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43화 (43/220)

43.

촌장은 내가 부로나 열매를 열심히 따는 걸 보면서 바로 앞쪽에 난 잎사귀가 긴 나무들도 가리켰다. 나는 반가운 잎사귀를 보자 눈이 커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발라 잎사귀는 가격이 좀 있는 편이라서 함부로 따 갈 수 없었다. 마을의 주요한 소득원이 될 것임이 분명한데 어찌 한낱 방문객에 불과한 외부인이 그걸 마음껏 채집해 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나는 이미 본대에서 충분히 가져온 터였다.

‘챙겨 먹어야 하니까.’

아론은 일주일마다 자신이 먹는다고 했지만, 두 번째 만남부터 그냥 내가 먹어 오고 있었다. 내가 더 쓴맛에 익숙하기도 했고, 몸을 관리하기도 편했기 때문이다.

‘마왕을 만나고 나선 더욱 내가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지하 세계에서 보냈던 밤들을 떠올려 보고는 작게 몸서리를 쳤다. 금방이라도 마왕의 느릿한 손이, 뜨거운 혀가, 음험한 눈동자가 내게 달라붙어, 깊은 저 아래까지 나를 끌어당길 것 같았다.

나는 그 침침하고 음산한 욕망의 계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더욱더 그것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마치 타락과 탐욕의 굴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특정 분야의 중독자들처럼, 늘 그것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내가 꿈꾼 건 그런 게 아니었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머리로는 그것을 원하고 먹고자 하는데 마음으로는 소화시키지 못하는 생각의 열매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그것이 마왕이라는 특수한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어어, 그런데 저게 뭘까요……?”

일부러 부로나 열매를 강하게 움켜쥐어 마왕에 대한 생각을 상쾌한 향기로 몰아내고 있던 나는, 촌장의 말에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덤불 숲 사이로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발라드라두 나무 정도의 높이였지만 집채만큼 넓었다. 직사각형 물체는 돌덩이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마치 낯선 세계에 떨어진 짐짝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그것의 외양이 범상치 않았다.

수십 개의 눈이 박혀 있는 외관. 그 눈들은 좌우로 눈꺼풀을 파닥거렸다. 굶주린 맹수의 눈을 하고 있는 그 잔인한 시선들은 눈자위도 없이 그냥 시뻘겠다. 하나하나가 쳐다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저, 저, 저건 설마 마물…….”

촌장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말을 한없이 더듬었다. 마물을 처음 보더라도 그들이 내뿜는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악한 마기는 인간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해서 마음속에 내재된 근원적인 공포를 자아내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에 대한.’

나는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움직였다. 지팡이를 찾는 손이 조금 떨렸지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헷갈리진 않았다. 나는 마물에게 들킬세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로 가서, 사제들에게 알리세요.”

“아, 아…….”

“알리고 나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시고요.”

“어, 어, 어떻게 하시려고…….”

촌장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한 마리 정도라면 방어할 수 있을 겁니다.”

뿜어지는 마기가 심상치 않다. 상당히 강한 마물이란 의미였고, 혼자서 오래 상대할 수 없음을 말했다. 나는 경고하듯 그에게 덧붙였다.

“오래는 어려우니 서두르셔야 해요.”

“아, 아, 아…… 알겠습니다, 그럼!”

촌장은 몸을 돌려 마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신발의 앞부리만 디뎌서 뛰고 있었으나 급한 마음에 자세가 허물어졌고, 그는 큰 동작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촌장은 아픈 비명을 내질렀다가 사태를 파악하고 금세 일어났다. 잠깐 뒤를 돌아본 그는 시뻘건 눈알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질겁했다.

“으아악!”

“달려요!”

“아, 예예!”

내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촌장은 허둥지둥 뛰기 시작했다. 마물은 나를 보았다가 촌장을 뒤쫓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서 도망가는 먹이란 보통 마물이 좋아하는 온갖 공포와 풍부한 감정을 발산하면서 달아나기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주문을 중얼거렸다. 빠르게 신성력이 만들어졌고 지팡이에는 흰 빛이 뭉쳐 들었다. 나는 예전에 펠에게 배웠던 공격 방법을 떠올리며 연달아 신성력을 뭉쳐 마물을 향해 쏘아 보냈다.

급히 만든 탓에 신성력은 크진 않았지만 마물의 관심을 끌 정도는 되었다. 두 번이나 연달아 성스러운 공격을 받은 마물은 눈알을 내 쪽으로 바짝 치켜뜨며 몸을 완전히 돌려 세웠다.

“큿!”

이 마물은 촉수로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몸통으로 나를 밀어붙이려고 했다. 아마도 마물의 물렁물렁한 피부가 무언가에 닿으면 그 대상을 녹여 가면서 몸에 흡수하기 때문에 그런 공격 방법을 쓰는 듯싶었다.

