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 열쇠의 반쪽(3)
“천적?”
순간 아바돈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위급 신격을 얻었을 뿐인 플레이어와, 최상위 신격을 지닌 7대 악마.
굳이 비교를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런데.’
녀석은 어째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아바돈은 불쾌함을 느꼈다. 세한의 말은 그저 허세.
혹은 만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단번에 이딴 공간 따위는 날려버린다.’
아까 올림포스를 빠져나가려 했을 때처럼 차원의 경계를 나누기 위해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손에 막대한 신격이 모이며, 단순한 능력치로는 발휘할 수 없는 기적에 가까운 힘이 뭉쳤다.
“음?”
이질감을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내부를 훑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뭔가가 몸을 스쳐지나갔다.
처음에는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손에 뭉친 신격이 점차 흩어지기 시작하자 무시할 수도 없었다.
“큭?!”
흩어지기 시작한 건 신격만이 아니다.
육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아바돈의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바돈은 본능적으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폴론이 정신을 차리려한다.’
아자젤에게 힘을 얻고, 악마로서의 격을 키운 이후에는 아폴론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폴론의 감정에서 태어난 아바돈이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주변에선 그런 아폴론이 조금 예민해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아바돈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 강할수록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법.
누구보다도 빛나던 태양신의 그림자인 아바돈은 태양의 빛조차 집어삼킬 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육체가 아바돈의 의지를 벗어났다.
조금씩 꿈틀 거리는 손가락은 아바돈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아폴론이 깨어나며 조금씩 육체의 통제권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분신도 만들 수 없었다.
“고작 중위 신격을 지닌 까마귀 따위가……!”
“말했잖아, 난 너의 천적이라고.”
아바돈의 눈앞에 새까만 공간이 열리며 세한이 걸어 나왔다.
그는 양손을 아바돈을 향해 뻗은 채, 천천히 움직였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바돈의 신력이 크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질투의 악마 아바돈. 확실히 너는 나보다 강하다. 아니, 강한 정도가 아니지. 제대로 싸우면 난 네가 손가락만 튕겨도 죽을 거야.”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7대 악마는 마계의 정점에 선 이들이다.
마계는 수많은 별에서 태어난 신들조차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장소.
그 이미르조차 정복할 마음을 먹지 않는 곳이 마계다.
최상위 신격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니까.
아폴론의 그림자에서 탄생한 아바돈은 본체인 아폴론보다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신력이 소모됐다고 해도 그리스를 대표하는 네 명의 신을 혼자서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근데 문제는 네가 아폴론의 그릇된 욕망에서 태어난 허상이라는 점이지.”
혹은 일그러진 꿈.
꿈이란 욕망의 본연이다. 이드라를 아바타로 삼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네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든 전혀 상관없다.”
아바돈의 근원을 건드린 시점에서 세한의 승리였다.
만약 아바돈이 이 세계에 끌려 들어오지 않았다면 조금 난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세한을 얕잡아봤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 세계는 이드라에게 빌린 거거든. 이곳에서라면 이드라에게 빌린 힘을 몇 배는 증폭시킬 수 있지.”
다만 한번 사용하고 나면 신격이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흐르지만, 아바돈을 쓰러트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지직, 지지직!
아바돈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폴론의 육체에서 강제로 아바돈의 근간을 뜯어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외신을 아바타로 삼았다고 해도 이런 게 가능하다고?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힘을 다루려면 그에 걸맞은 정신이 필요해!”
꿈과 환상을 다루는 신, 이드라의 신위라면 아바돈을 억제하는 것도 확실히 가능했다.
다만 그 힘을 사용하는 자가 세한이라는 점이었다.
아바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녀석들의 본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미쳐 버리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전승스킬도 아닌 권능 자체를 다룬다고? 너는 정녕 인간인 것이냐?”
세한은 이드라의 신위를 빌려 힘을 행사하고 있는 대리자였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이드라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신이라고 그 힘까지 호의적인 건 아니다.
“나라고 이걸 통제하는 게 쉬운 건 아니야. 시간도 걸리고 준비도 필요해. 애초에 이걸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면 네 앞에서 숨을 필요도 없었겠지.”
