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천재 게이머 (5) >
쉴 새 없이 연습하는 프로게이머들에게도 쉬는 날은 있다. 바로 경기 다음 날이다.
물론 몇몇 선수들, 어제 경기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일부 선수는 연습을 더 하겠다며 자발적으로 연습실에 남았지만 정명은 쿨하게 퇴근했다.
회사에서 할 일이 없는데 눈치껏 야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줬는데 굳이 남아서 연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찍 연습실에서 나온 정명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샛길로 빠졌다.
정명이 들어간 곳은 한 고급 일식집이었다.
“우와아, 이게 누구야. 세체미 유정명 선생님이잖아!”
방으로 들어가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과장스럽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이제는 아이돌로써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송하니였다.
“하하. 오랜만이다 하니야. 친구도 있네?”
“응! 벨라 언니야. 한국말도 되게 잘 한다? 암튼 서로 인사해!”
하니의 말에 벨라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정명 또한 얼떨결에 인사했다.
무척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으므로, 정명은화제를 서둘러 바꿨다.
“어제 구경 왔었다며? 잘 놀았어?”
“응. 재미있었어!”
“그래도 좀 아쉽네. 이기는 모습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냐, 아냐! 엄청 잘 했어. 역시 오빠야가 최고였다! 오빠가 진 건 다른 팀원들이 못 해서였어!”
“하긴. 난 잘 했는데 못하는 팀 때문에 진 거지. 안 그래?”
“맞아, 맞아. 킥킥.”
하니와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킥킥대던 정명은 이 자리에 한 사람이 더 있음을 깨닫고는 벨라에게 말을 붙이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정명과 하니가 웃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벨라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정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안 돼. 저 오빠는 이미 품절남이야. 언니의 뜨거운 마음은 잘 알겠지만...”
하니는 무슨 착각을 했는지 벨라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이상하네. 경기장에서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는데...”
“응? 뭐가?”
“아냐. 내 착각이었나 보다. 음식이나 빨리 시키자.”
“응? 무슨 착각? 궁금해! 빨리 말 해봐!”
착각이라고 둘러댔지만, 하니는 질척거리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결국 벨라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메이커를 솔로킬 낼 때, 난 아자토스가 부스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거든.”
“그래? 특이하네. 보통은 경기를 볼 텐데. 그래서?”
“그 때...뭔가 아자토스의 모습이 소름이 끼쳤다고나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소름이 끼친다고? 이 오빠가?”
하니가 정명의 볼을 죽죽 늘어트리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벨라는 머쓱하게 웃었다.
“음, 역시 내 착각 이었나봐. 아, 음식 나왔다.”
두 사람과의 만남은 꽤나 유쾌했다.
하니는 수다쟁이처럼 어제 있었던 경기에 대해서 떠들었고, 정명은 적당히 맞장구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천재라고 떠들고 다니더니 꼴좋다. 뭐? 내 위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고? 푸하하!”
“걔가 그런 말도 했어?”
“엉. 하여튼 어린 나이에 천재라고 떠받들리면 꼭 저런다니까. 그보다 이제 오빠도 막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여자 팬들도 생기고 그러는 거 아냐? 푸히히.”
“그러겠냐. 예전에 있던 팬클럽도 망한 판에.”
2년 쉬었더니, 기껏 만들어져 있던 정명의 팬카페는 유령카페가 된지 오래였다.
혹시 벨라가 다시 만들어주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저 표정을 보니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뭐 어때. 곧 다시 생길 텐데. 그보다 이것 봐봐. 커뮤니티에 온통 오빠야 얘기 뿐이다?”
하니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충격! 메이커가 세체미의 자리를 내어주다?]
[탑 라인에서 미드라인으로 완벽하게 적응한 아자토스. 그의 다음 타겟은?]
커뮤니티에서는 하니의 말대로 온통 어제의 경기에 대한 기사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정명이 빠르게 기사를 읽었고, 이어서 벨라가 핸드폰을 가져가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묵묵히 커뮤니티의 기사를 읽던 벨라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기사에 달린 댓글을 가리켰다.
