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66화 (165/407)

입성 (6)

"로이부터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네."

면접관의 말에 대기실에서 최기석의 옆에 앉았던 로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소개는 청산유수였다.

미국 명문 중 하나인 하버드 의대를 졸업했으며 하버드 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마쳤다.

이후 진정한 의사의 의미를 깨우치기 위해 일 년간 의료봉사를 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쉽지 않겠는데?'

최기석은 자세를 고쳐 잡고 허리를 폈다.

로이 다음으로 캐리의 소개가 이어졌다.

캐리 역시 조나단 못지않은 경력과 포부를 가졌다.

"미스터 최."

야사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위압감 넘치는 시선과 마주한 순간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닥터 송이 추천서를 써 줬네요?"

"네. 한국에 있을 때 제게 의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요?"

야사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야사다는 다시 지원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닥터 최. 자기소개를 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기석 최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의사가 됐습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뜻은 없었고 그저 의사라는 이름이 주는 명예와 보상을 원했습니다."

최기석의 소개에 면접관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다른 지원자들은 대놓고 고개를 내밀어 그를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살을 깎아 먹는 소개다.

"하지만 저는 의대를 졸업할 무렵 심부전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

"환자가 되어 보니 환자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제 손으로 치료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제 평생의 소원은 세계 최고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 그리고 환자와 스태프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큰 꿈을 꼭 메이죠에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최기석은 소개를 마치고 면접관의 표정을 살폈다.

느낌이 좋다.

다들 그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이다.

"뭐해요? 진행 안 합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럼 티나, 자기소개 해 볼까요?"

야사다의 지적에 우측 면접관이 티나를 응시했다.

이윽고 자기소개가 끝나고 개별질문 시간이 찾아왔다.

면접관들은 번갈아 가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지원자들은 침착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일부는 적당히 장난스런 말장난까지 섞었다.

과연 메이죠의 지원자라고 해야 할까.

"미스터 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했죠?"

"네. 맞습니다."

"이식수술을 받았는데 인턴 생활을 버틸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데요?"

좌측 면접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경과도 좋았고 제 나름대로 잘 쉬는 요령이 있었습니다."

"요령이 있는 게 아니라 일을 제대로 못한 거 아닙니까?"

"첨부한 서류를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면접관들이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가 말한 서류란 다름 아닌 장혁필의 추천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만약을 대비해 추천서를 받았다.

"설명이 재미있는데?"

야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말미에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를 꿈꾸는 괴짜지만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두렵다는군요."

"아, 네."

"한국에서의 근무 태도는 이만하면 증명된 것 같은데요?"

좌측 면접관의 말에 우측 면접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취미가 아주 특이하네요? 취미가 봉합이라고요?"

"크크크큭."

"뭐야. 저 사람."

좌측 면접관의 말에 지원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취미가 봉합이라니 제정신이라면 그리 적을 수 없었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항상 봉합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취미를 봉합으로 적었습니다."

"과연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를 꿈꾸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우측 면접관의 말에 지원자들이 다시 한 번 깔깔거렸다.

"그럼 미스터 최의 취미를 다 같이 볼 수 있을까요?"

"네."

"마릴린. 여기 봉합 세트하고 모형 좀 챙겨 줘요."

우측 면접관의 말에 여직원이 물품을 챙겨 최기석에게 건넸다.

최기석은 포장을 벗기고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였다.

끼기기긱.

쇳소리가 유난히 경쾌했다.

'두고 봐.'

모두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봉합이 끝난 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리라.

"시작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연속 봉합으로 모형을 꿰매 나갔다.

피부 조직을 바늘에 통과시키는 운침.

봉합사로 상처에 적당한 압력을 남기는 결찰.

이 두 가지 단계가 쾌속으로 진행됐다.

그의 신들린 솜씨에 면접관은 물론 지원자들까지 빠져들고 말았다.

찰칵!

최기석은 봉합사를 끊고 면접관들에게 모형을 내밀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세상에. 맙소사."

우측 면접관과 좌측 면접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짤막한 시간 동안 최기석은 연속 봉합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었다. 봉합의 간격은 균일했으며 하트 모양에는 조금의 어그러짐도 없었다.

그야말로 신기다.

"닥터 송이 사람을 제대로 데려왔군."

야사다가 흥미롭다는 듯 턱에 얼굴을 괴고 그를 응시했다.

사실 최기석이 빈틈을 보이면 가차 없이 잘라 낼 생각이었다.

송 교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그의 제자를 거두는 일은 엄연한 다른 영역이기에.

더군다나 어줍지 않은 실력으로 들어와 봤자 적응도 못할 테고 말이다. 그런데 연속 봉합으로 만든 하트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뭔가 느낌이 왔다.

이 친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마지막으로 공통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메이죠 클리닉의 최우선 가치가 무엇인지 동시에 말해 볼까요?"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입니다."

"로이부터 의료 생활을 하면서 본인이 가장 잘 돌봤던 환자를 말해 보세요."

최기석에게 자극을 받았던 탓일까.

조나단이 화려한 미사여구로 경험을 풀어놓았다.

