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4화 (14/220)

14.

“윽.”

나는 날카롭게 뻗어오는 촉수들 때문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바로 앞에 선 성기사가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공격하는 촉수가 많아서인지 나 또한 촉수를 피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으, 으아……!”

문제는 다른 소환사들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갑자기 촉수가 폭발해 날아오자 겁이 난 건지 소환사 3이 자리를 이탈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엉거주춤 쥔 채로 물러나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조심해!”

그때, 누군가 외쳤다. 나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고 촉수 하나가 내 쪽을 향해 날아오는 걸 발견했다.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따끔한 느낌이 팔뚝에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

지팡이를 쥐는 데에는 문제없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해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리고.”

나는 겁먹은 소환사를 향해서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로 돌아와서 집중해요.”

그는 놀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이지만 내 말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세조차 반듯해져 있었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다시금 지팡이를 꽉 쥐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돼요!”

소환 영역을 잘못 그리면 향후 일어날 2차 피해는 끔찍할 수밖에 없다. 마물은 폭주한 상태로 무방비한 어느 도시로 떨어질 테고, 많은 사람이 저항도 못해 보고 죽을 터였다.

비록 음탕한 욕구를 위해 신실과 도덕심을 버린 나였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사제였고, 선량한 자들을 지키는 소환사였던 것이다.

나는 손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거세게 힘을 쥐었다. 자꾸만 가슴이 차가워지고 눈앞이 흐려지는 신성력 부족 현상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물러날 수 없다는 것만을 상기하며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들을 해치는 마물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고 소환사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였다.

“됐어요!”

소환 영역이 완성됐다고 느껴지자 나는 지휘하는 기사에게 외쳤다. 기사는 알겠다는 듯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성기사들에게 외쳤다.

“신성력을 쏟아부어! 마지막이야!”

그러자 성기사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신성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내기 시작했다. 눈앞이 황홀한 빛으로 가득했고, 마물들은 궁지에 몰린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레너드라는 성기사에게서 제법 훌륭한 신성력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좋아!”

소환 영역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마물들은 어느새 몸이 녹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성력에 둘러싸인 그들은 격렬한 몸부림을 쳤으나 곧 소환 영역이 작동하여 몸체를 끌어당기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

마물이 모두 사라졌다. 마물의 몸에서 흘러나왔던 지독한 악취가 코를 아릿하게 했고, 사라지지 않는 신성력의 아련한 불빛이 시야를 둔탁하게 했으나 다들 이겼다는 것에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

소탕을 지휘했던 성기사가 주의를 환기하듯 말했다. 전투가 잘못될까 두려워했던 그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소환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고했네.”

그의 시선은 내게 좀 더 길게 머물렀다. 특정 지어 말하지 않았지만 후반의 내 활약을 고마워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럼 마물 청소를 마무리하고 다들 본대로 합류하게.”

그는 짤막하게 지시하고는 돌아섰다. 곧이어 같이 싸웠던 성기사들에게 돌아간 그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두드리며 오늘의 전투 성과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일반적인 지휘관과 다르게 좋아 보였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소환사들을 보고 있던 나는 멀찍이서 내게 손을 흔드는 레너드를 발견했다. 귀족답지 않게 격식 없이 손을 흔드는 모습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한편으론 무사히 끝났다는 모습 같아서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것으로 응답했다.

“아까.”

소환사 3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민망한지 어색한 몸짓이었다.

“깜짝 놀랐어요. 눈빛이 무서워서…….”

나는 그를 바라봤다.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내 빤한 시선에 그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온순한 성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늘 미소 짓고 우아하게 싸워서……. 제, 제가 지켜봤다는 건 아니고요!”

그는 혼란스럽게 팔을 휘저었다.

“몇 번 마주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선두에 서서 싸우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나는 거북해졌다. 그가 칭찬을 과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체로 상냥하게 행동하려고 한 건 맞지만 전투에서도 미소 지으며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늘 두려움으로 입 근육이 굳는 걸 느꼈고, 또 그런 걸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긴장한 채 움직이곤 했으니까.

그런 내가 전투 중에 웃은 날이 있다면 아론과 재회했던 순간일 것이다.

‘그 찰나는 특별했으니까.’

전투를 잊게 하던 눈부신 미소. 감미로운 음성. 뜨겁고 강렬한 눈빛.

그가 내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레드레드.’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나는 깨닫게 됐다. 그를 원하고 있음을.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자 괜스레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주먹을 말아 쥐어야 했다.

“그래서 저도 말레드레드처럼 남들에게 좋게 보였으면 했어요.”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요. 힘내세요.”

나는 그렇게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떠나려는 나를 보며, 그가 재빨리 말했다.

“실은 아까 그렇게 당황한 건……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리만이, 그러니까 소환사 1이 다치는 걸 보니까 너무 당황해서요.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다시 참여했으니 된 거예요.”

“그, 그래서 말인데요!”

그는 이제야 본론을 말한다는 듯이 은밀하게 웃었다.

