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 열쇠의 반쪽(2)
“네, 네 녀석 설마 이것을 노렸던 것이냐!”
“그럼 내가 왜 올림포스에 있었겠나.”
제우스의 양팔은 다른 분신들에게 잡혀 있었다.
아무리 제우스가 강해도 신력이 소모된 상황에서 3명의 아바돈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기습을 당한게 뼈아팠다.
가슴팍에 박힌 아바돈의 손은 제우스의 근원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버지!”
린의 모습을 한 아스트라이아가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아바돈에게 잡혀있는 터라 움직이지 못했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그 몸의 본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아바돈!”
“가뜩이나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하거든. 다만 아자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참고 있는 거다.”
오늘 내가 한 말 때문에 아바돈은 우리가 아자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덕분에 당장 우리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계에서 아자젤의 위치는 다른 7대 악마조차도 꺼릴 정도였으니까.
아자젤의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건 7대 악마 중 ‘오만의 죄’에 위치한 악마뿐이다.
뭣보다 아자젤은 아바돈에게 있어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찾았다.”
“크으으으!!”
제우스의 가슴팍에 박혀있던 아바돈의 팔이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올림포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지금까지 지켜온 ‘열쇠’의 반쪽을 찾아낸 것이다.
“받아가마.”
가슴팍에서 뽑힌 아바돈의 손에는 둥근 구체가 쥐어져 있었다.
연한 빛을 내는 둥근 빛 덩어리.
그것은 온전한 형태를 취하지 못한 열쇠의 반쪽, 세계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는 파편이었다.
“……아폴론은 어떻게 된 거냐.”
험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아바돈은 싱긋 웃었다.
“무사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녀석에게서 태어난 존재니까.”
“컥!”
“그러니까 너희를 살려두는 거다. ‘나’가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제우스가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 말처럼 아바돈은 지금 이곳에 있는 신들을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수천 년 간 있었던 장소를 떠나려니 조금 아쉽군.”
아바돈은 그렇게 말하며, 제우스의 몸에서 뽑아낸 열쇠의 반쪽을 자신의 몸에 흡수시켰다.
“그럼 언젠가 연이 되면 또 보도록 하지.”
“아폴론!”
아르테미스가 아바돈을 향해 소리쳤다.
아바돈의 한쪽 눈동자가 잠깐 금색으로 돌아왔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만으론 아폴론의 몸을 차지한 아바돈을 막을 수 없었다.
“큭!!”
아바돈이 올림포스의 아래로 사라지자, 분신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헤르메스는 쓰려지려던 몸을 바로 세우며 방금 아바돈이 뛰어내린 방향을 응시했다.
“아직 올림포스를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야. 당장 쫓아야겠어.”
“무리하지 마, 신력도 정상이 아니니 간다 해도 막을 수 없을 거야.”
당장이라도 아바돈을 쫓으려는 헤르메스를 아르테미스가 만류했다.
아바돈이 단순히 그들을 억류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신위를 사용해, 붙잡고 있는 신들의 신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둔 상태였다.
지금 상황에서 쫓는다고 해도 도리어 당할 뿐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지켜보고만 있어야 된다는 건가?”
“예.”
허탈하게 웃으며 하는 헤르메스의 말에 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당연히 주변의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헤르메스의 눈에는 미약한 분노마저 서리고 있었다.
“우리가 악마 하나에게 제압당했다고 조롱하는 것이냐?”
“설마요.”
“세한, 갑자기 무례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말하던 아스트라이아의 금안이 반짝였다.
정의의 여신으로서 본질을 판단하는 그녀에게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리라.
“잠깐만.”
“왜 그러지 아스트라이아?”
황당함으로 물드는 아스트라이아의 얼굴에 아르테미스가 물었다.
하지만 아스트라이아는 그런 아르테미스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돋움하여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만질 뿐이다.
“그래, 그런 거였군요.”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알 수밖에 없다.
린과 하나가 된 아스트라이아라면.
“애초에 당신은 여기 없었던 거였어요.”
아스트라이아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 말처럼 이곳에 있는 ‘나’는 인형에 덧씌운 환상에 불과했으니까.
***
“이제 바로 빠져나가면 되겠군.”
아바돈이 올림포스 영역을 나가기 위해서는 올림포스산 아래에 있는 입구로 가야만 했다.