세한은 그렇게 말했지만, 애초에 저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세한이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뭐, 1회차에도 한번 했던 거니까.’
이미 세한은 1회차에도 아바돈을 같은 방법으로 쓰러트렸다.
이드라의 힘을 다루는 것도 익숙했다.
힘들었다면 1회차 당시가 힘들었지. 아바돈의 말처럼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갔었다.
2회차인 지금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바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실수야.’
아바돈은 자신이 그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거기다.’
녀석의 목적은 자신을 막는 게 아니었다.
“너도, 열쇠를 노리고 있었구나.”
아바돈의 말에 세한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움직여 아바돈의 몸에 집어넣은 ‘열쇠의 반쪽’을 천천히 밖으로 꺼낼 뿐이다.
완벽히 당했다.
허탈한 웃음이 아바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자젤을 언급한 건 아마 자신의 눈을 피하기 위한 연막이었을 테지.
“하지만 말이야.”
조금씩 금색으로 변해가던 아바돈의 눈이 자주색으로 물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신력을 어떻게든 이끈다. 아바돈의 근원을 잡아챈 이드라의 신위를 뿌리치며 어떻게든 움직였다.
‘팔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세한은 아바돈의 천적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는 7대 악마 중 하나였다. 비록 말단에 불과할지 몰라도 자존심이 있었다.
고작 허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음습한 욕망이 만들어낸 찌꺼기에 불과하더라도.
“질투의 악마를 얕보지 마라.”
콰콰콰콰!
아바돈의 팔이 움직이며 공간을 갈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마력과 신위의 방출.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세한이 만든 환상이 뭉개지고 찢어졌다.
“큭!”
세한은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간 마력의 칼날에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7대 악마는 허울이 아니었다.
부서지려는 세계를 가까스로 유지시키며, 허구 공간을 열고 가변형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한 사슬을 아바돈의 팔에 휘감았다.
“이까짓 걸로──!”
드드득!!
가장 단단한 금속이라고 할 수 있는 오리하르콘으로 코팅한 사슬이 단번에 끊어졌다.
그것이 아바돈의 팔을 구속한 시간은 고작 몇 초.
세한은 그 짧은 시간동안 신위를 움직여 아바돈의 내부에 잠들어 있는 ‘그’를 자극했다.
“그전에 네 놈을 죽여주마!”
아바돈의 오른팔에 새까만 불꽃이 맺혔다.
세한은 그것이 자신을 겨누기 전에 손을 움직였다.
“컥!”
퍼억!
아바돈의 왼팔이 움직여 녀석의 얼굴을 강타했다.
머리가 크게 젖혀지며 오른팔에 맺혀있던 검은 불꽃이 사그라졌다.
“알다시피 내 공격은 너한테 전혀 소용이 없잖아.”
그런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세한은 아바돈을 직접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네 상대는 아폴론이다.”
퍽퍽! 퍼퍼퍼퍼퍽!!
“커어억!! 컥!”
왼팔이 움직이며 쉴세없이 자신의 얼굴을 강타했다.
아폴론의 의식을 자극해 아바돈을 공격하게 유도한 것이다.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왼팔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먼저 머리를 두들겨 맞은 탓에 그조차 쉽지 않았다.
‘자, 그럼.’
세한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두들겨 맞고 있는 아바돈의 내부를 관조하며 열쇠의 행방을 찾았다.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는 기적의 파편.
그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게임을 시작하고 린을 열쇠로 만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기다렸던 순간이다.
제우스가 열쇠의 반쪽을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회수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함부로 이것을 노리다간 올림포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 이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바돈이 열쇠를 훔치는 순간을.
다만 초기의 계획과 달라진 점은 이드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훨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어.’
손을 움켜쥔다.
그리고 아바돈이 제우스의 몸에서 열쇠의 반쪽을 꺼냈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뒤로 뺐다.
“그만, 그만둬라! 나는, 나는 완전해져야한단 말이다!”
아폴론의 주먹에 두들겨 맞으면서 아바돈은 절규했다.
열쇠를 가져가야 이미르가 몸을 만들어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7대 악마이면서도 자신의 몸조차 지니지 못한 불쌍한 녀석.
아자젤이 녀석에게 힘을 줬던 건 이런 발버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한의 손에 하얗게 빛나는 둥근 구체가 쥐어져있었다.
