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마왕은 보자마자 누구의 것인지 한눈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 눈빛이 매서워졌다.
“경고를 했는데도 이러다니. 수하가 멍청한 것인지 그 주인이 멍청한 것인지 모르겠군.”
마왕은 이내 입을 벌린 채로 멍하게 굳어 있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올리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 불쾌한 마기의 주인이 그대를 죽이려 했나?”
“그게…….”
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마왕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그대를 괴롭혔나?”
“아, 처, 처음에는요. 나중엔 공격하려다가 멈췄지만요.”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잘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던 이유는 그가 마기를 불쾌하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마왕이 마기를 불쾌하다고 표현하다니. 설사 자신의 것이 아닌 수하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기는 그의 속성이자 본질이었다. 그런 마기를, 나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불쾌하다고 칭하다니.
나는 진정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마족이 나를 공격하려다 죽은 시점에서 보건대, 마왕이 나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건 내가 그 마족으로 인해 죽을 일이 없다는 말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가 마왕을 떠나기 어렵다는 방증이 되었다.
마기를 품은 제 수하보다 정사를 함께하는 내가 더 귀하다는데, 어찌 그런 나를 순순히 놓아주겠는가. 지금도 나를 살피며 내 기운과 몸이 온전한지를 파악하는 남자였다. 나는 괜히 그 모습에서 이상한 거부감을 느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죽었어요. 사제들에게 잡혀…….”
“그래?”
마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기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네?”
“인간계에 말이야. 아직 숨이 붙어 있을 거야.”
마왕은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거의 죽어 가는 중이지만. 내 권능으로도 불러들일 수 없을 만큼 강한 신성력에 휩싸여 있거든.”
한 손에 마기를 집중시켜 그의 기운을 찾은 마왕이 이내 나를 보며 물었다.
“몰랐나 보지? 마족이 살아 있다는 걸.”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세계를 공격해 왔으니까 당연하게…….”
“그대는 순진한 구석이 있어. 인간이 우리보다 덜 잔인하고 더 자비롭게 적을 상대할 거라고 말이야.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마왕은 웃듯이 붉은 눈을 휘었다. 이종족만의 소름 끼치는 냉기가 꿰뚫어 보는 심안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마왕은 음산하고도 저주스럽게 말했다.
“때때로 인간들이 더 잔혹하고 사악하게 적을 상대하지. 사지를 자르고, 끓는 물을 부어 같은 인간을 끔찍한 고통에 이르게 하는 형벌이 국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
“어디 그뿐인가. 삶이 죽음보다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우리 종족을 죽이지 않고 몇 년을 괴롭히지. 내가 보고받은 일 중엔, 인간들이 마족을 잡아놓고 백 년을 고문해 전신을 너덜거리게 만든 경우가 제법 있어. 어떻게 이렇게 죽일 수 있을까,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말이야.”
마왕은 움찔한 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놀랐나? 하긴. 그대는 순진한 데가 있지. 잠자리에선 욕망에 솔직하고 음습한 데 비해, 전투에선 담백하고 정직하게 싸운단 말이야. 교본에 나오는 성실하고 순백한 사제들처럼.”
“…….”
“내 말이 틀렸나?”
마왕은 나를 완전히 간파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나의 한 면을 상대했을 뿐이다. 그것이 나에 대해 틀린 면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 전부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훈련에 성실했지만 때때로 나태했고, 공격 성향이 담백한 편이었지만 신성력 변형이 심한 편이었다. 그리고 정직하게 싸우기보단 요행처럼 이기도록 머리를 굴렸다. 성격도 정직하다기보다 카란의 말처럼 까칠한 성향이 다분했다. 한 마디로 책에 나오는 성실한 사제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그냥 모순적인 인간일 뿐이지.’
나는 속이 쓰려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스산해져 있었다. 모순적인 존재,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지가 오래인데, 갑자기 드는 이 허탈한 마음은 무엇일까. 너란 존재는 다른 사제들,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마왕 때문일까? 나만은 순백하며 정직하다고 말하는 그 때문에?
나는 거부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 마왕이 나를 순진한 인간으로, 타락한 인간들과 이분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으로, 나는 오히려 타락한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사제 중에서는 가장 신실하지 못한 사제였다.
따라서 나는 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에게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 전혀 성실하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죠, 싸우는 것도 욕망하는 것도 전부.”
나는 내 턱을 잡고 있는 마왕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은 단단했고 매끈했다. 뜨거우면서도 차갑게 느껴졌고,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했다. 복잡한 감정을 가져오는 그의 손은 그를 향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좋지만 싫기도 해.’
