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그 과정에서 그녀가 날 발견한다 해도.’
일단 힘이 전달되면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으로 심장에 있던 기운을 끌어모았다.
거대한 빛, 신성력의 파도가 지팡이에서 쏟아져 그녀에게 곧장 날아갔다. 예민한 에레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신성력을 발견하고 어렵지 않게 비켜났다.
“이런 허접한 실력으론…….”
비웃으며 공격한 이를 찾던 그녀는 곧 자신이 피한 신성력이 무언가에 부딪쳐 커다란 소음을 내자 깜짝 놀랐다.
“……설마 이게 목적이었나?”
힘은 정면으로 마기에 꽂혔다. 마기는 흐름이 망가져서 부서지고 깨지기 시작했다. 에레나는 빠져나가는 마기를 보면서 서둘러 자신의 힘을 쏟아냈다. 검은 기운이 두 팔에서 거대한 물줄기처럼 쏟아지자 마물과 마족, 기사들이 모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 주변으로 생성된 검은 회오리가 사라지자 에레나의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큰일 날 뻔했군.”
그녀는 팔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에레나 님, 괜찮으십니까?”
마족 하나가 얼른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와 물었다. 에레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내 쪽을 응시했다. 나는 도망가려 했으나 무언의 강한 힘에 끌려서 순식간에 그녀 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크읏-!”
“누가 이런 깜찍한 짓을 했나 했더니.”
에레나는 자신의 힘에 사로잡혀 공중에 떠 있는 나를 보며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너일 줄이야.”
에레나는 몸을 약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흥분한 듯 분노한 그녀를 보면서 나는 지팡이를 슬며시 들었다. 비록 잡혀 있을망정 최후까지 저항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신성력을 모아 그녀의 턱을 강타하자 마족이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의 채찍을 꺼내 들었다.
“이 하찮은 사제 따위가!”
철썩!
“큿!”
팔에 불이 나는 것 같다. 마기로 덮인 채찍은 마치 피부가 불에 산 채로 지져지는 느낌을 주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살갗이 마기에 부식되어 가는 느낌이 고통스럽다. 마족은 고통에 신음하는 나를 보며 히죽 웃고는 에레나에게 물었다.
“산 채로 찢어 버리고 도시 정문에 시체를 매달까요?”
“아니.”
에레나는 빨개진 자신의 턱을 매만지고는 대답했다. 그녀는 잔인한 눈빛이었다.
“그건 내 몫이야.”
“흐윽……!”
다가온 그녀가 내 목을 살며시 쥐었다. 기사단장이 쥐었던 자국 그대로 나를 쥐어 누르면서 에레나는 속삭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살기가 번쩍이고 있었다.
“왕께서 언제까지 널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끄윽, 읏……!”
“이렇게 가늘고 연약한 목인데.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져 버리겠지. 미인이라 칭해지는 고운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서 말이야.”
에레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있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내가 못내 만족스러운 듯, 킥킥 웃듯이 말한 그녀는 손가락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마기가 파고들었다. 나는 고통스러움에 헐떡였다. 에레나는 핏기 사라진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널 죽이는 게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되겠지만 당장은 죽이지 않겠다. 망가지고 황폐해지는 인간 세상을 목격할 사제가 한 명은 있어야 할 테니까.”
에레나의 목소리는 선율처럼 부드러웠다. 얼핏 들으면 축복하는 것처럼 들려왔으나 그게 독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에레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어. 내 참을성이 늘 지금과 같지 않을 테니까.”
에레나는 그대로 나를 바닥에 놓아 버렸다.
쿵. 차가운 땅에 머리를 부딪치자 정신이 혼미해져 온다. 화끈거리는 목과 어깨가 그나마 내 정신을 현실에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희미하게 떴다. 에레나가 수하에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면서.
“도시의 모든 인간들을 고문해서라도 잡혀 있는 녀석을 찾아와.”
“알겠습니다. 허면 그녀는.”
마족은 살아 있는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살려 두실 겁니까?”
“지금 죽이면 안 돼. 이 상황에선 살려 두는 게 좋아. 왕께서 개입하시면 곤란하니까.”
“왕께서요……?”
그제야 마족은 내가 특별하다는 것을 눈치챈 얼굴이었다. 그는 나와 에레나를 번갈아 보고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서, 서, 설마 그녀가 손대지 말라고 하셨던 소환사인 겁니까?”
“확신했으면서 왜 다시 묻는 거야?”
에레나가 신경질적으로 답변했다. 그녀의 기분을 거슬렀다고 생각했는지 마족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말 맞는지 싶어서요. 하, 하필 이곳에 저 소환사가 나타났다니……. 일을 그르칠까 걱정입니다.”