다른 지원자들 역시 막힘없이 대답했으며 최기석은 최미순에 관한 에피소드를 꺼냈다.

"면접은 여기서 끝입니다. 돌아가기 전에 비밀 테스트 결과를 알려 드리겠어요."

"비밀 테스트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테스트 점수가 합격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30퍼센트가 면접이에요."

좌측 면접관이 웃으며 말했다.

반면 지원자들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면접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험이 벌써 끝났다니…….

드르르르륵.

회의실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서류 한 뭉치를 면접관들에게 건넸다.

'드디어 온 건가?'

최기석은 만면의 미소를 띠며 로이를 응시했다.

냄새가 난다고 그를 면박 줬던 이가 로이였다.

"최고점수를 차지한 건 미스터 최군요. 메이죠 최초로 비밀 테스트 만점을 받았습니다."

"제가요? 저는 특별히 한 게 없습니다만……."

최기석은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미국에 와서 그런지 헐리우드 식 제스처가 저절로 나왔다.

"지금부터 천천히 설명해 주겠어요."

좌측 면접관이 말을 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올해 메이죠의 면접은 예년과 달리 닷새간 진행됐습니다. 면접 시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었고 하루 면접인원은 30명밖에 되지 않죠. 그 이유는 다 비밀 테스트를 치르기 위함입니다."

"……."

"면접자 전원은 이곳에 오기 전에 환자를 만났을 겁니다. 그렇죠?"

"아……."

면접관의 말에 로이가 손을 이마에 얹었다.

다른 지원자들까지 탄식을 뱉어 냈다.

"그 환자들에게 보인 여러분의 태도가 비밀 테스트 결과입니다. 최하점을 받은 로이부터 살펴볼까요?"

우측 면접관의 시선을 받은 로이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로이는 환자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도 그냥 무시하고 갔었군요. 그렇죠?"

"……네."

"면접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는 건 백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환자와 대화하고 병원으로 안내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여기 적힌 의료봉사는 시간 때우기로 했나 봅니다?"

우측 면접관이 검지로 그의 지원서를 가리켰다.

"만점을 받은 미스터 최는 어떻게 행동했죠?"

"제 입으로 말해도 되는 겁니까?"

최기석은 쑥스러운 척하며 머뭇거렸다.

"미스터 최는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는 행동을 했어요. 자랑스러워해도 좋습니다."

"흠흠.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환자가 복통을 호소했기에 문진하고 복부를 촉진했습니다. 우하복통이 심하다고 했기에 충수돌기염을 의심했고 환자를 업고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미스터 최가 왜 만점을 받았는지 알겠습니까?"

"……."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이라는 메이죠의 가치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명심하세요. 환자가 없으면 메이죠도 없습니다."

이윽고 테스트 설명과 면접이 끝났다.

'올려 두길 잘했네.'

최기석은 회의실을 나오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치력과 카리스마의 덕을 톡톡히 봤다.

정치력으로 비밀 테스트를 간파했으며 카리스마로 면접관들에게 큰 여운을 남겼다.

후련한 마음으로 바깥에 나와 본관을 응시했다.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려는 꿈.

오늘 그 꿈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게 아닐까.

* * *

터벅. 터벅. 터벅.

깔끔한 복장을 한 사내가 메이죠 클리닉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원자 수석으로 합격한 최기석이다.

최기석은 휘파람을 불며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의진대에서 100일 당직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메이죠의 정식 스태프가 되었다.

시간이 참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 똑. 똑.

노크하고 인사과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온 합격자들로 내부가 북적거렸다.

"한 분씩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호명되신 분은 계약서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세요."

인사과 직원의 통제에 따라 합격자들이 회의실에 자리 잡았다.

'어디 한 번 볼까?'

최기석은 눈을 빛내며 계약서를 훑었다.

제아무리 메이죠 병원이라도 독소 조항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총칙부터 시작해서 근무시간, 근무범위, 급여에 관한 부분까지 살폈다.

다행히 문제 요소는 없었다.

'확실히.'

최기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류에서 눈을 뗐다.

가장 중요한 연봉이 한국과 2.5배가량 차이가 났다. 메이죠의 근무시간이 의진대에 비해 여유롭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차이는 더 큰 셈이다.

"다들 집중해 주세요."

인사과 직원이 단상에 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는 인사과 매니저 린지입니다. 우선 메이죠 클리닉의 하반기 레지던트 과정에 합격하신 여러분께 축하인사 드리겠습니다."

린지의 말에 지원자들이 박수를 보냈다.

"여러분이 메이죠에서 정식으로 일하려면 계약서를 작성해야겠죠? 지금부터 계약서의 세부조항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합격자들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계약서를 살폈다.

"마지막 항목은 의사 보험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의료소송에 대한 보험이죠. 여러분이 소송에 당한 경우 병원 차원에서 최대한 지원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매달 1,000달러 이상 납입하는 보험을 들어야 해요."

"……."

"질문 있는 사람 있습니까?"

린지의 질문에 합격자들이 침묵을 지켰다.

"좋습니다. 서명을 끝낸 계약서는 제게 주세요. 그리고 이제 가운을 받으러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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