올림포스를 보호하는 결계를 나가야만 외부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계 내라면 어디로 이동하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지만, 결계 밖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아바돈이라도 올림포스 영역의 결계를 뚫고 마계로 가는 문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드라가 세한을 올림포스 산의 정상이 아닌, 산 아래의 입구에 있는 장소에 게이트를 연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럼…….”
아바돈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정말 운이 좋았어.’
알데바란이 죽게 되며 아바돈은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다.
아스트라이아나 알데바란이나 올림포스와 관련된 신격.
당연히 제우스가 나설 수밖에 없을 테고 힘을 사용할 일이 생기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 틈을 노리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수월하게 일이 진행될 줄이야.
‘이제 이미르가 무엇을 할지 지켜만 보면 되겠군.’
이미르는 얻은 열쇠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열쇠 하나만으로도 시스템에 가할 수 있는 영향력은 상당했다.
지금 게임이 시작되지 않은 별을 강제로 시스템의 게임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본디 강한 힘을 지닌 태초의 거인에게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법칙마저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마계에 있는 열쇠까지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도리어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가 부서지려고 할 때도 녀석은 태연하게 있을 것인가.
“아자젤…….”
아바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눈에는 ‘질투의 악마’라는 이명에 걸맞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흥.”
눈가에 떠올랐던 감정을 지우며 아바돈은 들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다.
만약 등 뒤에서 튀어나온 창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콱!
“……호오.”
아바돈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차원의 경계를 베기 위해 들었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창이 쥐어져 있었다.
창은 아바돈의 등 뒤에 열린 새까만 공간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까마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분신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너만이 아니니까.”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척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7대 악마인 아바돈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도 세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숨는 제주가 있었구나.”
“나를 못 찾는 건 네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볍게 비웃는 세한의 말에 아바돈의 눈이 찡그려졌다.
“신위를 얻은 탓에 자신의 급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넌 알데바란이나 이런 것과 다르다. 그저 과분한 신격을 얻었을 뿐인 인간이지.”
“물론 그건 잘 알지. 당장 능력치만 봐도 너랑은 게임이 안 되니까 이렇게 숨어 있는 거 아니겠냐.”
잔잔하게 세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장소를 특정하기 힘들었다.
‘분신을 이용한 건가?’
이드라를 아바타로 삼았다고 하더니 정말 귀찮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아바돈.”
“아자젤이 말한 것인가?”
“비슷하지.”
말한 거면 말한 거지 비슷한 건 또 뭐란 말인가.
“본래 아바돈이라는 이름을 그리스어로 말하면 아폴리욘(Απολλύων)이라고 부르지. 올림포스 신들은 그냥 비슷한 이름이구나, 생각하고 넘어간 모양이지만 말이야. 애초에 너 늦게 태어났잖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
아바돈은 세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놈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태어난 악마지. 아폴론이 인간에게 실망하며 생긴 감정, 그곳에서 똬리를 틀고 네놈은 태어났다. 아폴론의 그림자에 불과한 넌 불완전한 존재였지. 간혹 아폴론의 몸을 차지하고 아폴론의 행세를 하며 돌아다닐 뿐이었어.”
그때는 그저 아폴론이 다른 인격 정도에 불과했다.
아폴론의 그림자, 아바돈이라는 이름도 없을 시절 그는 아폴론의 몸으로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그녀와 만났다.
나태의 악마, 아자젤을.
“아폴론의 욕망이자, 허망한 꿈의 상징과도 같은 너는 닿을 수 없는 존재였지. 아자젤은 말이야. 하지만 그 허망함이 그녀의 마음을 자극했던 거다.”
“……닥쳐라.”
“그림자이며 허상, 욕망이자 꿈에 불과한 너를 아자젤은 흥미를 느꼈어. 한낱 욕망 덩어리에 불과한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단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야.”
「어머나, 신기해라. 내가 조금 도와줄까?」
단순한 호기심.
아자젤이 아바돈에게 가진 감정은 그뿐이다.
그녀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아바돈을 악마로 만들었다.
아폴론의 그림자에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그것이 아바돈의 탄생이었다.
“아마 아자젤은 몰랐을 거다. 자신이 호기심으로 탄생시킨 악마가, 이렇게 성장하여 자신을 질투하고 있을 거라는 걸.”