“으음, 여기 3초면 태세전환 된다는 곳 아니었어? 아직 세체미가 아자토스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잖아. 솔로킬 한 번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가 한순간에 무너지면 그건 그것대로 억울한 일이지.”
메이커가 솔로킬을 당했음에도 SKS는 여전히 최강의 팀이었고, 메이커 또한 여전히 세계 최고의 미드라이너였다.
“뭐, 내가 더 좋은 성적을 내면 바뀌겠지.”
그리고 그 후, 몇 개월이 지났다.
.........
프로게이머든 다른 스포츠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면 일상생활을 일정부분 포기해야만 한다.
정명 또한 연습실, 집, 연습실, 집 코스를 반복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에리의 얼굴은 언제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였고, 돈을 벌어도 통장에 있는 돈을 쓸 시간조차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습하는 시간에 비례하여정명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바라마지않던 팬클럽 또한 다시 부활했다.
정명은 오랜만에 다시보는 팬클럽 창을 띄웠다.
[팬덤 결성 Lv 1]
*게임 매니아라면 당신의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대중적이지는 못합니다.
-연봉이 소폭 증가합니다.
-광고가 들어올 확률이 소폭 증가합니다.
-다음 레벨로 올라가려면 1부 리그 준우승 급의 이력이 필요합니다.
-소수의 열성 팬이 있습니다.
‘팬클럽 레벨 1이라. 아주 소박하게 시작하네.’
그래도 팬클럽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영광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정명은 오늘도 자신의 팬클럽 웹 페이지에 들어가서 출석 도장을 찍었다.
[ABC 게이밍의 외로운 소년가장, 유정명의 팬카페입니다.]
‘소년가장이라. 썩 달가운 별명은 아니지만...’
팬클럽 카페의 이름은 소년가장. 정명에게 붙은 별명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리고 정명이 왜 소년가장인지를 증명한다는 듯, 정명이 기록한 최근 경기의 스코어가 배너로 떠 있었다.
5/2/7 딜량 1위 (패)
3/1/5 딜량 1위 (패)
0/1/6 딜량 1위 (패)
......
배너에는 높은 성적을 기록한 스코어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좋은 KDA를 기록했음에도 결과는 대부분 패배.
혼자 슈퍼 플레이를 펼친다고 해도 팀이 받쳐주지 않아 패배를 기록한 경기들이었다.
그야말로 팀의 소년가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쩝. 이건 여기까지 보고 경기나 준비 하자. 이제 시간 없다.’
팬클럽 사이트에 들어가 행복회로를 돌리던 정명이 현실로 돌아왔다.
정명은 지금 무척이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었고, 팬사이트를 둘러본 것은 그 스트레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황급히 달려와서 정명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라서 뿌리치려고 했으나, 평소에 자주 보였던 팬인 것을 깨닫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응원 해 드리려고요. 오늘은 꼭 이겨요. 알았죠? 오늘 지면 끝이에요!”
“하하. 나도 그러고 싶네요.”
“호종이 그 놈만 없었더라면 진작 월챔 올라갔을 텐데...빨리 다른 팀으로 옮기시는 건 어떤가요?”
사진 정도는 찍어주려 했는데 생각보다 말이 길어진다.
잠깐 시계를 한 번 쳐다본 정명은 곧장 말을 끊었다.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앗, 죄송합니다. 관객석에서 응원 할 게요. 꼭 월챔 가세요!”
‘이상한 소리를 하네. 누군 지고 싶어서 자꾸 지냐고.’
월드챔피언십.
일명 월챔은 프로게이머들에게는 명예로운 무대이며, 선수들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명의 팀 ABC 게이밍은 월드챔피언십 선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어휴, 미치겠네. 하필 상대가 KTA냐...”
“넌 무슨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우는 소리를 하냐. 정신차려 임마.”
“하지만 KTA와의 역대 전적이...어휴.”
