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26화 (126/220)

126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작은 샛길로 이어지는 곳으로 진액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길이 주택가로 들어서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꺼내며 청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요.”

“싫어요. 아무리 반대해도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나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방해된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가 샛길로 쑥 들어가 버렸다.

“마물을 찾아내고 말 거예요! 찾아내서 관청에 신고하면 포상금을 받을 테니까!”

그게 본 목적이었나. 나는 목숨을 던지는 그의 무모한 행태에 혀를 차며 빠르게 그를 뒤따랐다. 샛길은 오른쪽으로 두 번 꺾어지더니, 이내 밭을 끼고 있는 작은 벽돌집에 다다르게 했다.

“이, 이게 뭐야…….”

밭은 엉망이었다. 노란 비파가 잔뜩 열려 있었던 나무들은 모두 억지로 쥐어뜯은 것처럼 부러져 있었고, 반쯤 먹힌 비파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청년이 기가 막힌 듯 탄식했다.

“어떤 자식이 팔아야 할 비파를 모두 따 먹었어? 이런 놈들은 잡아서 당장 벌을 받아야 해요!”

화가 나서 외치는 그가 어이없었다. 도시 곳곳에서 사기를 치던 자가 누구였던가. 그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비파를 살폈다. 누군가 비파를 따서 허겁지겁 주워 먹은 것처럼 보였다. 떨어진 비파에 진액이 묻어 있는 것을 유심히 보던 나는 진액이 굳지 않고 흘러내리자 멈칫해서 외쳤다.

“조심해요, 아직 근처에…….”

……있는 거 같으니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돌집 옆면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서 휙 그림자 하나가 휙 움직였다.

“악!”

그것은 빠른 속도로 청년을 덮쳤다. 청년은 제 몸에 얹어진 정체불명의 것에 기겁하며 두 팔을 사납게 흔들었다.

“모, 목이! 사, 살려 줘……!”

그것이 목을 꽉 조여 숨을 쉴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나는 신성력을 뿜어냈다. 작은 원반 형태를 만들어 연달아 공격하자 그것이 괴성을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이 사람의 형태란 것을.

‘마물……이 아니잖아?’

왜냐하면 사람과 똑같은 팔다리, 몸통, 그리고 머리칼과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동자의 동공이 커져서 벌레의 눈처럼 보였는데, 그 안에 보이는 감정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과 같아서 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 커헉! 이, 이 새끼가……!”

내가 머뭇거렸을 때, 청년이 달라붙은 것을 떼어낼 심산으로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흙과 돌에 짓눌린 그것이 비명을 질렀고, 청년은 으하하, 웃으며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그것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 끔찍한 마물! 사악한 괴물! 죽어 버려!”

퍽, 퍽, 소리가 잔인하게 이어졌다. 폭력은 가차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를 죽이려는 의도를 넘어서 어떤 사악한 집단을 멸절하려는 광신도의 의식 같았다. 살점이 으깨지는 소리에 가슴도 철렁 아래로 떨어질 때, 인영이 마지막 힘을 낸 것처럼 청년을 향해서 침을 뱉었고, 청년은 두 눈을 손으로 감싸면서 떨어졌다.

“아아악-!”

그냥 침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나 내 신성력은 인영에게 흡수되듯이 사라지고, 인영은 그런 나를 비웃듯, 괴로워하는 청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때렸던 돌을 주워서 청년을 가격하자 높다란 비명이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인영을 몸으로 세게 밀었고, 청년에게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휙.

인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거죽이 흘러내린 듯한 괴이한 몰골. 온몸에 난 터지고 뭉그러진 수포. 덕지덕지 진물이 흐르는 그를 왜 경비병이 마물이라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치미는 공포심에 침을 꿀꺽 삼켰다.

끔찍한 얼굴 안의 커다란 동공에서 감정이 번쩍인다. 두려움을 넘어선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어떤 특정한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무심코 생각했다.

“……주, 죽고…….”

“뭐?”

“……주, 죽고 싶지 않아……!”

“!”

“나, 난…… 죽고 싶지 않다고!”

그것은 살아남겠다는 감정, 살고 싶다는 처절한 의지였다. 인간의 목소리로 살고자 외치는 그의 비명에 나는 완전히 굳어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마물도 인간도 아닌 저것은 대체…….

놀람과 경악으로 얼어붙었을 때 괴성을 지르며 인영이 달려들었다. 그가 내 머리를 쪼갤 것처럼 돌을 위로 번쩍 치켜드는 순간, 나는 지팡이를 얼떨결에 앞으로 세웠고, 거기서 빛을 뿜어냈다.

