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선택 받은 게이머 (2) >
그 후, 정명의 팀은 여유롭게 승강전을 통과하며 1부 리그에 안착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1부 리그 통과가 저렇게 쉬운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무난한 진출이었지만,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능이면 재능, 경력이면 경력.
팀 프레이에 있는 사람들은 2부 리그에 있기 미안할 정도의 실력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팀이 승승장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명의 얼굴에는 시름이 가득했다. 얼마 전 협회에서 통보받은 권고사항 때문이었다.
‘어휴,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민원 넣었다는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야?’
PC방 리그와 같은 오프라인 리그에서부터 말이 나온 것을 보면 100% 경쟁자의 소행이었지만 누군지 까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민원을 받은 정명이 요청받은 일은 꽤 심플했다.
외국인 팀원 세 명중 한 명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
한국 리그에서 뛰는 건 문제가 없지만, 월챔에 가는 건 조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씨, 더러워서 진짜. 그냥 확 북미로 가버려?’
정명은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런 정명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에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정명의 옆에 앉은 사람은 조금 뜻밖의 사람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네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아...조금요.”
‘메리 이 여자가 웬 일이지?’
메리와 팀이 된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그녀와는 아직 어색하다.
그야 메리라는 사람은 무척이나 과묵한 사람이었고, 정명을 비롯한 팀원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정명은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 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가끔씩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별로 친하지 때문인지, 정명은 오히려 자신의 속마음을 술술 털어 놓을 수있었다.
“메리,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네.”
“정말 만약, 만약인데요. 우리가 북미로 팀을 옮기는 건 어떨까요?”
“북미 말인가요? 글쎄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냥요. 북미로 가면 월챔에 좀 더 쉽게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영어 되는 사람도 많으니 적응도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정명은 그렇게 말하며 멋쩍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자신이 한 말이지만, 조금 찌질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메리는 웃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일 없이,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명. 프로게이머의 최종 목표는 뭘까요.”
“그야, 우승이겠죠? 월드 챔피언십에서의 우승.”
“맞습니다. 당신,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승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가장 수준 높은 리그에서 활동하는 게 좋겠지요.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까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완곡한 거절의사에 정명이 또다시 뒤통수를 긁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항상 결론은 외국인 팀원을 한 명 빼고 한국인 팀원을 한 명 늘려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정명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겁니다.”
“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자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제가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잘 해낼 거라 믿습니다.”
‘뭣......아니, 낮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이 여자는. 아니면 혹시나 좋아하는 거 아냐?’
혹시나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했을까봐 허겁지겁 좌우를 살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다.
메리는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참. 혹시 들으셨나요? 이번에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다더군요.”
“예? 승부조작이요?”
“돈을 받고 일부러 경기에서 졌다는 모양이에요. 후후, 참 별사람 다 있지요. 고작 푼돈 때문에 창창한 게이머 생활을 포기하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 정명의 머릿속에는 피닉스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아니, 잠깐만. 이 녀석이 벌써 사고를 쳤어?’
충격적인 소식에 정명은 핸드폰을 켜고 허겁지겁 언벤에 들어갔다.
그런데 최근에 올라온 기사를 열심히 뒤졌음에도, 딱히 승부조작에 관련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메리. 기사 뜬 거 맞아요? 언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네? 그럴 리가. 네가 못 본거는 아니고요?”
항상 기품 넘치게 행동하던 메리가 답지 않게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구형 2G 폴더폰이었다.
“아 맞다, 나 스마트폰 없지...”
메리는 그렇게 혼잣말하며 정명의 핸드폰을 낚아채고는 원하는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이 여자 은근히 허당이네.’
그리고 5분 후.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메리가 정명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있네요. 다음부터는 잘 찾아보고 말씀 해 주시길.”
“그렇게 말씀 하셔도....”
기사 작성 시간을 보니 1분 전에 따끈따끈 올라온 기사다.
정명은 살짝 어이없어 하면서도 기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피닉스 선수,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돼]
정명이 과거에서 피닉스를 보내버렸을 때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었는데, 이번엔 어째서인지 다른 쪽에서 터졌다.
‘터질 게 터졌군. 생각보다는 빨리 터졌지만.’
익명의 투서가 승부조작을 고발한 후, 업계는 꽤나 혼란스러워졌다.
방송국과 협회 사무실에 경찰과 기자들이 들락날락 했고, 들려오는 소문들도 심상치 않았다.
명망 높던 감독이 이 일에 엮였다더라, 경찰들이 집에 영장을 들고 왔다더라, 피닉스와 같은 팀이었던 연습생이 주전으로 올라가고 싶어서 피닉스를 고발했다더라.
온갖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분위기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후.
피닉스가 빠져 공석이 된 TAQ에 한 게이머가 영입되었다.
#######
[적에게 당했습니다.]
“으악!”
쿠론이 회색 화면을 바라보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허무하게 킬을 내줬기 때문이었다.
-역시 유일환선수입니다. 로밍을 가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요!
-그렇습니다. 똥차 간 다음에 벤츠 들어온다고, TAQ가 아주 대단한 선수를 발굴해 냈어요!
피닉스가 빠진 후, TAQ의 빈자리에 들어간 것은 유일환이라는 게이머였다.
모든 잠재능력 스탯이 99인, 악마의 재능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게이머이기도 했다.
“아우, 저 녀석 왜 자꾸 바텀으로 로밍 오는 거야! 저기요, 아저씨. 미드 마크 좀 제대로 해 주실래요?”
“빼라고 핑 찍었잖아. 그러게 누가 타워 옆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으래?”
“하지만 한 웨이브만 더 먹으면 무한의 롱소드를 뽑을 수 있었다고요...”
쿠론이 힘없이 대답하자 정명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솔직히 쿠론이 못 했다기보다는 유일환 저놈이 잘 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젠장.’
