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5화 (15/220)

15.

곧 다시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내 살결을 어루만진다. 나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이었고, 잠에 취해 있었다.

“누구…….”

“접니다.”

아론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울렸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론이 그런 나를 안심시켰다.

“더 주무셔도 됩니다. 아직 밤의 평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온 거야. 차마 끝나지 않은 문장을 아론은 잘도 알고 대답했다.

“밤까지 소탕 작전이 이어져서 이제야 본대로 돌아왔습니다.”

아론은 잠깐 말을 멈췄다. 지쳤을 만도 한데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에 놀라고 흥분했다는 듯이.

“말레드레드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그는 살짝 감정에 복받친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허락 없이 들어왔음을. 하지만 상처를 돌보지 않고선 갈 수 없었습니다.”

“스친 상처야…….”

그의 절절한 음성이 걸려서 나는 굳이 말해야 했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확인했습니다. 금세 괜찮아질 거라 봅니다.”

“……아론.”

그러자 그의 황금빛 시선이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한다. 나는 흐린 시선으로 그 눈을 바라보았다.

“난 정말 괜찮아.”

“압니다.”

“그런데 네 눈이 그렇게 안 보여…….”

내 말에 아론이 조금 웃었다. 아픈 듯 어딘가 괴로운 미소였다.

“말레드레드가 다친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요.”

그런 일은 이미 겪어봐서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의 아이 같은 말에 웃었다.

“……전투가 다 그렇지.”

내 말에 아론이 씁쓸하게 입가를 올렸다. 황금빛 눈동자는 진해져 있었다.

“다치지 않게 제가 보호하고 싶습니다.”

“……아론.”

“전 옛날과 달라요. 더 이상 그때의 아론이 아니에요.”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 말레드레드를 지킬 만큼 강해졌습니다.”

아름답고 정교한 얼굴 위에 섬세하게 내려앉은 감정은 어쩜 저렇게 신실할까. 그건 신을 향한 믿음처럼 올곧았으며 맹목적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분명한 확신과 자신감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다.

물론 안다. 내가 그때의 말레드레드가 아니듯이 그 역시 더 이상 허약한 울보 아론이 아니란 것을. 압도적인 신성력으로 무장한 아론은 뛰어난 기사였고, 황제의 나이트가 되기에도 무리가 없는 강력한 사제란 것을.

나는 그의 자신감을 인정하듯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자고 나서…… 또 이야기하자…….”

“편히 쉬십시오.”

“응…….”

나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느꼈다. 내 몸은 무의식의 바다를 향해 점차 떠내려가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그의 손길이 다시 한번 따뜻하게 내 팔을 덮는 걸 느꼈다.

“……이번에는 기필코 다치지 않게.”

그의 중얼거림은 꿈결처럼 들려왔다. 나는 멍한 가운데에서도 그의 절절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상처 입은 목소리로 결연하게 말하는지.

나는 의아함을 가진 채로 다시 잠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어디서!”

꿈속에서, 나는 갑자기 날아온 손길에 저만큼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워낙 뜻밖이어서 피할 생각도 못했다. 솔직히 나는 평범한 백작가의 아이였고 싸움이니, 전투니 이런 것에 익숙지도 않은 소녀였으니까.

“네가 누구라도 되는 줄 알아? 어미도 없는 사생아 주제에!”

그의 말투는 독이 묻은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액체를 손으로 만져 보고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아론을 종종 괴롭히는 후작가의 아들이었다. 평민 출신의 아론을 늘 무시하고 따돌렸던 소년은 또래 중에서도 월등히 덩치가 커서 어른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는 피를 흘리는 나를 보며 사납게 눈을 좁혔다.

“울보 따위의 행방을 왜 내게서 묻는 거야! 한 번만 더 그 녀석을 찾아 날 귀찮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아론을 종종 구덩이 같은 곳에 가두어 두곤 했다. 아론이 절망하고 절규할 때까지 꺼내 주지 않다가 어른들이 나서면 그때에 자신이 찾았다면 알려 주곤 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그런가 싶어 그를 찾았지만 그는 내가 자신을 추궁한다며 도리어 나를 밀쳤을 뿐이다.

“말레드레드…….”

다행히 아론은 그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 숨어 있다가 다친 나를 보고서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나타났다.

“아…….”