제대로 형상을 취하지 못한 열쇠의 반쪽이다.
이걸로 자신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렇게 몸이 가지고 싶나?”
지금 세한은 아바돈의 근원에 접근한 상태였다.
계속된 힘의 사용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세한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아바돈의 신위를 움직였다.
아바돈이라 이름이 붙은 환상의 잔재를.
“그만……!”
세한이 만들어낸 세계가 부서지고 무너지며 아바돈의 근원이 점차 아폴론의 몸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젠 입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말도 할 수 없었다.
육체를 얻지 못한 아바돈은 이드라의 신위에 저항할 수 없었고, 세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아폴론의 몸에서 완벽히 분리됐다.
“세한!!”
환상 속에서 올림포스로 이동되자마자 아스트라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한은 아스트라이아를 향해 돌아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스트라이아의 옆에 서있는 자신의 인형을 보았다.
계획대로 자신의 인형은 아스트라이아를 데리고 이곳에 와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세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네놈에게 어울리는 딱 좋은 육체가 있지.”
이미 전신은 땀으로 축축했지만, 세한은 옅게 웃으며 아폴론의 몸에서 튕겨진 아바돈의 신위를 아스트라이아의 옆에 서있는 인형에게 집어넣었다.
“컥!!”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던 인형의 모습이 점차 아바돈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형의 손과 발목에 채워진 훈련용 팔찌가 작동하며 그의 몸을 지면에 처박았다.
“네, 네 녀석. 나를 어떻게 한 거냐.”
“몸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새로운 몸을 준 것뿐이다.”
아바돈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세한을 올려다보았다.
“단지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인형의 몸에 넣었을 뿐이지. 신위도 사용할 수 없을 걸?”
“이, 이 새끼가……!”
“오, 부들부들 몸이 떨릴 정도로 기쁘냐? 네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몸을 줬으니 고마워해야지.”
“이런, 이런 장난감 속에 나를 집어넣다니!”
신체 능력도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본래 신의 육체라 할 수 있는 아폴론의 몸을 쓰다가 보잘 것 없는 인형의 몸에 들어갔으니 제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겠지.
혹시 몰라 훈련용 팔찌로 구속했지만, 사실 그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하하하.”
무릎을 꿇고 굴욕감이 담긴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바돈을 보며 세한은 웃었다.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누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버러지가 되셨으니, 버러지면 버러지답게 고개를 숙이셔야지.”
그건 인형인 세한에게 아바돈이 했던 말과 같았다.
***
“고맙다.”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고 팅팅 불은 아폴론이 내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불어터진 찐빵 같았다.
“아뇨,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실책으로 큰 죄를 지을 뻔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난 얼굴을 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근엄하게 말하는 아폴론이었지만 얼굴이 만신창이라 모양새가 안 살았다.
아바돈의 몸은 결국 아폴론의 육체.
내가 녀석의 왼팔을 이용해 얼굴을 마음껏 후려쳤던 탓에 아폴론의 얼굴까지 박살이 난 것이다.
아폴론은 그것에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내심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욱 과격하게 때렸던 나로선 조금 민망해졌다.
“아바돈은 어떻게 됐습니까?”
“우선 구속하여 봉인해 둔 상태다.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7대 악마니까.”
“그렇군요.”
녀석을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당장은 제어수단이 부족해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올림포스에 가둬둔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까마귀자리의 김세한이여.”
아폴론과 나의 대화를 지켜보던 제우스가 천천히 말했다.
“열쇠의 반쪽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물론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정말인가!”
내심 노심초사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던 제우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은 비단 제우스뿐이 아니다.
황금 의자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열 두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아바돈에게 빼앗은 열쇠의 조각은 현재 내 안에 있었다.
열쇠는 본디 기적의 구현. 당연히 누구의 것도 아니다. 단지 제우스가 가지고 있었을 뿐인 물건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그냥 줍는 사람이 임자인 물건이다.
애초에 주인이 없는 거니까.
제우스가 내게 열쇠를 달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열쇠의 보관자를 제가 정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한 소녀를 보았다.
어색한 얼굴로 신들 사이에 서있는 금발의 소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