데뷔한지 얼마 안 된 게이머가 이 정도의 성장을 보여주다니, 정명은 여태껏 이런부류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천재라고 꼽히는 중국의 우드나 송하니는 물론이고, 그 잘났다는 메이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여태껏 그런 게이머가 한 명도 없었다는 건 아니다.
딱 한 명.
유정명이라는 게이머가 그 정도의 성장을 보여줬었다.
-일환 선수의 불여우, 이번에는 탑 라인으로 달립니다!
-사실 다른 라인으로 로밍가는 거 외에 딱히 할 게 없거든요. 라인전에서 너무 말렸어요.
일환이 다른 라인으로 뻔질나게 다니는 이유는 꽤나 명확했다.
정명의 진화 안드로이드에게 탈탈 털렸기 때문에, 라인에 계속 붙박이 해 봐야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하긴 하지만, 아직 나한테는 안 되지.’
하지만 최후의 수단이었던 로밍도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글로벌 골드는 계속 벌어져만 갔다.
그리고 20분 뒤.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팀 프레이의 승리였다.
-마지막 경기 끝났습니다!
-GG. 이 정도면 월챔에 어떤 팀이 나가도 우승은 문제없겠어요!
“수고 했다. 다들 컨디션 좋았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네. 아저씨도요.”
“응응. 수고, 수고.”
경기에서 이기긴 했지만, 팀원들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반대로 이번 경기에서 패한 팀인 TAQ는 서로 잘 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서로의 모습이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그야 정명의 팀은 리그에서 이겨도 월챔에 못 가는 팀이었으니까.
“경기에서 이겨도 월챔에 못 간다니. 너무 더럽군.”
“맞아, 이건 사기야! 이럴 바엔 우리 확 북미 가버리자! 북미 애들 강냉이 털어버려!”
하니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주먹을 쥐고 붕붕 휘둘렀지만, 정명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리그도 끝났으니 집에 가서 쉬자. 좀 피곤하네.”
...........
연습이 진행되지 않아 평소보다 조용한 연습실 안.
월챔에 나가지 못한 정명은 소파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지만, 꼬마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습실 안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 맞다! 쿠론, 나 이것 좀 봐주라.”
“응? 뭔데?”
“이거? 학교에서 받은 숙제. 헤헤...”
하니는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애교를 부리며 쿠론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니의 팬들이라면 껌뻑 죽는, 특급 아이돌의 필살기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쿠론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숙제? 네가 하지 그래?”
“어려워서 그렇지. 너 영어 잘 하잖아. 좀 해주라, 이잉...”
“이잉? 이잉이라고? 하, 이게 어디서 비음을 내? 내가 정명이 아저씨도 아니고, 같잖은 네 애교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럼...이거 가져! 너 줄게!”
애교에는 안 넘어가지만 물질적인 선물에는 금방 넘어가는 쿠론이다.
쿠론은 하니의 소소한 선물과 함께 숙제를 받아들고는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웅.....너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니? 아무래도 대충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 문제 만든 사람보다 영어 잘 하니까 걱정하지 마.”
“어, 그런가?”
쿠론이 문제를 푸는 것은 막힘이 없었다.
1번의 답은 4번, 2번 답은 5번.
지문을 거의 읽지도 않는 것 같았지만, 쿠론은 답을 순식간에 채워 나갔다.
“와, 너 영어 되게 잘 하는구나! 몰랐어!”
“뭐래. 바보냐?”
무척이나 평화로운 연습실의 풍경이다.
하지만 정명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쟤넨 진짜 걱정 없이 산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 때, 정명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을 보니 협회 사람이었다.
뭔가 하고 전화를 받아보니, 눈이 번쩍 뜨일만한 소식이 들어왔다.
“네? 정말요? 우리 진짜 월챔 갈 수 있어요?”
-네. 소급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사실 다른 지역의 구단들이 협조를 해줬거든요.
“오오, 다른 지역 구단들이...”
-특히 북미 쪽에서 팀 프레이가 북미로 올까봐 아주 난리더군요. 하하. 아무튼 연습 열심히 하시길. 곧 기사도 나갈 겁니다.
협회 사람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정명이 손을 번쩍 들며 포효했다.
“됐다! 얘들아, 우리 월챔 갈 수 있다!”
“오잉. 그럼 연습해야 돼? 나 여행 계획 잡아 놨는데.”
“당연히 연습 해야지! 지금 여행이 문제야?”
한동안 끙끙대며 고민했는데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정명이 신이 나서 연습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에리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명아, 명아! 지금 SNS!”
“응? 나 지금 연습 경기 잡고 있는데. 한가하게 SNS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너야말로 지금 그거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빨리!”
에리가 보여준 것은 유일환의 SNS였다.
그리고 일환의 SNS를 본 정명은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기분을 느꼈다.
-외국인 제한이 풀린 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팀원들의 나이가 저렇게 어린데 월챔에 나갈 수 있는 게 맞나요? 노동법인가 뭔가 하는 무슨 무슨 법에 걸리는 거 아닙니까?
‘하, 이 새끼 좀 보게?’
기껏 팀 프레이가 월챔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사까지 내보낸 판인데, 대놓고시비를 건다.
정명이 열 받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던 하니는 과자 하나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오빠야. 우리 연습 해 말아?”
“말아. 텄다 이건.”
‘젠장, 관련 규정이 나오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2년 후였을 텐데.’
정명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메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 잘 될 거라면서요.”
정명이 괜히 시비를 걸었지만, 메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번 월드챔피언십이 스위스에서 열린다고 하더군요.”
“네, 그거야 뭐.”
“저와 같이 직관 가시지 않겠습니까? 기분이 무척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선물도 하나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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