나는 마물이 지나다녔던 곳의 땅과 식물이 완전히 삭아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마물의 공격이 생각보다 재빨라서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윽!”

이번엔 측면에서 나를 들이받으려고 하자 서둘러 옆으로 몸을 굴렸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구른 등허리가 아파 왔지만 마물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마물이 다시 내 쪽을 보기 전에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쿵, 쿵…….

마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팡이가 노출되지 않게 가만히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그대로 침묵했을 때, 마물이 내가 있는 곳을 찾아 눈꺼풀을 요란하게 여닫는 소리가 났다.

‘신성력으로 눈을 공격하면 어떨까.’

수십 개의 눈알이 있는 만큼 하나만 공격해선 타격을 입지 않겠지만 그냥 몸통을 때리는 것보다는 훨씬 고통을 줄 것이다. 나는 그런 판단하에 가슴속의 온기를 끌어냈다.

그리고 숨어 있던 나무 기둥에서 나와 그 온기로 뭉쳐진 것을 던졌다.

퍽!

날아간 신성력이 마물의 눈알 하나를 파고들자 마물이 온몸을 꿈틀거렸다. 이내 괴롭다는 듯이 눈알에서 검은 진액이 쏘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액체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진액이 떨어진 곳의 땅이 스스슥, 녹아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몸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마물의 나머지 눈들이 그것을 공격한 나를 향해 무섭게 빛을 내고 있었다.

곧 마물이 전력을 다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조금만 붙잡고 있으면 돼.’

나는 마물이 달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덤불 안쪽은 가시나무들이 많았고 날카로운 잎들도 즐비해 있어서 유인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가시들이 마물의 눈에 피해를 더욱 주길 바라면서, 내 피부가 긁히고 피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깊은 가시나무 숲 쪽으로 들어갔다.

“하아, 하아…….”

입 안이 바싹 말라 오고 머리가 어지러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사제복은 이미 얼룩덜룩 변해 거뭇한 물이 들어 있었고, 반듯했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짓눌린 풀 냄새가 올라왔다.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마물이 가시와 덤불을 헤치고 나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윽……!”

나는 곧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수그러졌다. 등허리에 강한 충격이 전해진 것이다. 서둘러 등을 짚으며 일어나 뒤를 돌아보자, 마물이 가시나무를 통째로 흡수해서 내게로 날려 보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피했으나 마물이 쏘아 보내는 속도를 이겨낼 수 없었다.

“악!”

두 팔을 교차해 간신히 방어했으나 부딪힌 충격으로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쿵.

바닥에 머리부터 부딪히고 나자 전신이 나른해지며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던져진 나약한 생명이었으며 마물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허술한 인간이었다.

“아…….”

빽빽한 나무의 숲. 그 끝에는 햇빛의 그림자만이 창백한 잎사귀에 어른거린다. 이곳은 빛이 없는 바닥이고 햇빛이 온기를 나눠 줄 수 없는 음습한 대지 위였다.

나는 이렇게, 정적과 어둠 속에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할까.

지팡이를 다시 쥐어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물을 혼자서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고 부딪힌 머리에선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와 목 뒤를 적시고 있는 형편이었다.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그런 불길한 생각을 한 순간, 뜻밖에도 한 남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나를 지켜 주고 싶다고 말한 그를, 울보였던 아론나이드를.

그 어리고 나약했던 금발 소년의 어디에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서려 있었을까. 성장해서도 변치 않을 정도로 강하고 곧았던 그 마음은, 그대로 더욱 커져서 성인이 된 나를 감쌌으며 내 중심을 흔들리게 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의 애틋한 진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늘 나를 향해 일관적으로 빛나던 그의 지고지순한 연정을.

그가 나와 거리를 두길 바랐던 내가, 어째서 이런 순간에 그를 떠올리고 만 것일까.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죽음의 순간에 상냥한 그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편하고자 그를 이용한다는 생각마저 들자 나는 더 이상 아론을 떠올리고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눈을 강하게 감으며 아론을 떨쳐 버렸다.

다행히 2차 공격은 없던 터였다.

‘……어?’

이상하다 싶었다. 고개를 들어 마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 흉악한 생명이 보였다. 미련 없이 가는 그 모습에서 나는 마물이 나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음을 느꼈다.

‘다행이야.’

아마도 빼곡한 가시나무 숲을 헤쳐서 나를 죽일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죽은 듯한 내 상태도 한몫했을 테고.

‘이대로 잠시 쉬고 있을까.’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몸은 이미 지쳐 있었고 상처 입은 뒤통수는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빠져나간 피가 마치 내 생명력인 양 나는 쇠약해져 있었다.

나를 생각하자. 다치고 아픈 내 몸을. 다른 건 고려하지 말자며 눈을 감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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