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마왕은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한번 승낙하면 절대 번복할 수 없으니까.”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마왕은 그런 내게 유유자적하게 손을 흔들었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하게 내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 씻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이의 흔적으로 가득한 몸을 씻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아침 나팔이 들리기까지 두어 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도 정신은 날카로운 가시 무덤에 올라앉은 것처럼 불편한 상태였다. 마왕에게 영혼을 바치라는 말,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과연 알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인간으로서 신의 믿음 아래 신성력을 발휘하는 사제였다. 그런 내가 마왕에게 영혼을 바치고 그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이나 가치를 모두 저버리고 적에게 몸을 의탁해 쾌락에 의지해서만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안다. 쾌락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즐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감정을 충만하게 채우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목매는 삶을 살 순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백작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말레드레드는, 수녀원으로 향하던 전날에 내 삶의 형태를 어떻게든 유지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음탕하고 난잡한 밤을 보내더라도 낮에는 정숙하고 우아한 귀족처럼 보일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누군가 위선이라고 비소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선택한 삶이며 내가 원하는 생이다. 내가 남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처럼, 남들 역시 내 삶의 방향을 멋대로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지적하더라도 억지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다운 인간이었으므로.
‘……거절해야 해.’
나는 결국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며 결론을 내렸다. 마왕에게 어떻게 거절의 말을 할 것이냐, 이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일단은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하룻밤을 꼴딱 새고 나서 이어진 훈련은 당연히 형편없었다. 신성력은 생길 듯 말 듯 손에서 빛났다가 사라졌고, 감독관의 따가운 지적이 뒤따라왔다. 지나가던 레너드가 걱정할 정도로 엉망인 솜씨였기 때문에, 나는 뭇 사제들의 비웃음까지 사고 말았다.
“마족은 소환사부터 공격한다고 하던데, 실력이 그래서 정말 걱정이겠어요.”
레베카는 상냥한 목소리로 비꼬는 말을 잘했다. 그녀는 내가 신성력을 못 쓰고 헤맬 때부터 성기사들과 함께 저쪽에서 걱정스럽다는 척을 하고 있었다. 말은 걱정이라지만, 그녀의 눈빛에 가득한 조소를 보건대 내 상태를 꽤나 고소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예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걱정돼요. 이런 저를 못된 성기사가 지켜 주지도 않고 도망갈까 봐요.”
“무,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냥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어서요.”
“왜 하필 그런 걱정이 지금 들죠? 제가 못된 성기사라도 된다는 거예요?”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정말 놀랐다고 생각할 만큼 능청스럽게.
“설마요.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의외네요. 본인이 못된 성기사라서 찔린 게 아니라면요.”
“뭐, 뭐예요?”
레베카의 가느다란 눈썹이 불쾌감을 담고 휘어졌다. 나는 적당히 물러나야 한다는 카란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잠을 못 잔 탓인지 쉽게 화가 억제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못되지 않았나, 돌아봐야 한다는 거죠.”
“……당신!”
레베카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위의 성기사와 소환사, 감독관까지 모두 돌아볼 정도라서 나는 멈칫했다. 레베카는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외쳤다.
“무례한 언행을 계속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아무리 내가 강하더라도, 이런 것에 태연할 정도로 강한 건 아니니까…… 흑.”
무슨 말일까. 문장은 헛소리인 듯 이해되지 않았지만 무슨 의미냐고 다시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투명한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고 떨어진 것이다.
“……!”
주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공녀에게 무슨 무례한 일을 저질렀냐고 타박하는 눈빛에 나는 멈칫했고, 레베카는 못 참겠다는 듯이 몸을 돌려 비련의 레이디처럼 달려 나갔다.
분위기가 한층 싸해진 것은 그 이후였다. 성기사들은 나를 비난하는 눈길로 쳐다보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기사단장은 무도한 소환사에게 경고한다는 듯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나마 소환사들은 비난 대신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옆에서 지켜보던 레너드만이 괜찮냐고 물으면서 나를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를 훈계하려는 듯이 다른 성기사들이 레너드를 끌고 가 버리자 나는 어느새 혼자가 되어 있었다. 혼자는 마냥 편하지도 않다. 전투란 것은 협동과 협력에 기반하는데 이렇게 되고 말다니. 나는 경솔하게 반응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여느 날보다 일찍 훈련을 접고 카란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대는 사제들을 분열시키는 재주가 있군요.”
그러나 나가려는 입구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비꼬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엔 팀을, 이제는 본대 전체를.”
“……펠.”
무구를 모두 갖춰 입은 채로, 냉정하고 어두운 눈을 빛내는 사내에게 나는 불쾌감과 고마움이 동시에 치솟았다.
