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6화 (86/220)

86.

마족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크게 당황하여 내 쪽을 보았다.

뱀처럼 길게 찢어진 눈이었다.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마족 특유의 섬뜩함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을 때, 마족은 뒤쪽에서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의 기세는 험악했다. 그런 그들을 무감정하게 재단하는 눈으로 쳐다본 그는 다시 비릿한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의 손에는 들쭉날쭉 사납게 피어난 마기가 있었다. 그는 그걸로 내 신성력 밧줄을 아무렇지 않게 끊어 냈다.

“성기사도 아닌 소환사 따위가 나를 막다니, 제법인데.”

마족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나를 놀라게 한 인간에겐 상을 줘야겠지.”

그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죽음으로써!”

그의 마기가 창검의 형태로 변했다. 내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을 때, 마족이 손을 높게 올렸다. 그러자 창검으로 변한 검은 마기가 앞뒤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성기사들은 기겁해서 대검을 앞으로 세워 신성력을 뿜어냈고, 나는 기사들처럼 맞설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근처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피했다.

쾅!

마기가 부딪치자 나는 절로 바위에서 튕겨 나와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가 부딪칠 만큼 턱이 떨리고 있었다.

“우윽…….”

잇새로 신음이 빠져나왔다. 나는 간신히 주먹을 쥐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올라왔으나,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을 때는 마족의 두 번째 공격이 당도해 있었다. 마기로 만든 창검이 내리꽂히려는 찰나 나는 간신히 몸을 굴렸고, 내가 있던 땅으로 파바박, 마기가 박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공격이 계속 이어지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내 앞에 임시적인 신성력 방패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공포와 떨림에 집중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눈앞에는 불안정한 흰빛만 번들거렸다. 금세 날아온 창 형태의 마기가 그것을 관통한 순간, 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흣…….”

손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마기가 제대로 관통한 지팡이는 꺼멓게 타서 반으로 쪼개졌고, 마기가 찌른 오른팔은 검은 넝쿨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징그러운 자국이 남았다. 나는 살점을 부패시켜 가는 마기의 성질에 이를 악물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시야 앞으로 누군가 바짝 다가왔다.

“고통스럽나? 예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는데.”

마족은 히죽히죽 웃으며 기분 나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때 더 아름답단 말이야. 너도 분명 그럴 것 같아.”

거만하고 잔혹한 마족 아니랄까 봐, 그는 역시나 죽일 먹잇감 앞에서 떠들기 좋아했다.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아 멀쩡한 손에 신성력을 집중시켰다. 뒤쪽으로 성기사들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러면 돼…….

“오늘은 인간을 죽이려고 온 게 아니지만.”

마족은 음산하게 말했다. 손에 맺힌 마기는 마치 철퇴처럼 모양이 바뀐 상태였다.

“한 명 정도는 상관없겠지. 내게 덤빈 대가를 치르게 해 준다는 의미로.”

나는 재빨리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눈으로 신성력을 날려 보냈다. 작은 공 형태이지만 그의 성질과 정반대되는 신성한 기운은 그를 움찔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악, 이것이……!”

방심했던 마족은 내게 공격을 당하자 더욱 분노했다. 그러나 반응할 틈도 없이 뒤쪽에서 성기사들의 신성력 공격이 이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성기사들에게서 강한 신성력이 연달아 뿜어지자 마족은 등에 충격을 받고 몸이 앞으로 휠 만큼 크게 휘청거렸다.

“크아악, 귀찮은 인간들!”

마족은 격분해서 마기가 가득한 바람을 일으켜 그들에게 날려 버렸다. 험악한 마기 바람이 몰아치자 성기사들은 대검을 든 채로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마족은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살의가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 피가 가득 고이는 걸 끝까지 지켜봐 주지. 네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에도 핏덩어리가 굳어 생기가 사라지는걸…….”

불쾌하고 잔혹한 말을 쏟아 내던 마족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는 내 눈과 머리, 외모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놀란 눈을 했다.

“설마 넌…….”

마족이 중얼거렸다.

“에레나 님께서 말씀하신, 그 건드리지 말라는 인간 소환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그와 내 사이를 갈라놓았다.

“끄아아!”

마족은 발광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신성력이 고도의 밀도로 뭉쳐진 공격은 닿기만 해도 마족의 피부를 완전히 뭉개 놓는지, 마족은 벌겋게 변한 피부를 쥔 채로 계속해서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크악!”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성력이었다. 마족은 얼른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마기를 피워 냈으나, 말을 타고 돌진해 오는 성기사의 대검에 부딪혀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과연 아론나이드!”

성기사들이 그의 이름을 감격해서 외쳤다. 나는 그제야 하얀 말 위에 올라앉은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대검을 쥔 채로 고요한 분위기에 휩싸인 그는 침착한 태도와 달리, 눈빛이 한없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론의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나를 향했다. 그리웠다는 물결, 너무나 보고 싶었다는 물결이 겹겹이 져서 나에게로 흐른다.