“그런 건 염려하지 마. 인간들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그리고,”
에레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타적이지도 않지. 늘 자신 입장만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로울 대로만 행동하니까.”
“…….”
왠지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녀가 나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사제이면서 욕망에 취해 마왕과 정사를 나누고, 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이기적인 나라는 인간을 꼬집는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막막함이 나를 감쌌을 때 그녀가 보란 듯이 기사단장을 가리켰다.
“저걸 봐. 벌써 살려고 다른 기사들을 도륙하고 있잖아. 방금까지 같이 싸운 전사들이 이제는 자신을 막아서는 귀찮은 적이라는 거야. 손바닥 뒤집듯이 변한 그에게 어디 이타적이고 신실한 기사의 정도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녀가 비아냥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외양을 변화시켰을 뿐, 인간의 본성까지 변화시키진 못했어. 식욕을 약간 부추겼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파괴욕까지 키우진 못했지. 마물을 통한 우리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궁극적인 목적, 인간을 스스로 파멸시킨다는 목적은 이루어 냈지. 저 인간을 보건대 인간들이 서로 자멸할 거란 것은 명확하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달려드는 기사들을 갈퀴 같은 팔로 찢어 버리는 괴생명체가 있었다. 거대한 괴생명체는 어떤 마물이나 마족보다 잔인하게 기사들을 죽였고, 도망치는 기사들을 쫓아가 숨통을 끊어 놓기까지 했다.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그 모습은 기사단장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왠지 공포가 밀려왔다. 기사단장이 완전히 괴물이 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대로 몸만 변화한 것이라면 저 태도는 원래 그가 갖고 있던 것이란 말인가? 잔혹하게 동족을 도륙할 수 있는 인간.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왠지 오싹해지고 말았다.
에레나는 몸을 떠는 나를 발견하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 거야. 원래부터 자신만 생각하는 욕망 덩어리지.”
“…….”
“대의고 선의고 그런 건 가식적인 명분일 뿐이지. 늘 속에는 자신이 우선이고 제 욕망이 제일 중요하니까.”
괴생명체로 변한 기사단장에게 당해 비명을 지르는 기사들이 늘어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레나는 조용히 떠 있는 다른 마족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다른 도시로 가서 소란을 일으켜. 우리가 모든 도시 인간들을 변화시키기 전에 다른 사제들이 도착하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마족들이 뿔뿔이 날아서 흩어졌다. 에레나는 그들이 모두 떠나가자 유쾌한 발걸음을 내 쪽으로 돌렸다.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마왕.”
멍해진 내 머릿속엔 지금 상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켜 줄 인물이 떠올랐다.
“마왕을 부르겠어…….”
그가 나타난다면, 적어도 이런 내 꼴을 본다면 에레나에게 어떤 타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선하고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늘 나만 생각하는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무찌를 수 있다면 기꺼이 마왕을 부르겠다는 각오로 그의 현신을 바랐으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영리한 에레나는 나의 의도를 알아채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그분을 소환하려고 했던 거야?”
에레나는 안쓰러운 척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불가능해. 내 마기가 강해서 웬만한 소환은 막아 버리거든. 물론 네가 크게 다치거나 죽거나 하면 마왕께서 무언가를 느끼고 나타나시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잖아?”
에레나는 나의 목을 쓸었다. 고의적인 그 손길에 따끔거리는 고통이 강해져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널 건드리지 말라는 그분의 명령, 비참하지만 지킬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결국 그분도 마계의 일원이란 말이야. 결정적인 순간엔 내 편을 드실 거야. 네가 아닌 동족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실 테니까.”
“흐읏…….”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절망하도록 해. 그게 널 살려 두는 유일한 이유니까.”
에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내 팔에 엉킨 마기를 가져갔다. 마기가 사라지자 숨이 탁 트이며 머릿속이 맑아졌으나 반대로 에레나는 내게서 멀어졌다.
“그럼 실험을 완성하러 가 볼까.”
……안 돼.
나는 그녀가 마기 뭉친 것을 잡으며 높이 날아오르자 팔을 뻗었다. 지팡이는 언제 떨어졌는지 손에 없었다. 최소한 그녀가 날아가는 것을 막고자 신성력을 끌어모았으나 마기의 영향인지 신성력은 잘 모이지 않았고 그나마 모인 것도 곧 부실한 모래성처럼 부서져 갔다.
“……아.”
정신이 아찔하다. 억지로 신성력을 끌어 쓴 탓인지 금세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팔을 뻗었지만 곧 오래지 않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