그 후로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자젤의 힘으로 악마가 됐으며, 아폴론의 신체를 지닌 아바돈은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악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자젤을 앞지르는 건 불가했다.
허상에 불과한 자신은 진짜를 넘을 수 없었다.
아폴론도, 아자젤도.
질투의 악마를 쓰러트리고 그의 이름을 계승할 때조차.
“이미르는 그런 너에게 제안했겠지.”
그런 아바돈을 움직일 수 있는 말을 하나뿐이었다.
“너에게 진짜 몸을 만들어 주겠다고.”
열쇠를 사용한다면 아바돈의 진짜 몸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아바돈은 이미르의 말을 따라 올림포스에 있는 열쇠의 반쪽을 탈취한 것이다.
“──어떻게 아는 것이냐.”
아자젤이 그것을 말했을 리 없다.
아바돈의 존재는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약간의 호기심으로 만든 장난감에 불과할 뿐이니까.
“너는 대체 누구에게 그 말을 들은 거냐!!”
세한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마계 무투회에서 아자젤에게 들은 이야기였으니까.
아바돈은 1회차에서 제대로 된 몸을 얻었었다.
올림포스에 있는 열쇠의 반쪽을 탈환하고 그것을 이미르에게 건넸다.
그것으로 이미르는 온전한 열쇠 하나를 가지게 되었었지.
“열쇠 반쪽을 돌려주면 알려주지.”
“개소리.”
“그럼 협상결렬이네.”
드드드드,
땅이 흔들리며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너지는 건 아니다.
이건 환상이다.
‘세계를 괴리시켜 버리는 건가?’
아바돈의 몸이 떨어졌다.
이건 환상이지만 환상이 아니다.
세한이 지닌 꿈을, 그리고 환상을 구현하여 하나의 세계로 만든다.
물리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형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세한이 노린 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녀석의 말에 흔들려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쳐 버렸군.’
아마 녀석이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건 이걸 발동시키기 위함이었으리라.
기술의 규모로 볼 때 이건 일반적인 전승스킬과 달랐다.
아마 녀석이 가진 신력을 소모하는 ‘권능’에 가까운 스킬일 터.
당연히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힘들었다.
도리어 이 정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게 놀라울 정도다.
신의 권능이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물며 외신인 이드라의 힘이다.
인간이 정신이 쉽사리 견딜 수 없는 힘일 것이다.
“네놈은 능력치는 몰라도…….”
정신은 인간을 한참 초월했구나.
콰아아앙!!
떨어져 내리는 아바돈의 몸을 옆으로 거대한 허수 공간이 열리며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금속 기둥이 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규모로 힘을 사용하는 것도 이곳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땅이 꺼지고 용암이 솟으며 하늘이 뒤집히고 방금 꺼지 허공에 불과했던 장소가 대지가 된다.
세상이 계속해서 반전했고, 아바돈의 몸은 하늘로, 지상으로 끊임없이 내쳐졌다.
전부 환상이다.
허수공간을 이용해 땅을 위장하고, 바람을, 물을 재현하며 아바돈의 몸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허나 그뿐이다.”
아바돈의 몸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순식간에 열로.
쿠우웅!!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년한철을 주먹 한번으로 부수고 뒤집히던 대지를 발로 짓밟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서졌다. 용암이 치솟고 산사태가 일어나며 흙더미가 아바돈의 몸을 쓸었다.
“너와 나의 힘 차이는 고작 이런 환상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바돈은 7대 악마의 말단일지 모르지만, 알데바란보다 뛰어난 강자였다.
세한이 가진 모든 걸 사용한다고 해도 아바돈의 몸에 상처 하나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세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그를 쓰러트릴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너 혼자서 나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얌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아이고, 고맙기도 해라.”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용없다. 이 공간을 통째로 날려버리면 될 일이니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분신 하나하나가 본체의 90퍼센트에 이르는 힘을 발휘하는 아바돈이니 그 힘을 하나로 집중하면 이런 환상세계 따위는 단번에 날아가 버리리라.
“근데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세한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바돈이 이 세계에 들어온 시점에서 자신의 승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너 혹시 천적이라는 말 아냐?”
“……뭐?”
뜬금없는 세한의 말에 아바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그에게 세한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내가 네 천적이거든.”
7대 악마이자 최상위 신격을 지닌 악마인 그는 분명 압도적인 강자였다.
문제는 그가 꿈과 허상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