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짐승의 법 (1)
오딘은 푸근한 미소로 토르손을 반겼다.
‘제우스의 견제’ 탓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판도라의 항아리를 구해 왔다. 그 점에서 오딘은 가능성을 느꼈다.
‘명령에 따라 곧장 침투할 생각을 하는 담력, 그리고 침투할 경로를 짜는 머리. 행동력이 뛰어나군.’
행동력이 뛰어난 장기 말은 언제나 유용하다. 체스에서 퀸이 최강의 말인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던가.
오딘이 회색 외눈을 번뜩였다.
‘오디슨은 룩이다. 빠르고 강렬하지만, 내 뜻에 따라 움직이는 유연성이 부족하지. 하지만 이 녀석은? 오디슨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내 명이라면 곧장 수행한다.’
오디슨에게 충분한 견제가 되리라.
세상이 정말 체스처럼 먼저 잡아먹으면 이기는 상황이었다면, 오디슨을 아예 배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세상은 체스가 아니었다.
오딘은 제 뜻에 따르면서도 무작정 돌진하는 오디슨을 버릴 수는 없었다.
토르손이 고개를 조아렸다.
“높디높으신 분의 명에 따라, 이 항아리를 가져왔습니다.”
오딘이 보기에 토르손은 정말 하계 전사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오딘은 이런 우직한 전사들을 다루는 데 도가 튼 신이었다.
“잘했다, 토르손. 과연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구나!”
오딘의 한마디에 토르손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웃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푸들푸들 떨리는 입꼬리, 씰룩이는 광대뼈, 그리고 움찔거리는 눈썹만 봐도 빤히 알 수 있었다.
쉬운 전사다.
“모든 것은 오딘을 위하여!”
토르손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찬양에 담았다.
오딘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충성을 사는 건 적절한 칭찬과 적절한 보상이다.
그 보상이…….
“그 항아리는 네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 온 것일지라도.
토르손이 눈을 끔벅였다.
“이것이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널 강하게 해 줄 것이 들어 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그 항아리를 열어라.”
“…사람이 없을 때?”
약간 과하게 우직하긴 하지만, 나쁘지 않다.
오딘은 멍청하게 되묻는 토르손에게 답지 않게 덧붙였다.
“힘이란 위험한 것이다.”
토르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은 위험하다. 그건 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 위험에 주위를 휩쓸리게 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은 너처럼 강인하지 않으니.”
“…넵! 알겠습니다!”
토르손이 씩씩하게 말했다.
역시나 쉽다. 오딘은 손짓하여 토르손을 물렸다.
토르손은 정말 쉬운 전사다. 약간의 흐뭇함을 담아 살짝 띄워 준 것만으로도…….
“흐흐흐! 흐, 흐흐흐… 오딘께서 날 강인하다 하셨어……!”
보라, 얼마나 좋아하는가?
대전을 벗어난 토르손의 웃음소리가 옥좌에 앉은 오딘에게 들릴 지경이었다. 오딘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오디슨보다는 멍청하군.”
오디슨은 감정을 통제하는 데 능숙했다.
훌륭한 전사를 뛰어넘어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이들은 모두 그랬다. 꽤 머리가 좋았다. 그들을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이를 보자니, 오딘의 기분도 꽤 좋아졌다.
“그렇다면… ‘희망’을 빼앗긴 제우스 놈을 한번 살펴볼까?”
흘리드스캴프의 힘으로 델로스섬을 살폈다.
“음? 허, 크흐흐… 제우스, 그놈. 제 화를 이기지 못했군?”
델로스섬이 있던 자리는 푸른 바닷물만이 가득했다.
오딘은 키득키득 웃었다. 희망을 빼앗긴 게 화가 난 제우스가 섬을 박살 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빈틈을 제대로 찔러 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딘은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타락한 제우스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전생의 기억을 되짚었다.
“…멀린, 긴눙가가프를 탐냈었지?”
전생에서 제우스가 발할라의 숨통을 끊어 버린 일격은 마법이 가미된 공격이었다. 발할라 전체를 뒤덮는 번개와 찌꺼기들의 공습.
그 공격은 멀린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죽일까, 살릴까.”
오딘은 멀린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했다.
살려서 제우스를 견제케 하는가, 아니면 죽여서 위협을 지우는가.
흐음- 오딘의 침음이 깊어졌다.
“…그런데, 마지막에 마법을 누군가가 방해하려 했던 거 같은데…….”
