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오늘 위로도 감사해요. 말레드레드는 정말 성숙하고 현명해요. 배울 게 많아서 늘 감탄합니다.”
“……과찬이에요.”
“아니에요, 정말 사제로서 모범이 되는걸요? 보면서 감탄했어요! 저런 사람이라서 신의 사제구나, 하고 말이에요. 괜히 제가 다 숙연해진다고 할까요?”
나는 쑥스러운 듯 호감 어린 어조로 말하는 비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소환사로서 지위가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려 했을 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사제로서의 긍지 높은 신념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남들이 날 정숙하게 봐주길 바라는 내 체면에서 시작한 것이라 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지 않는 마계에선 내 욕망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이어 간다는 데 큰 거리낌이 없던 것이다.
“저도 말레드레드처럼 멋진 신의 종이 되고 싶어요!”
나는 타협한 도덕심과 발로한 욕망이 공존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서 나를 칭찬하며 존경심 어린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비키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얼른 말을 돌렸다.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마을 시찰은 두 번 남은 거죠?”
“네. 둘 다 작은 곳이라서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이름이 뭐였더라. 아, 틴투와 베리스였어요. 베리스는 도시기는 한데, 워낙 작은 곳이라서요. 오늘 틴투를 돌고 내일 베리스를 돌면 시찰은 끝이에요.”
“……베리스요?”
“네, 꽃을 재배해 파는 도시라고 하는데, 가 본 적 있으세요?”
“아뇨, 근처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비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아. 그렇군요. 받은 자료에 보면, 마물 피해가 한 번도 없던 도시라고 하네요. 무척 평화로울 거 같아요.”
나는 그럴 거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키는 사제들을 소집하겠다며 내려갔고, 나는 방어구를 챙겨 입었다. 소환사의 상징인 지팡이도 손에 들었다.
“…….”
사제복까지 걸치자, 거울 속의 나는 완벽한 신의 심부름꾼이 되어 있었다. 성스럽게 빛나는 흰색 예복과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긴 은색 머리칼은 차분하니 우아했고, 보라색 눈동자와 옅은 분홍색 입술은 고상하니 어여뻤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눈빛일 것이다.
언뜻 상냥해 보이는 눈동자는 깊이 들여다보면 차가움이 있었다. 늘 타인으로부터 거리를 벌려 두려고 하는 냉정한 현실주의가 머금어진.
‘카란의 평가가 맞을지도.’
방관주의 태도를 경계하라고 했던 그를 잠깐 떠올려 본 나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마물이 한 번 출몰하자 마치 물꼬가 트인 것처럼 마물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물이 나타나면 얼른 진형을 갖춰서 마물 소탕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나타난 마물들은 수가 많지 않았고 마기도 약했던 터라 비교적 수월하게 처리가 가능했다. 마물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비키가 신나게 함성을 지르며 ‘고생하셨어요-!’ 하고 외치는 것이 이제는 당연해질 지경이었다.
거듭된 승리에 시찰단의 자신감은 하늘로 치솟았다. 자부심도 대단해져서, 서로 어떤 식의 공격이 좋으니 어떤 작전이 효과적이니 목소리를 높여 가며 마차 안에서 열띤 논의를 벌이기까지 했다.
나는 무난히 이겨서 좋은 한편, 마물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지역에 갑자기 그것들이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카란의 경고대로 마물이 강해져서 더 자주 나타나는 거라면, 인간계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신성국의 위기 상태라는 것이다.
‘마왕이 직접 자신의 힘이 약해진다고 했는데, 그것과도 연관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식적으로 마왕이 약해졌는데, 마물이 강해졌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마물이 강해진 이유에는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터였다. 그게 뭘까 고민하는데 마차의 덧창으로 풍경을 보고 있던 비키가 틴투에 다 왔음을 알렸다.
“어서 시찰을 돌고 숙소에 가서 쉬어요!”
비키가 사제들을 보며 독려하듯이 말했다. 이 마을로 오면서 마물 소탕을 다섯 번이나 했고, 아무리 약한 마물이라고 해도 그 출몰 횟수가 많은 만큼 신성력을 자주 방출해야 했다. 따라서 성기사나 소환사나 모두 지쳐 있었고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시찰만 가볍게 한 번 돌면 되겠죠?”
옷매무새를 만지며 성기사 하나가 말했다. 비키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생각처럼 일정은 빨리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틴투의 사람들이 마을을 처음 방문한 성기사와 소환사에 흥분하여 너무 열광적인 반응을 보내온 것이다. 사제님, 사제님 해 가며 감탄하고 행복해하면서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들에 비키도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낼까요?”
