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65화 (164/407)

입성 (5)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상대방이 먼저 인격 모욕하고 달려들었던 것을 말이다.

"이 봐요. 저놈이 하는 말을 믿어요? 저놈이 우리한테 시비 걸고 제이크를 진열대에 던져 버렸다고요."

"론의 말이 맞아요. 당한 건 우리라고!"

론이 제이크를 두둔했고 제이크가 한마디 거들었다.

서로 다른 양쪽의 이야기에 직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분 이야기가 맞아요. 저 사람들이 먼저 트집을 걸었어요."

"나도 옐로우 멍키라고 하는 걸 똑똑히 들었습니다."

"뻔뻔한 자식들. 죄를 덮어씌우다니."

구경꾼들이 최기석의 편을 들자 론과 제이크가 얼굴을 구겼다.

"굳이 시간 끌 이유가 있습니까? CCTV만 보면 되는데."

"좋습니다. 세 분 다 따라오시죠."

최기석의 말에 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관리실에서 CCTV 확인이 이어졌다.

"미스터 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가 보셔도 좋습니다. 서비스 센터에 가면 특별한 보상을 드릴 테니 꼭 받아 가세요."

"……."

"두 분은 남아 주시죠. 배상 책임으로 할 말이 있으니까."

직원의 말에 론과 제이크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최기석은 관리실을 나와 쇼핑용 캐리어를 받았다. 그리고 장 본 물건들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드디어 험난한 첫 외출이 끝났다.

인종 비하를 들은 것은 짜증 나지만 그들이 벌 받을 것을 생각하니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저기요."

갑자기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

"아까 제 편을 들어 주신 분이군요. 감사합니다."

"뭐.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안 좋은 일을 당하셨지만 미국에 저런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외국인에게 친절한 분들도 얼마든지 많아요."

"그쪽 같은 사람 말인가요?"

그의 말에 여성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네. 잘 가세요."

최기석은 여성과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 온 물건을 정리하자 할 일이 없어졌다.

매트리스 위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자기야. 보고 싶었어.]

정설화가 전화를 받자마자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래서 요즘 자면 설화 꿈만 꾼다?"

[칫. 그건 거짓말이잖아.]

정설화가 토라진 척하며 고개를 픽 돌렸다. 영상통화를 걸었기에 표정과 행동을 다 지켜 볼 수 있었다.

"거짓말 아닌데? 하늘에 걸고 맹세할 게."

[그럼 믿어 줄게. 인터뷰는 봤어?]

"인터뷰는 모레. 교수님 추천서도 있고 준비도 잘했으니까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USMLE 만점에 토플 점수까지 거의 만점이잖아. 정말 웬만해서는 그럴 일 없겠다.]

정설화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 사실 나쁜 생각도 했어. 네가 인터뷰에 떨어져서 한국에 돌아오면 어떨까 하고. 진짜 나빴지?]

"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네가 가는 길을 끝까지 응원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건 됐고 손 봐봐."

최기석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정설화가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기에.

[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동시에 보여 주기 하자.]

"좋아. 하나, 둘, 셋!"

최기석의 외침에 두 사람이 카메라에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 모두 손가락에 커플링을 끼고 있었다.

"오. 우리 설화 제법인데."

[제법이 아니라 당연한 거야. 난 잘 때도 씻을 때도 안 벗어. 하루 종일 끼고 있어.]

"나도. 나중에 수술실에 들어가면 못하겠지만."

[그건 괜찮아.]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정설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그의 말에 정설화의 두 뺨이 발그스름해졌다.

잠시 후 최기석은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정설화만 자신을 믿어 준다면 그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띵동!

거실로 나가는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이웃사촌 김혜진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집에서 술 빵을 만들어 봤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술 빵이 담긴 쟁반을 받았다. 술 빵에 얼굴을 가까이하자 특유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미국에서 술 빵을 먹게 될 줄이야.

"괜찮으면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뭐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마음만 받을게요. 할 일이 많아서요."

김혜진이 미소를 지었다.

쿵!

"으아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울음이 한데 섞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김혜진의 딸 진혜연이 계단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혜연아! 괜찮아!"

김혜진이 진혜연을 다독이며 상처를 살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머리 위쪽 부분이 길게 찢어졌다.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희 집으로 가시죠."

최기석은 모녀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송명진이 구입한 응급키트로 상처를 소독했다.

'불행 중 다행이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머리 표면에 국한되었다. 급성 경막하출혈 같은 내상은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깊습니다. 소독만으로는 부족하고 꿰매야겠네요."

"꿰매요? 병원에 가야 하나요?"

김혜진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랐다.

감기로 진료 받고 약만 타도 몇십만 원은 우습게 깨지는 곳이 미국이다.

봉합한다면 얼마나 큰돈이 깨질지 모른다.

돈을 걱정하는 자신이 밉지만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요. 안 가셔도 됩니다."

"네? 방금 상처를 꿰매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꼭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최기석은 미소 지으며 진혜연을 응시했다.

진혜연은 어느새 울음을 뚝 그쳤다. 병원 이야기가 나오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혜연아. 오빠가 안 아프게 치료해 줄게."