오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은행장인가?”
막대한 황금을 쏟아부으려 하니 막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게다가 은행장이라면 기억이 안 남는 게 당연했다.
오딘에게 있어서 거금을 관리하는 은행장은 그저 하찮은 위치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오딘은 작은 단서를 놓쳤다.
한편, 항아리를 안고 나선 토르손은?
“으, 오딘께서는 언제 봐도 소름 돋을 만큼 강하시구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항아리를 꼭 껴안은 토르손은 오딘의 말을 되새겼다.
“주위에 피해를 줄 수도 있는 거대한 힘. 사람이 없을 때, 열어라…….”
흠- 곰 같은 토르손이 미간을 모으며 생각했다.
주위를 위험하게 할 수도 힘을 혼자서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오딘의 ‘깊은 뜻’을 깨우쳤다.
“사람이 아니면 된다는 거잖아?”
토르손이 가장 믿고 따르는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장한테 도와달라 해야지.”
신이었다.
쉬운 전사, 토르손은 오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했다.
* * *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토르손을 먼저 보내고 뒤늦게 돌아왔더니, 녀석이 날 찾아 훈련장에 왔다.
그러고는…….
“이거 어떻게 써야 하는 거야?”
대뜸 판도라의 항아리에 대해 물었다.
‘희망’은 위험한 힘이다. 토르손이 그걸 혼자 습득하더라도 어떻게든 못 쓰게 막을 생각이었다.
토르손은 나처럼 지독한 타락으로 이뤄진 놈이 아니니까.
그런데…….
“으음…….”
이건 좀 불안한 제안이다.
설마, 오딘이 내가 토르손을 도왔다는 걸 알아챘나?
힐끔 토르손을 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왜 그래?”
“…토르손, 하나만 묻지.”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설마?
등줄기를 따라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런 소리를 했겠어? 하고 넘어가기엔 이 바보가 상상 이상의 바보일 수도 있다는 게 떠올랐다.
“오딘께 내가 도왔다는 사실을 알렸느냐?”
“아!”
토르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다행이다. 저 반응은 알리지 않았다는 거다.
토르손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움츠러든 채 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미안, 대장. 내가 알려야 했는데…….”
붕붕 고개를 저었다.
이 바보 같은 놈은 뉘앙스라는 걸 읽을 줄 모르는 건가? 하계에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참 무식한 놈이다.
한숨을 푹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토르손, 알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토르손. 내가 돕기는 했지만, 네가 이뤄 낸 일 아니더냐? 나는 부하의 공적을 빼앗는 대장이 아니다.”
“대장……!”
토르손이 감격했다.
어쨌거나, 토르손이 ‘희망’을 내게 가져왔다는 건 굉장한 희소식이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불안을 완전히 지워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오딘께서 내게 도움을 청하라 하진 않으셨을 텐데……?”
그 오딘이라면 분명 내게 알리지 말라 했을 거다.
설마? 오딘도 토르손이 이토록 멍청한 짓거리를 할 거라곤 상상치 못한 건가?
토르손이 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께서 하시는 말은 언제나 깊게 생각해야 알 수 있는 법이지.”
“그 말은?”
“오딘께서는 내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항아리를 열라 하셨어. 그 말인즉슨…….”
토르손이 가슴을 쭉 펴고 으스대며 말했다.
“대장처럼 사람이 아닌 신에게 부탁하란 말이겠지!”
“허…….”
놀랍다.
토르손이 이토록 멍청해 빠진 놈일 줄이야. 혀를 내둘렀다.
이 바보는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엣헴- 헛기침을 하며 콧대를 하늘로 쭉 추켜세웠다.
오딘이 알았더라면? 분명 뒷목을 잡았을 희대의 바보짓이었다.
그래도 내게는 확실히 좋은 일이다.
“…과연, 오딘의 지혜가 어찌나 깊은지… 헤아릴 수 없구나.”
“그렇지?”
헤헤- 웃는 토르손.
그래, 그 깊은 지혜를 가진 오딘마저도 예상할 수 없는 바보라면 저렇게 으스댈 법도 하지.
“어쨌든, 오딘의 명이라면야. 내 널 도와주마.”
“오, 다행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피식 웃고서 훈련장의 문을 닫았다.
‘희망’이 혹여 도망갈까 한 짓이다.
“이제 열면 되는 거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이다.”
“아직이라고?”