나는 그런 심정으로 잡은 그의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순백하지 않지만, 또 그게 어때서요? 인간들이 마족보다 잔인하고 잔혹하면 어때서요? 그들이 왜 그런지 생각해 봤어요? 마족들이 노인과 아이, 전사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죽이기 때문이에요.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망가뜨리기 때문이라고요.”
마왕은 강한 어조로 말하며 물러나지 않는 나를 바라봤다.
“궁지에 몰리면 약한 동물도 이빨을 악물어요. 나약한 생명도 광분해서 달려들고요. 하물며 우리는, 대지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더한 복수와 보복을 꿈꾸며 마족에게 대항하려 들겠죠.”
내 말이 끝나자 약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마왕은 나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깜빡했군. 그대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어딘가 웃는 어조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마왕은 진정하라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나를 놀라게 해. 내게 끌려오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헷갈리지 않지. 늘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고수한 채로 세상을 보듯, 앞을 보고 있단 말이야.”
마왕은 낮지만 강한 어조로 강조했다.
“그래서 그대의 말을 신뢰하게 돼. 나는 인간을 딱히 믿지 않지만, 그대만은 믿어. 그대가 허투루 말하는 자가 아님을 아니까.”
“으읏.”
나는 마왕이 내 양 손목을 쥐어 오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마왕의 단단한 허벅지가 여전히 내 다리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은밀하게 내 민감한 부위가 자극될 수 있도록 허벅지를 위로 올렸다. 야릇하게 비비면서, 그는 내 양 손목을 살짝 아플 만큼 세게 움켜쥐었다.
“건방져도, 도도해도, 좋아. 설마 교만하게 내게 설교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대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 되었으니까.”
마왕은 이내 고개를 숙여 내 뺨에 혀를 갖다 대었다.
“흣……!”
긴 혀가 내 뺨을 핥으며 내려가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껏 올라온 그의 허벅지는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움찔 놀란 나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알겠나? 내가 그대를 원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게 영혼을 바친다고 해. 내가 그대가 돌아가는 것을 막고자 죽이는 일이 없도록.”
“그런, 흣!”
나는 절망해서 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강하게 무릎을 비틀어 올려 내 음부를 파고들어 오는 것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오싹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이 꼬리뼈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가운데, 나는 목을 뒤로 젖힌 채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마왕은 그 모습을 보기 좋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이미 몸은 내게 익숙해져서 아래를 비빈 것만으로도 전율하잖아. 망설일 게 뭐가 있지? 어차피 그대는 귀족의 지위도 얻기 애매한 신분에, 전사로서도 명성을 떨치기 불안정한 실력이야. 그대의 인생을 바꾸는 귀중한 기회는 나밖에 줄 수 없는데,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 거야.”
“나, 나는…….”
딱딱 부딪치는 치아 사이에서 간신히 말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천 갈래로 찢어져 그 사이로 쾌락과 수치심의 흙탕물이 사납게 흘러내리는 가운데, 나는 한 가닥의 문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를, 나라고 정의해 줄 수 있는 명철한 단어를.
“시, 신의 아래에서, 흐읏…….”
“지겹지 않은가? 누군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그대를 멋대로 판단하며 신분으로 깔아뭉개려는 광경이? 그 모든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나를 선택하면 된다.”
마왕의 목소리는 교묘한 울림이 있었고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마족이 인간을 유혹해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네들 종족에 신비로운 매혹의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마왕은 마족의 왕이었으니 누구보다 그 매혹의 힘이 셀 터였다.
나는 그야말로 그에게 넘어갈 듯한 아찔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황홀한 얼굴뿐이었고, 내 몸에 느껴지는 것은 그의 매력적인 육체와 살결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빨려 들어가듯 헐떡이고 있었다.
마왕은 더욱 가깝게 나를 끌어안고, 내 가장 예민한 살결을 자극하면서 말했다.
“어서 말해. 나를 원한다고, 그래서 영원히 내게 종속된다고.”
“아…….”
머릿속이 새하얗다. 어떤 것도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텅 비어 버린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이계의 왕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할 것처럼 입술을 옴짝거렸다.
“나, 난…… 당신을…….”
내 입술이 두어 마디를 토해 냈을 때, 갑자기 내 팔목을 쥐고 있던 힘이 느슨해졌다. 마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매혹의 기세가 약해진 것도 그때였다.
“……이런, 그대의 세계에 방해꾼이 끼어든 모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