“저번에는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펠은 예리하게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사악한 종족인지 의심스럽다는 시선이었다. 나는 불쾌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듯이 묻고 말았다.
“절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왜 구해 준 거죠?”
“그건 사제로서 생명을 구하려 한 것뿐이에요. 딱히 그대를 구해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
“그리고.”
펠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며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대가 마족이라면, 성기사가 바로 앞에서 신성력을 뿜는 것을 못 견딜 테니까.”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펠은 나를 한 번 쏘아보고는 머리를 뒤로 뺐다. 노림수라도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억울했고, 화가 났다. 어째서 내가 마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일까. 단 한 번이었다. 마왕이 내게 숨겨 놓은 마기로, 마물을 물리쳤던 것은.
그 뒤로는 신성력을 뿜어내면서 사제로서의 나 자신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그를 보니 기분이 상했고 비위가 틀어졌다.
펠은 화를 머금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
“앞으로도 전투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지켜볼 겁니다.”
“…….”
“언젠가는 그때처럼 큰 실수를 하고 말 테니까.”
펠은 계속 의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계에 적의를 품고 있는 성기사는 여전히 내가 그 사악한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은 사악한 힘이 아닌 사악한 관계였다. 마왕과 밤새 서로의 몸을 탐하는 관계, 적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배덕한 사이임을 말이다.
나는 이 사실을 누구도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펠을 비롯해 어떤 사제도 알면 안 된다고.
‘특히 아론은 더더욱.’
금발의 청년을 떠올리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마왕과의 관계에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순전히 아론, 그의 순정 때문일 것이다.
애틋한 목소리로 자신만을 원해 달라던 남자, 금발의 사내를 떠올리자 부단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느꼈다. 마왕이 진득한 손길로 내 육체를 얽어매는 타입이라면, 아론은 따뜻한 손길로 나를 휘감아 못 움직이게 하는 타입이었다. 두 남자 다 상대하기 어렵고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왕과 아론의 사이에 더더욱 접점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마왕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론만은 마왕과 나의 관계를 모르도록 하고 싶었다. 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
그러나 그날 오후, 벌어진 마물 전투에서 마족이 하나 나타나면서 그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차라리 처리하기가 쉬웠다. 커다란 공처럼 생긴 그들은 땅을 어지럽히는 공격만을 했을 뿐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들은 통통 튀어 다니면서 땅뿐만 아니라 나무와 돌에도 마기를 뿌려 댔다. 그들이 머문 공간이 순식간에 마족의 세계처럼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소환사들은 지팡이에서 빛을 뿜어내기 바빴다.
“저쪽에서부터 몰아간다!”
기사단장은 공 마물을 완전히 박멸할 생각으로 기사를 일렬로 정렬시켰다. 그들의 대검에서 빛이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오자 마물들은 혼비백산해서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간혹 무리에서 이탈하는 마물이 있었으나, 뒤쪽에 있던 기사들이 그런 마물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물은 공격력이 전무한 것처럼 쉽게 터져서 흩어졌고, 그 시체는 가루가 되어 바닥에 뿌려졌다. 때때로 바람을 타고 흩어져서 오히려 큰 마물보다 정화 작업을 훨씬 까다롭게 했다. 가루가 퍼지는 영역이 넓었기 때문에, 소환사들은 혹시라도 마물의 사체가 입으로 들어갈까 입가를 가려야 했다.
나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로 지팡이에서 신성력을 빛내려 했는데, 그 순간 검은 인영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 마족이다!”
누군가 외쳤을 때, 공중에 있던 마족이 사라졌다. 마족이 다시 나타난 건, 공 마물이 모여 있는 곳에서였다.
“어서 공격 대형으로!”
기사단장의 외침이 날카롭게 하늘을 울렸을 때, 마족은 오히려 보란 듯이 마기를 손에서 뿜어냈다. 순식간에 공 마물의 숫자가 늘어났다. 기사들의 서너 배는 될 정도로 마물의 수가 많아지자 기사단장은 당황해서 기사들을 반으로 나눠 각각 마물을 공격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마족은 딱히 반격을 하지 않은 채로 몰려오는 기사들을 피해서 움직이기만 했다. 뿔이 난 기사들이 마족을 쫓아 공격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사라졌다 다른 곳에 나타나는 마족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내가 가진 힘으로 마족의 다리를 묶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신성력을 길게 빼어 밧줄처럼 쓴다면 마족의 정신없는 움직임을 막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한번 시도나 해 보려고 했던 것인데, 막상 신성력을 뿜어 마족의 다리에 감자 마족이 몸을 멈칫하며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크게 당황하면서 내 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