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7화 (87/220)

87.

아론은 곧장 치료 사제의 천막으로 말을 몰았다. 말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달렸다. 달리는 속도도 빠른데 승마감이 지나치게 좋아서 예사롭지 않은 말이라는 것이 금방 느껴졌다.

아론이 황성에서 빠른 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이 말이 그 말일까.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론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멈췄다.

“마족의 마기에 팔이 직접 찔렸어요. 몸에 상처도 났고요.”

아론은 나를 다시 안아 내리면서 다가온 치료 사제에게 말했다. 사제는 그 유명한 아론나이드가 나를 데리고 와, 직접 아픈 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란 눈초리였다.

“아, 네에. 그렇군요.”

“치료가 필요합니다. 충분한 신성력이 신속히 뿜어져야 해요.”

아론의 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요청에 사제는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치료에 들어갈게요.”

그녀는 근처의 나무 침대에 나를 눕히도록 했다. 내 상처를 살피는 그녀는 아론을 의식해서인지 한껏 긴장한 얼굴이었는데, 곧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데요? 마족의 마기에 당했다면 더 부패해야 정상인데…….”

그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아론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보자마자 치료를 했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할 듯싶어서요.”

“아, 그렇군요! 그 덕에 금세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사제는 손에서 은빛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내일 아침에는 작전에 복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론은 그 말에 다행이라며 진심으로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제는 왠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나와 아론을 힐끗거렸다. 나에 대한 아론의 태도가 남다르게 느껴진 것일까. 하긴, 치료를 하는 중에도 떠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확실히 나와 그가 무언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제는 굳이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마기에 다친 소환사들을 많이 보는데, 이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상처가 괜찮은 정도로 회복되자, 몸은 나른함에 빠져들었다. 치료의 빛이 몸의 자생력과 회복력을 높이면서, 반대로 육체 자체는 피곤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끔벅끔벅 눈을 느리게 떴다. 마기가 배어 있던 팔은 그녀의 특수한 힘에 제 피부색을 찾아가고 있었고 고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희미해졌다. 아직도 팔뚝에는 거뭇하고 징그러운 무늬가 남아 있었지만, 아주 조금에 불과해 꾸준히 치료하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렇듯 전투에서 입은 육체적인 피해는 모두 치료될 터였지만, 내 머릿속은 잠재울 수 없는 한 줄기의 거슬림에 불안하게 깨어 있었다. 아까 마족이 던진 이상한 말. 아론은 과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아론을 쳐다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금빛 눈이 나를 따라왔다.

“저어, 근데.”

사제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론을 향해 곤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상처도 치료해야 해서요. 나가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아론은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깊고 짙었다.

“그럼 다 회복하고서 뵙겠습니다.”

정중한 아론, 상냥한 아론, 다정한 아론……. 그것을 모두 품은 황금색 눈동자엔 의문이 있어 보였지만, 아론은 떠나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막의 입구에는 성기사 한 무리가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반갑고 환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의 등장을 찬양하는 칭찬들이었다.

그 무리에는 레베카도 있었다. 그녀는 내 쪽을 한 번 새침하게 바라보고는 보란 듯이 아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보란 듯이 아름답고 발랄하게 웃으면서. 나는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론이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 유치함이 통했다고 느끼고 말았다. 왠지 심장이 무엇엔가찔린 것처럼 가슴이 지끈거려 온 것이다.

“괜찮아요?”

사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안도하며 내 옷을 벗기고 마저 상처를 치료했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반복되듯이 눈앞에서 번쩍이는 흰빛에 내가 몇 번 졸았던 것을 제외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사제는 내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것을 보며 경고했다.

“마기로 입은 상처는 한 번에 완벽하게 치료되지 않아요. 일주일간은 우리 천막에 와서 계속 신성력을 쏘이세요.”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다행히 초기 치료로 빨리 회복되겠지만, 한동안은 마기를 조심하세요. 같은 곳을 다시 공격당하면 더 빨리 부패가 진행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하고 나왔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공 마물이 죽어서 가루처럼 번진 탓에 정화할 땅이 너무 넓다는 게 문제였다. 소환사들이 지친 기색으로 지팡이에 간신히 빛을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픈 상태에다 지팡이가 망가져서 그들을 돕기에는 곤란했다. 도와주려니 몸이 여의치 않고, 그렇다고 숙소로 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저 멀리 서 있던 카란이 나를 발견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카란의 나무 지팡이가 땅에 닿을 때마다 밑에 끼워 넣은 쇠 발굽이 탕탕 울렸다. 마물 사체가 튀지 않도록 특별히 장착한 것이다. 나는 그가 밤늦게까지 정화 작업을 지시하는 감독관으로 발탁된 것을 눈치챘다.