그들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겠다는 비키의 제안에 사제들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일찍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비키는 시찰단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말해 오자 꽤나 당황한 듯싶었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머금었다.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저희가 이곳에 있을게요. 머물 곳은 마을 촌장님께서 안내해 주실 거예요.”
나는 마을 촌장이 안내하는 작은 집으로 들어섰다. 소박한 계단을 올라 2층 방에 들어선 나는, 문을 닫고 사제복을 벗었다.
비싼 예복을 한 편에 곱게 개어 둔 나는, 바람을 느꼈다. 마을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찰단을 환영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처럼.
그 마음에 호응하며 소환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따라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질 않는다. 몸은 계속된 싸움에 긴장이 체화된 것처럼 굳어져 있었고, 마음은 마왕의 잔혹하면서도 냉엄한 모습에 얼어붙은 것처럼 소심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늦게까지 웃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
다음 날. 내가 일어나 방에서 나올 때까지 나를 깨운 사람은 없었다. 비키마저 조용했기 때문에 나는 옷을 갖춰 입고 비키의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났어요, 비키?”
“아함, 말레드레드.”
대꾸하는 목소리에는 하품이 걸려 있었다. 반쯤 문을 연 그녀는 아직도 잠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졸린 눈을 힘겹게 끔벅이며 말했다.
“어제 너무 늦게 자서요. 옷을 입고 곧 나갈게요. 부탁인데, 마을을 돌면서 다른 사제들도 좀 깨워 주시겠어요?”
“그럴게요.”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자 흐릿한 하늘이 먼저 보인다. 소란했던 밤이 지나간 후, 틴투의 아침 풍경은 적막하니 무척이나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마을 중간에 크게 횃불을 쌓아 올렸던 흔적과 넓은 임시 탁자들이 여기저기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마 치우지 못한 음식과 술병, 식기들이 한 곳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얼마나 마시면서 즐거워한 걸까. 그들에게 사제는 경계의 대상이 아닌 환영의 대상인 방문자였다. 작은 마을에서 이렇게까지 호감을 표현한다는 것은 황제와 신성국, 그리고 마물 소탕 작전이 제국민들에게 얼마나 믿음직하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된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실제로 보호를 받고, 평화를 얻고 있기 때문에 황제를 믿으며 사제를 환영하는 것이다. 시찰단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재확인하고 중앙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다져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마주치는 사람마다 환하게 인사해 주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이곳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며 빨리 동료들을 깨우러 갔다.
그들은 모두 늦잠을 자고 있었다. 한밤중까지 사람들을 상대했던 탓에 내가 방문을 한참 두드려서야 겨우겨우 일어났고, 모이라는 말에 알겠다며 잠에 취한 목소리로 힘겹게 답해 왔다.
그들의 부은 눈과 멍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제저녁, 혼자 쉬러 갔던 게 더욱 미안해졌다.
죄책감으로 점철된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고, 방을 빠져나와서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침에 먹으면 좋을 찻잎을 구하러 다녔다.
“차요? 딱히 끓여 먹는 차는 없는데. 부로나 열매를 어떠십니까. 볶은 다음 입 안에 넣고 여러 알 씹어 먹으면 왠지 활력이 돋아난다고,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합니다.”
나는 그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부로나 열매는 갓 딴 것을 볶아야 맛이 좋기 때문에 따로 비축해 둔 것이 없었다.
“따라오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인상 좋은 촌장을 뒤따랐다. 그는 마을 광장에서 비스듬히 왼편에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이었는데, 오래 가지 않아서 촌장은 덤불 숲이 우거진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주로 나죠.”
그는 주머니를 건네며 위쪽의 하늘을 힐끗 쳐다봤다.
“그나저나 하늘이 무척 어둡군요. 아침부터 이런 날씨는 흔치 않은데.”
폭우가 올 거 같다며, 촌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귀하신 분들이 오셨는데, 돌아가는 길이 이래서 원……. 죄송할 따름이네요.”
“하늘이 어두운 건 촌장님이나 마을 사람들 때문이 아닌걸요.”
나는 온화하게 답하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음침한 암회색의 구름이 아침 해를 덮었다. 폭우를 경고하듯 싸늘한 바람마저 목 뒤를 스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부로나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작은 열매에서 올라오는 상쾌한 냄새가 머리를 맑고 시원하게 해 주고 있었다. 활력을 돋게 해 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나는 촌장의 말을 들었다.
“그 위쪽으론 발라드라두 나무도 자라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필수품이라고 들어서, 몇 번 중앙에 공급한 적이 있는데,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따 가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