 눈앞에서 뒤죽박죽 섞이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내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은 사제와 마족이 싸우는 동안 도망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비오타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안내원이 없지만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용케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애써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소녀든, 함께 싸웠던 동료든, 에레나의 실험이든 모른 척하고.
“…….”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 머릿속에 찡한 울림을 준다. 가야 한다는 내 판단에 어딘가 불편한 가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해 주듯.
휙.
그때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지팡이를 황급히 잡았다. 소리 나는 곳을 유심히 쳐다보자 커다란 동공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그것은 나만큼 놀란 듯싶었다. 한눈에도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괴생명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괴생명체는 품 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보자기에 싸인 아기였다. 하지만 피부는 붉게 변색되어 있었고 딱딱한 껍질이 앉아 있었다.
‘변화가 된 건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에레나가 실험을 자행한다고 했다. 내가 자는 동안 진행되고 만 걸까. 나는 굳은 채로 괴생명체와 아기를 바라보았다. 거죽이 녹아내린 듯한 몰골을 한 괴생명체는 아기의 어미로 보였고, 지팡이를 쥔 나를 보며 무척 경계하고 있었다. 내가 꿈쩍하지 않고 있자 그녀는 재빨리 숲속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싸움을 피해 도망치는 건가?’
그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숲에서 도망치는 괴생명체는 방금 그녀만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괴생명체들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고, 뒤를 힐끔거리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뒤를 쫓는 성기사들이 있던 것이다.
“아악-!”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괴생명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마물만 처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괴생명체들은 어찌 됐든 마물과 동화된 자들이었고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는 생명이었다. 그래서일까. 도시의 기사단처럼 잔인하게 괴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까악, 칵!”
얼어붙은 채로 보고 있을 때, 기사 하나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괴생명체를 밟아 내리누르는 것이 보였다. 괴생명체는 살려달라는 듯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무정할 정도로 차가운 성기사는 그 어린 것의 등에 그대로 검을 꽂아 넣었다. 잠시 후, 작은 괴생명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암적색의 액체만이 땅으로 흘러나와 대지를 적실 뿐.
나는 비틀거렸다. 어쩐지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것은 진정 악과 선의 싸움이 맞을까? 사악한 무리를 처단하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개별로 판단할 사안임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에레나의 의도…….’
인간이 스스로 자멸할 거라 했다. 같은 종족을 죽이면서. 나는 그녀가 의도한 것을 정확하게 눈으로 목격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인데…. 입술을 깨물었다. 성기사가 다른 곳으로 떠난 뒤의 괴생명체의 시체를 보면서 멈춰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 마물!”
그것은 통통 튀어 다니는 공 마물이었다. 작은 공처럼 생긴 마물은 땅을 뛰어다닐 때마다 검은 자국을 남겼다. 땅을 오염시키며 돌아다니는 마물은 나를 보자, 표적을 발견했다는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파앙-!
재빨리 지팡이를 휘둘렀다. 신성력이 날아가자 마물은 부르르 떨더니 곧 공의 형태가 부서지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분노한 마음으로 다시 신성력을 쏘았고 마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하고 발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공 마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곧 수없이 많은 마물들이 땅을 뛰어다니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지팡이를 쥐었고 신성력을 끌어모아 던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한참을 공 마물을 없애고 있었을까.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마물이 내 앞까지 다가온 것이 보인다.
쿵.
마물이 거대한 발을 뻗자 땅이 울렸다. 나는 빠르게 몸을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신성력을 그것의 눈에 쏘아 보냈다.
키아아앙!
정통으로 맞은 마물은 성이 났는지 주먹을 휘둘렀다. 두꺼운 망치 같은 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가 붕- 하고 떨렸다. 두 번은 피했지만 세 번째 휘두름은 피하지 못했다.
“크읏…….”
하필 어깨를 빗맞고 말다니. 나는 고통에 일그러진 눈을 간신히 떠야 했다. 마물은 그런 나를 보고 죽이겠다는 듯이 다시 거대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퍼억, 빛나는 검이 팔을 잘랐다. 마물은 신성력 가득한 공격에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누워 버렸고, 나는 누가 도와준 것인가 살필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곳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데…….”
성기사였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마물을 힐끔거리고는 내게 말했다.
“어디 소속입니까? 개별적으로 괴생명체를 쫓고 있던 겁니까?”
그는 내가 소환사라는 것을 지팡이를 보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나를 괴이하다는 듯이 본 그가 곧 내 머리 색과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멈칫했다.
“혹시, 아론나이드 경이 찾고 계신 지역 본대의 소환사…….”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거대한 손이 그를 낚아챘다. 남아 있는 팔로 말 위의 기사를 낚아챈 마물은 눈이 붉게 충혈될 정도로 기사의 몸을 꽉 쥐었다.
“아악-!”
우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새하얗게 질려 지팡이를 휘둘렀으나 마물은 비명만 질렀을 뿐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결국 팍 소리를 내며 기사의 몸이 터져 버리자 피가 확 뿜어졌다. 내 몸까지 튄 피를 보면서 넋이 나간 얼굴로 보고 있자 음산한 으르렁거림이 들려온다.
크르허러렁!
한층 더 소름 끼치게 변한 마물. 마물은 이제 내가 목표란 듯이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물에게 던졌다. 돌과 나뭇가지. 그러나 그것은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오히려 화만 키운 듯싶었다. 마물이 기어이 발을 들어 나를 짓밟으려는 순간, 여러 개의 빛이 마물을 강타했다.
“저기다! 마물을 죽여라!”
말을 탄 성기사들이 무리 지어 달려왔다. 그들은 대검에서 신성력을 뿜어내며 마물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뒷걸음질을 쳤고, 얼마 가지 않아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쿵.
“……아.”
뒷머리를 제대로 박았는지 눈앞이 흐려진다. 한쪽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칼질 소리에 심장이 놀란 것처럼 헐떡거렸다. 나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왜인지 힘이 생기지 않았다. 멍하니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려니 곧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멈추고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괜찮으십니까.”
눈만 깜박이자 곧 그가 뒤쪽의 성기사에게 말했다.
“다쳤군. 치료 사제에게 데리고 가도록 해.”
말에 옮겨져 빠르게 임시 천막으로 향했다. 그곳은 싸움터의 한복판이었고, 마물과 마족에게 다친 성기사들로 아비규환이었다.
“신성력을 부여할게요.”
한껏 지쳐 보이는 치료 사제가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머리에 닿자 곧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아릿한 느낌이 희미해졌다. 잠시 후 치료 사제는 손을 떼며 말했다.
“잠깐 쉬고 일어나셔야 해요.”
그녀는 병상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곧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치료의 덕분인지 아까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손에 쥔 지팡이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킨 나는 마족과 성기사의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신성력과 마기가 부딪칠 때마다 뿜어지는 충격파로 대기가 떨렸고, 그때마다 고통의 함성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정신 없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길을 잃은 것처럼 서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