그 다정한 감정들의 물줄기 뒤로, 이내 마족을 향한 분노가 뒤따랐다. 아론의 시선은 내 팔에 머물렀다가 빠르게 마족에게 돌아갔다. 분개했다는 걸 보여 주듯 아론의 대검에서 신성력이 번쩍였다.

“자, 잠깐…….”

마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론의 대검이 움직였다.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는 검날은 내 동체 시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휙휙 움직이는 소리가 날 때마다 마족의 비명이 커져 갔고, 그의 기세도 꺾여 갔다.

마족이 마침내 대검의 횡포를 피해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때였다. 아론은 그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신성력을 날카롭게 뿌려 던졌는데, 그에 맞자 마족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성기사들이 떨어진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론은 그걸 보고는 바로 고삐를 잡아 내 쪽으로 말을 몰았다.

내 앞에 도착해 훌쩍 말에서 내린 아론은 서둘러 대검을 바닥에 놓고 신성력을 뿜어냈다.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에서 번져 내 팔로 흡수되자 온몸을 조이던 끔찍한 고통이 옅어진다. 거뭇한 마기의 자국도 사라져 갔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그를 보았다.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그가 보내는 감정을 읽고 있노라니 가슴이 벅차서 떨리고 만다.

아까 느꼈던 애절함과 다정함의 강물. 그 선명한 순정의 물결이 상냥한 파도처럼 더욱 거세져 나를 덮치는 중이었다. 나는 그 강물에 휩쓸려 가면서 안도했다. 살았구나, 진정으로 기뻐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도, 의무도 없는데, 아론은 내가 당한 것이 자신 탓인 것처럼 눈썹을 고통스러운 듯 찌푸렸다. 아마도 지켜 주겠다던 자신의 맹세에 스스로가 괴로워진 것일 터다. 나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정확한 순간에 왔으니까.”

내 한마디에 아론의 눈이 커졌다. 곧 진한 일렁임으로 반짝이는 눈은 아름다웠다. 에게서 신성력이 빛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휘황찬란한 외모 때문인지, 나는 그가 더욱 환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치료 사제들을 불러 줄래?”

아론이 마기로 인한 부패를 막아 준 건 맞지만, 치료까지 온전히 된 건 아니다. 지팡이를 쓰는 오른손이 다치면 곤란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마음에 말한 것인데, 아론이 도리어 무슨 소리냐는 듯이 팔을 뻗어 왔다.

나를 번쩍 안아 올린 그가 한 다음 행동은 자신이 타고 온 말에 나를 앉히는 것이었다. 아론은 그렇게 앞쪽에 나를 태운 채로 치료 사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영리한 말은 고삐를 잡기도 전에 분위기를 읽은 것처럼 발을 굴렀다.

“……너희 둘!”

그 순간, 성기사들에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마족이 나타났다. 말은 크게 앞발을 들어 올리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아론은 내가 떨어지지 않게 꽉 끌어안았다. 아론이 대검을 휘두르기 전에 마족이 재빨리 말했다.

“재미난 조합끼리 붙어 있군! 한 명은 죽여야 하는 성기사고, 한 명은 살려야 하는 소환사라니!”

“……뭐?”

아론이 멈칫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마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족은 헝클어진 몰골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모르나? 너희 둘 다 에레나 님의 주요 관심거리인데 말이야.”

아론은 에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더욱 냉정해졌고, 차가운 기세를 뿜어냈다. 마족은 아론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을 피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조만간 또 보게 될 거야. 그때엔 이 빚을 갚아 주지, 성기사.”

마족은 비릿한 미소를 띤 채로, 공중으로 더 높이 올라갔다. 원래 나왔던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려던 그였으나, 그는 차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마족은 몹시도 당황해서 자신이 연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반투명한 막이 쳐져 있었고, 그것이 소환사들이 만든 차원의 문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깨달았다.

“어느새!”

마족은 기막혀하며 소환사들을 노려보았다. 소환사들을 죽여서 다시 문을 열려고 했으나,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단장이 마족에게 신성력을 쏟아부었고, 기사들이 합세하자, 이미 기력이 쇠한 마족은 더이상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마족은 비명을 지르며 하얀 빛에 완전히 휩싸였다.

“너희들에게 다음이란 없다!”

성기사단장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이어졌다. 마족은 날카로운 대검, 눈이 부신 신성력을 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육체가 작은 어둠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아론은 천천히 고삐를 다시 쥐었다.

“불경한 것들에겐 오직 죽음뿐이야!”

성기사단장의 외침이 귀를 찔러 온다. 왜인지 가슴이 서늘해져서 나는 눈을 꼭 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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