안달 난 토르손을 내버려 두고, 주변에 마법진을 그렸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문양을 바닥에 그리자, 토르손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이게 끝이 아니다.
주머니에 있던 크로나를 꺼내 꽉 쥐어 녹였다.
부글부글, 금화가 쇳물이 되어 그려둔 마법진에 스며들었다. 황금으로 이뤄진 마법진이 번쩍였다.
“이건?”
“간단하게 배운 마법이다.”
“마법도 할 줄 알아?”
“이것만.”
그래, 오딘을 방해하는 마법만 할 줄 안다.
내 말을 어찌 알아들은 건지, 토르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심코 중얼거리는 소리, 과연, 오딘께서 일러 주신 건가!
아니다, 이 바보야!
하지만 내게 유리한 오해다. 그래도 이 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건 위험하다. 지금이야 오딘의 눈을 가리고자 수를 써 뒀다지만, 이 녀석이 떠벌리고 다니면 골치 아프다.
나는 오딘과 달리 토르손을 과대평가하지 않겠다.
“크흠, 토르손.”
“음? 뭔데, 대장?”
“너도 알겠지만, 오딘께서는 괜히 자랑하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으음, 그렇지. 대단하신 분이지만, 굉장히 겸손하시지.”
토르손이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오딘이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내게 유리한 오해다.
“그렇지. 그러니까, 괜히 오딘께서 내게 마법을 가르치셨느니 말하고 다니지 마라. 알겠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날 어떻게 보고…….”
토르손이 서운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널 어떻게 보기는. 바보 천지로 보지.
쯧- 혀를 차고, 마법을 발동했다.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다. 이미 마법진이 그 주문을 대신하니까. 제물을 바칠 필요도 없다. 이미 바쳤으니까.
마법은 세상을 뒤트는 힘. 권능이 모든 법칙의 위에 있는 권한이라면, 마법은 법칙의 틈새를 노리고 파고드는 불법이다. 제물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불법을 저지르긴 할 테지만, 뇌물을 풍성하게 바친다면? 세상의 법이 불법을 눈감아 준다. 그 뇌물이 바로 마법에 있어 제물이다.
가장 간단한 것은 욕망이 응집되어 세상을 비트는 황금. 그 외에도 귀중한 무언가를 바치거나, 혹은 세상을 더럽히는 불순분자를 바치면 된다.
“오오오!”
토르손이 감탄하며 항아리를 열었다.
푸른 빛이 항아리에서 뿜어져 나오고, 이전에도 본 적 있는 사과의 형상을 띠었다. 푸른 사과.
토르손이 그 사과를 쥐고 눈을 끔벅였다.
“이건?”
“삼켜라, 토르손.”
“…응.”
녀석이 사과를 씹는다.
그에 맞춰, 한 가지 마법을 더 발동한다.
제물은 세상을 더럽히는 불순분자. 동네 상인에게 보호세를 걷는 폭력배가 치안을 유지하는 도시 경비에게 살인마를 넘긴다면? 경비는 보호세를 걷는 것쯤은 눈감아 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게는 그 ‘살인마’가 무수히 많다.
찌꺼기를 바친다. 타락한 비다르를 먹어치운 덕에 남아도는 힘.
그 힘으로 토르손이 쥔 ‘희망’을 감싼다.
토르손의 의지에 따라 힘을 빌려줘야 할 ‘희망’. 그 ‘희망’에 관여한다.
토르손에게 힘을 빌려주는 건 맞다. 하지만 토르손의 의지에 따르진 않는다.
“크윽……!”
사과를 모두 삼킨 토르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함께 마법이 제대로 적용되었다는 걸 알았다.
토르손에게 힘을 빌려주지만, 그 허가는 내게 받아야 한다.
오딘을 찌를 히든카드가 ‘한 장 더’ 마련되었다.
다른 한 장의 조커?
“히, 힘이 넘친다! 으아아!”
토르손이 난동을 피우다, 진정하고 한숨을 들이켰다.
녀석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쨌어?”
“여자?”
“판도란가 하는 여자 말이야. 불쌍한 여잔데 설마… 섬이랑 같이 묻은 건 아니겠지?”
피식 웃었다. 설마.
“시그뉘에게 보냈다.”
내가 조커를 그리 쓸데없이 날릴 리가.
그녀는 오딘의 옥좌 다리를 갉아먹는 생쥐가 되리라.
옥좌가 흔들린다는 걸 오딘이 눈치채면?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