파앗,

“……크헛……!”

인영은 눈이 아프다는 듯이 뒹굴었다. 바로 앞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기 때문일까.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지팡이로 그의 뒤통수를 때리려 했다. 기절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화를 부추기기만 했는지 인영이 진물 같은 침을 흘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팟.

그것이 내게 달려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눈꺼풀을 환하게 만드는 빛을 목격했다.

“……아론.”

잘못 보았나 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감았다가 떠도, 평복을 입은 채 검을 휘두른 자는 아론이 맞았다. 아론은 나를 보았고, 곧 내게 다가왔다.

“늦지 않았군요.”

“어, 어떻게.”

본대에서 싸우고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이런 곳에 있다니. 아론은 질문을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일까지 휴가를 냈습니다.”

“자, 작전은?”

“오기 전까지 싸우다 왔어요. 제 할 일은 모두 완수했고, 이후는 수도에서 온 나이트가 맡아서 할 겁니다.”

“나이트? 본대에 나이트가 와 있다고?”

“네. 에스더 경이라고, 한 명이 와 있습니다.”

황제가 직접 뽑은 정예병.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기사 하나가 왜 작은 본대에 와 있는 걸까.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제가 부탁드렸거든요. 휴가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제 자리를 맡아 이끌어 달라고.”

“네가 부탁했다고? 아는 사이야?”

“조금은요. 예전에 수도에 있을 때 대련을 하며 친해졌습니다. 소탕 작전에서 몇 번 도움을 준 적 있는데, 그래서인지 제 요청을 선뜻 받아 주더군요.”

“지, 지금, 아론. 휴가를 가려고 수도의 나이트를 불렀다는 말이야?”

아론은 뭐가 이상하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신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다행히 청년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상처가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신성력으로 어루만져 주고 고개를 들었다. 아론이 인영을 세심하게 보고 있었다.

“기이하군요. 생김새는 인간인데, 몸을 덮은 피부는 마물의 거죽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신성력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

아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공격할 때 확인했습니다. 물리력은 먹히지만 신성력은 안 먹히더군요. 마물이나 마족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론은 그의 몸에 돋은 수포와 끝없이 흘러내리는 진액, 그리고 벌어진 살점에서 피가 아닌 흑색의 거뭇한 체액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마계와 어떤 식으로든 관여가 있을 겁니다.”

“그냥 추측이야?”

“아뇨. 확신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아론의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 사악한 무리밖에 없으니까요.”

아론은 차가운 눈으로 꿈틀거리는 인영을 응시했다. 마계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분위기가 유독 서늘해진 것 같다면 착각일까? 나는 왠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죠?”

때마침 벽 너머로 소란을 듣고 벽돌집의 주인 내외가 경비병과 함께 도착했다. 아론은 그제야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그들에게 간략한 설명을 했다. 사제단이 도착하자, 아론은 제 신분증을 보이면서 말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론을 알아보고 거듭 공손한 인사를 반복했다. 그들은 아론에게 숙소를 잡아 주겠다고 열렬히 말했지만 아론은 휴가를 나온 것이라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제발 호의를 베풀고 싶다는 처절한 애원에 아론은 내 손을 잡는 것으로 소란을 종식시켰다.

“……아, 그러시군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들은 쑥스럽다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은근히 주시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그런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영을 사제단에 인계하고, 청년을 치료소에 보낸 뒤 건물을 나왔다.

“왜요?”

나는 아론이 잡은 손을 쳐다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제 마음을 숨기겠노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아론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붙잡고 방금 전 일을 빌미로 친분을 쌓으려 시간을 빼앗았을 겁니다.”

“나와? 아론과 친분을 쌓으려고 했겠지. 귀찮아지는 건 아론뿐이었을 거야.”

아론이 어떤 배경인지, 지위를 가진 사제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론은 뛰어난 미남에 훤칠한 몸매를 지닌 청년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자 바랄 만도 하니까. 내 말에 아론은 덤덤하게 말했다.

“전 말레드레드와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왜 모를까. 그걸 위해서 그 유명한 나이트까지 부른 아론이었다. 나는 아론이 신분이나 지위에 관심이 없는 기사인지, 아니면 자신의 지위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지략가인지 헷갈렸다. 아론은 저 멀리 도시의 중앙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관으로 갈 거죠?”

“어딘지 알아?”

아론은 웃었다.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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