“이번 작전을 보고할 때 좋게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멈칫해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제가 자리를 이탈했다는 부분에 대해서요. 촉수가 날아와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다고 말해 주면 좋겠어요.”

“아.”

그제야 그가 왜 나를 전투 중 웃고 있는 광인으로 묘사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별 거부 반응 없이 대꾸했다.

“알겠어요.”

“정말, 고마워요! 신세 잊지 않을게요! 아, 그리고 다른 소환사들이 보고하는 부분은 걱정할 거 없어요! 다들 제가 해 달라는 대로 말해 줄 거거든요. 친한 사이라!”

나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순순히 응하자 기분이 좋았는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말까지 불필요하게 덧붙였다.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으면서 그에게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팔이 따끔거리며 아파 온 것이다. 얼른 치료를 받고 쉬고 싶었던 마음에 나는 빠르게 그를 벗어나 치료실로 향했다.

마물 청소는 간단히 종료됐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소환 영역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내 방어구 정도만 닦고서 본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올 때와 달리 같이 전투에 임했던 소환사들과 마주 보고 앉았고, 소환사 3이 친한 척 말을 걸었으나 짧게 대답하자 곧 나에 대한 관심을 끄고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롭게 팀을 짠다는 말 들었어?”

“아, 성기사 한 명과 소환사 두 명을 한 팀으로 한다는 거? 그거 괜찮을까?”

“글쎄. 훈련할 때는 좋다지만 실전에서는 불편할 거 같은데. 성기사들의 명을 받아서 움직여야 할 거 같고.”

“듣기론 위에서 제안이 그렇게 왔다나 봐. 평소에 성기사들은 성기사들끼리, 소환사는 소환사들끼리 뭉쳐 다니잖아. 그러다 보니 협력할 때 수월하게 안 되고 따로 움직인다는 지적이 있었대. 그래서 이번에 대대적으로 그렇게 바꾼다나 봐.”

“성기사와 소환사, 둘이 한 팀이라.”

누군가 회의적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잘 될까? 성기사들은 우리랑 너무나 다른데.”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마차의 덧창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워진 에렌모르의 숲이 여유로움을 안겨 준다. 지치고 지쳤던 하루.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말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팔은 괜찮나?”

본대에 도착해 카란의 천막으로 들어가자, 그가 대뜸 물어왔다. 내 팔에 감긴 붕대를 봤는지 그는 약간 커진 눈을 하고 있었다.

“살짝 스친 정도에요.”

“마물에게 당한 상처는 잘 관리해 줘야 해. 자칫하면 그 부분이 썩어들어 갈 수도 있으니까.”

카란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간혹 치료를 소홀히 하다가 살이 짓물러 팔다리를 자른 녀석도 봤거든.”

“……유의할게요.”

“내가 너무 겁을 줬나. 어련히 잘할 텐데.”

카란은 무심한 어조였으나 역시나 세심한 감성으로 덧붙이고는 물었다.

“그래, 오늘 지원 나간 건 어땠지?”

나는 본 대로 말했다. 소환사 3의 부탁대로 주관적인 의견이 살짝 가미된 보고는 카란의 종이에 요약해서 적혀 갔다. 카란은 내 보고를 다 듣고 난 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게 전부인가?”

“네.”

카란의 눈빛이 길게 내게 머물렀다. 뭔가 주시한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크게 꾸민 것도 없고, 과장한 것도 없어서 꺼릴 게 없었다. 소환사 3의 부탁은 거창한 게 아니었고, 소탕을 하다 보면 곧잘 발생하는 일 중의 하나여서 조금 좋게 말하더라도 내 위신에 나쁠 게 없었다.

물론 상부가 자신을 겁쟁이로 보면, 활동에 좋지 않을 소환사 3의 입장에선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을 테지만 그의 행위를 ‘어쩔 수 없이 피해야 했다.’라고 보고한 내 입장에선, 그저 하루에 일어난 소란한 일 중에 지극히 사소한 일부로 그의 요청이 다가왔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백하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나가려고 하자, 카란이 깜박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당분간 성기사 한 명과 소환사 한 명이 자네와 함께 움직일 거야. 훈련에서부터 작전까지 친밀도를 높여 작전 수행을 한다는 취지이니 그렇게 알고 있게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천막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무장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르게, 나는 어느새 숙면에 빠져들었다.

***

“…….”

이상한 기분이 든 건 새벽 무렵이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따스하고 뭉근한 느낌에 가슴이 살랑거린다. 온화하고 온정 깊은 손길은 붕대가 감긴 피부 위로 섬세하게 전해졌다. 따스한 체온, 부드러운 열기는 내 몸이 모르고 있던 피로까지 살펴 주듯 깊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으나 마음을 부드럽게 이완시켜 주며 심신의 안정을 가져왔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을 어루만지는 어미의 손길처럼.

“아, 좋아…….”

나지막이 내가 중얼거리자, 피부를 덮은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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