"그럼 병원에 안 가도 돼요?"

"물론이지. 휴대폰 갖고 계시면 동영상 같은 거 하나 틀어 주실래요?"

"아. 네."

김혜진이 휴대폰으로 포로로 동영상을 틀어 주자 진혜연이 잠잠해졌다.

그사이 최기석은 진혜연의 등 뒤로 이동했다.

우선 상처 양옆에 있는 머리카락을 일자로 세운 후 손에 쥐고 기본 매듭을 지었다.

매듭을 적당히 잡아당기자 상처 위로 꿰맨 자리가 생겨났다.

일명 머리카락 매듭이다.

"혜연아, 아프니?"

"아니요."

"지금처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최기석은 차분하게 같은 방법을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자 상처 부위에 봉합사로 꿰맨 듯한 정교한 매듭이 지어졌다.

톡. 톡. 톡.

상처 봉합용 본드를 떨어트리는 것으로 처치는 끝났다.

띠링!

[숨겨진 임무, '외국에서의 첫 진료'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500 P.

P를 제공합니다.]

"이제 다 됐습니다. 앞으로 나흘간은 혜연이 머리를 감기면 안 됩니다. 나흘 후에는 본드가 떨어지고 상처가 붙으니까 평소처럼 생활하면 되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혜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운이 좋았죠. 혜연이 머리가 짧았으면 매듭을 못 지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꼼짝없이 병원에 갔을 텐데……. 혜연이도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진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꼽 인사를 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최기석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문득 저렇게 깜찍한 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튿날 오후.

최기석은 차를 몰고 메이죠 클리닉으로 향했다.

오늘은 대망의 인터뷰가 있다.

준비는 철저히 했지만 막상 당일이 오자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근무할 곳이 천하의 메이죠 클리닉이 아닌가.

인터뷰에서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는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본관 건물 앞에 섰다.

머릿속으로 자기소개를 반복하고 예상 질문들을 점검한 후에야 걷기 시작했다.

'뭐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노인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노숙자인지 얼굴이 꾀죄죄하고 복장이 형편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최기석처럼 그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곧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어르신. 괜찮으세요?"

최기석은 서둘러 다가가 노인을 부축했다.

"그쪽은 누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아프신 거 아니에요?"

"아파. 배가 너무 아파."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혹시 어제 잘못 드신 음식이 있습니까?"

"없어. 그런 거. 근데 당신 누구냐니까?"

"지나가던 의사입니다. 어르신이 휘청거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요."

최기석은 노인을 조심스럽게 벤치에 눕힌 후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놀랍게도 3단계인 히포크라테스의 눈에 걸리는 질병이 없었다.

노인은 건강 그 자체였다.

정신과적인 문제조차 없을뿐더러 증상에 아예 복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고. 아파 죽겠네."

노인이 앓는 소리를 하며 벤치에 드러누웠다.

최기석은 한참 노인을 내려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이유,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의사고 나발이고 그냥 가던 길 가. 아파 죽겠으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최기석은 귀찮아하는 노인에게 기어코 문진을 시도했다. 그리고 복부의 이곳저곳을 눌러 보았다.

"아파! 아프다고! 날 죽일 셈이야!"

우하복부를 누르자 노인이 펄쩍 뛰었다.

"어르신은 충수돌기염이 의심됩니다. 빨리 진료를 받으셔야 해요."

"충수돌기염? 그게 뭔데?"

"대장이 시작되는 위치에 충수돌기라는 부위가 있어요. 그곳에 염증이 생긴 것을 충수돌기염이라고 합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가시죠."

최기석은 노인을 잘 달랜 후 등에 업었다. 그리고 본관 응급실로 이동해 진료예약을 도왔다.

"나 돈 없는데? 진료받아도 될까?"

"네. 나중에 진료 지원팀이라는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치료만 생각하세요."

최기석은 노인의 가족에게 연락해 준 후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자 면접이 10분 남았다.

서둘러 면접 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온 지원자들이 인터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석 최라고 합니다."

"확인했습니다. 명찰 받으세요."

데스크에 있는 여직원이 명찰을 건넸다.

그의 면접 번호는 무려 150.

경쟁자가 무려 150명이 있는 셈이다.

하반기 레지던트 모집 인원이 50명이니 경쟁률은 대략 3:1 정도다.

"그 꼴로 면접 보러 왔어요?"

그가 자리에 앉아 옆에 앉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향수라도 뿌리지. 냄새가 아휴……."

"미안합니다. 오는 길에 일이 생겨서. 혹시 향수가 있으면 빌릴 수 있을까요?"

"없어요."

남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최기석은 하는 수 없이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노인을 업고 뛰느라 옷이 구겨지고 냄새가 뱄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선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잠시 후에 알게 되리라.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는.

최기석은 대기석으로 돌아가 인터뷰 준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안내 직원이 최기석을 포함한 다섯 명의 지원자를 호명했다.

가운데 자리에 앉자 무뚝뚝한 표정의 면접관들이 보였다.

면접관은 총 세 명이었으며 중앙에 야사다가 앉아 있었다.

"메이죠 클리닉 하반기 레지던트 과정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면접관의 말에 지원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