“자네, 몸은 괜찮나?”

“나을 겁니다.”

내 담백한 대꾸에 그는 ‘다행이군’ 하고 역시 짧게 반응했다. 카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어두운 시선은 소환사들이 정화 작업을 하는 쪽에 꽂혀 있었다.

“이번 공격은 참 이상해.”

카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제를 해치려는 것도 아니고, 주민들을 공격한 것도 아니니까. 그저 뒤처리 작업만 잔뜩 하게 만들었지.”

“…….”

“설마 우리가 얼마나 청소를 잘하는 종족인지 보려는 것인가?”

기막히다는 듯이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어딘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마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은 인간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고 했어요.”

“뭐?”

“마족이 절 공격하면서, 오늘은 인간을 죽이러 온 게 아니지만 저를 공격한다는 말을 했다고요.”

“그래? 그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저런 마물과 왔다는 것이 명백한데.”

카란은 심각해진 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지휘관들과 따로 논의를 해 봐야 할 일이군. 중앙에도 연락해 봐야겠지.”

카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보고 잘했네. 자네는 피곤할 테니 어서 숙소로 들어가서 쉬도록 해. 오늘 자네 몫의 전투는 훌륭하게 해냈으니까.”

나는 그제야 돌아갈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인사하고 숙소로 돌아오자, 어느새 밤은 이슥해져 있었다. 아론이 올 거라는 생각에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했다. 잠든 순간에 마계로 끌려간다면 곤란해질 거라는 생각에 깨어 있으려고 했으나, 수면욕이란 생각보다 굉장히 강력한 것이다.

잠이 잘 오지 않는 차를 마셨지만 끝내 두 눈이 감겼고, 그 순간 나를 확 감싸며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고 말았다.

***

“쿨럭…….”

몸이 편치 않을 때 억지로 마계에 끌려온 나는 거친 기침을 내뱉고야 말았다. 속이 불편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 마기에 공격당하고 신성력에 한참을 나른해져 있었다. 고통과 편안함, 양극단을 거친 육체는 피로하다 못해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시야에 마왕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발 마음대로 부르지 말라고, 내게도 못 갈 상황이라는 게 있다고,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냐고 쏘아붙이려고 했던 나는 서너 걸음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마왕이었다.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미동도 없이 있었다.

‘설마 죽은 건가?’

정적에 휩싸여 있는 마계의 왕이란 살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섬뜩한 면모가 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에 손을 꽉 쥐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숨결을 확인해야 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공포인지, 절망인지, 아니면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의 코 앞쪽에 손을 대려는 순간, 내 팔을 확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죽지 않았다.”

마왕은 핏빛처럼 선명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저 부족한 힘을 채우고 있었을 뿐.”

서서히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는 남자는 어느새 거대한 벽처럼 크게 느껴졌다. 검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여느 때처럼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어딘가가 크게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부족한 힘이요? 절 소환했기 때문에요?”

“힘의 부족은 그대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야.”

마왕은 주제를 돌리는 것 같더니 눈을 빛내며 나를 확 끌어당겼다.

“물론 그대가 내게 종속되기로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아, 아파요.”

나는 얼른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가늘게 눈을 떠 나를 쳐다보더니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벗어나서 그가 쥐었던 손목을 매만졌다. 그가 멍이 들 정도로 쥔 것도 아닌데, 그에게 종속 제의를 받은 상태라서 그런지 흔적이 남을 것만 같았다…….

괜한 불안으로 손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말했다.

“우리 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모양이군.”

마왕은 내 몸을 훑어보며 입가를 올렸다.

“그대의 몸에서 불쾌한 신성력이 느껴져.”

마왕은 순식간에 나와 몸을 겹쳤다.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넣으면서, 내 몸을 열듯 깊숙이 들어온 사내는 공포에 얼어 버린 내 눈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불쾌한 마기도 느껴지지.”

“……!”

내가 멈칫했을 때 마왕의 손이 뻗어 왔다. 그의 손에는 순수한 어둠으로 정제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마기가 내 팔에 닿았고, 그것은 마족이 공격했던 부위를 쓸면서 내 손끝까지 이동했다.

신기하게도 마기가 내 팔을 훑어가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자국이 없어졌고, 살결 위로 거뭇한 마기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왕은 사라진 마기를 보면서 눈을 예리하게 떴다.

“에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수하의 것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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