울보 소년의 공포 가득한 얼굴. 내 얼굴에 흐르는 피를 보며 소년은 몹시도 놀란 듯싶었다. 나는 별거 아닌 것이라 말했지만 아론의 얼굴은 한동안 차갑게 얼어붙어 펴질 줄 몰랐다. 자책하는 듯 절망과 슬픔, 분노에 점철된 표정으로.

‘그래서였나.’

나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꿈속에서 아론에 대해 잊고 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 것이다.

이 기억은 아론이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아론은 저 일이 있고 나서 얼마지 않아 사라졌다. 내 머리의 상처는 나았지만 그가 없어졌다는 충격은 한동안 내 가슴 속에 머물렀던 거로 안다. 그가 죽었다고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나는 새삼스럽게 아론이 왜 지켜 준다는 말을 했는지 깨닫고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방이 아니라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마왕의 방이었다. 마왕은 폭이 넓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다소 권태로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괴한 눈빛이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러지?’

내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무슨 꿈을 꾸었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던데.”

“아, 그게, 옛날 기억…….”

생각 없이 대답하던 나는 어떤 깨달음이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붉은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꿰뚫었다.

“왜?”

“아뇨. 어쩐지 당신을 만난 뒤로 잊고 있던 기억이 더 잘 생각나는 거 같아서요.”

그게 당신 탓이냐고 차마 노골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왕은 충분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안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 훤칠한 손 주변으로 언젠가 보았던 검은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뱀처럼 똬리를 튼 채로 연신 검은 몸통을 꿈틀거리는 그 힘은 징그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미지의 생물을 보듯 신기한 기분을 선사했다. 내가 흠칫하는 것을 보면서 마왕은 일부러 그 힘을 내 쪽으로 펼쳐 보였다.

“룬. 이 녀석이 머릿속을 파헤치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어느 순간 불쑥불쑥 되살아난다고 하지. 하지만 그 기억들을 추억하면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녀석들은 없었어.”

“아…….”

그 말인즉 룬에게 공격당한 자들은 모조리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몸을 움츠리며 두려워하자 마왕은 차갑게 웃고는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고 만다. 마왕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신성력이 넘치는데.”

마왕은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그의 붉은 눈이 예리하게 나를 훑었다.

“어째서지? 신의 냄새가 이토록 잔존하는 건?”

나는 그가 왜 그제야 내게 날이 서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힘이 강하게 느껴지니 경계심이 든 모양이다. 나는 침착하게 변명했다.

“그거야 제가 신의 힘을 쓰는 사제니까…….”

“이건 그대의 신성력이 아니야. 그대를 소환하는 내가 그대의 신성력이 어떠한지 모를 거라 생각하나?”

긴 손가락이 내 뺨을 스쳐 목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긴장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한기가 마왕이 원래 내뿜는 기운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향해 가진 살기 때문인지 좀처럼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말해 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읏…….”

나는 그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와 닿자 신음하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내 옷을 좌우로 벌려서 하얀 가슴을 드러내게 했다. 긴장과 한기로 꼿꼿해진 유두가 드러나자 어쩐지 민망해졌지만 그는 더욱 그런 느낌이 들라는 듯이 내 옷을 벗겨내 상체를 완전히 드러나게 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보며 가슴을 노출한 상태였다.

“룬을 이용해 알아볼 수도 있지만, 그랬다간 그대의 심약한 뇌가 부서져 버릴 테니까.”

세뇌하듯이, 그가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불길한 일이 생기기 전에 그대의 입으로 듣고 싶군.”

“으읏, 정말 별일 없었…….”

“날 속이려 하지 마. 그대가 상대하는 이는 마계의 군주다.”

붉은 눈이 암연했다. 악의 본질을 본 것만 같아 나는 숨을 죽였다.

“아, 아…….”

곧 내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은 적나라했다. 그는 일부러 고통과 쾌락을 넘나들듯이 거칠게 만져댔고, 나는 따끔한 통증인지 쾌락인지 모를 느낌들을 받아야 했다.

“어서 이야기해 봐. 그대의 몸에서 빛이 휘돌아서 짜증 날 지경이니까.”

마왕은 인내심이 부족해졌다는 듯이 말했다.

“아읏, 살살…….”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군.”

마왕은 눈을 가늘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가슴을 만지던 손을 내려 바지 속에서 자신의 성기를 꺼내 내 음부에 비비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뜨거운 살덩이가 내 예민한 살 위로 매몰차게 비벼지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아……!”

“그대를 괴롭히는 방법은 여러 개가 있지.”

마왕은 위압적으로 웃어 왔다. 내가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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