KTA에게 이기기만 하면 정명의 팀은 월챔에 진출할 수 있었다.
원래 ABC 게이밍은 진작 떨어져 나갈 팀이었으나, 정명 혼자서 여기까지 끌어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 시작 전.
한 팀원이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며 팀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소심했던 팀원이었는데, 무척이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멘탈이 완전 나가버린 듯 보였다.
“이번에도 지면 또 악플이 왕창 달릴 텐데...정명이 넌 좋겠다. 욕먹기는커녕 소년가장이라며 동정표 받으니까.”
“......”
‘왜 나한테 시비야? 쯧, 지가 욕먹는 건 자기가 못해서 그런 거지 왜 나한테 화풀이냐고. 오히려 팀을 여기까지 끌어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징징거릴 거면 그냥 때려 치고 미드 오픈하던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명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이라는 게 무척 중요한 이 사회에서, 특히 빠른년생까지 따져가며 서열을 가리는 팀의 분위기상 형에게 쓴 소리를 한다면 곧장 말다툼이 일어날 테니까.
그런데 김호종이 징징대는 모습을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던 정명에게 메시지 하나가 떴다.
[패배자의 헛소리]
*패배자의 헛소리를 계속 지껄이게 놔둔다면, 다른 팀원들 또한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팀원의 집중력이 10% 하락했습니다.
-모든 팀원의 스탯이 5% 하락했습니다.
‘쯧, 결국 한판 붙어야겠는데.’
그동안은 정명이 팀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나올 수가 없었지만, 새로 들어오게 된 이 팀에선 그렇지 않았다.
정명은 다섯 명 중 서열이 3위였고, 이것은 실력 순이 아닌 나이순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명은 결국 징징거리고 있는 호종과 일기토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아 거 조용히 좀 해요. 애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아요?”
“뭐, 뭐? 너 그게 형한테 할 소리야?”
호종이 화를 냈으나, 정명 또한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팀원들까지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정명은 김호종을 빠르게 제압하기로했다.
‘젠장, 이거 쓰기는 싫었는데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초월을 사용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한 발자국 넘어섰습니다!
-정신력이 70 이하인 사람은 당신의 앞에서 얼굴조차 들기 힘들 것입니다.
그 순간, 짜증을 버럭버럭 내던 호종은 무언가 소름끼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자연스레 눈을 깔았다.
정명과 지금 마주보며 싸우기엔 정명은 지금 너무 무서워 보였으니까.
“야, 너 좀 닥쳐요. 그렇게 징징거릴 거면 다 때려 치고 미드 오픈하던가. 예?”
“어....어...”
그렇게 분위기를 확 휘어잡자,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플레이어 김종수의 스탯이 회복되었습니다.]
[플레이어 한진수의 스탯이 회복되었습니다.]
[플레이어 장영록의 스탯이.......]
모든 팀원들이 회복되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플레이어 김호종이 공포 상태에 빠졌습니다.]
-집중력이 20% 하락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10% 하락했습니다.
‘이런 씨....진작 방출 했어야 할 놈인데, 감독 놈은 친목질이나 하고 있고. 총체적 난국이다 정말.’
월드챔피언십 결정전, 그리고 KTA.
가뜩이나 어려운 상대인데 벌써부터 맛이 간 사람이 있다.
정명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끙끙댔으나, 결국 조금 마음을 놓기로 하고 무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
[적을 처치했습니다.]
-정말 감탄만 나오는 플레이입니다. 천재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메이커에다가 이 선수까지. 해외의 구단주들은 어째서 한국에만 저런 인재가 있냐며 참 억울해 하더군요. 하하!
해설자들이 정명의 플레이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정명이 갱킹 온 정글러를 역으로 따내며, 역습의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의 슈퍼플레이보다 한 번의 실수가 더 치명적인 법.
경기 시작부터 멘탈이 우려스러웠던 호종이 한타 직전에 잘렸다.
그리고 그 결과 45분까지 질질 끌리던 게임은 허무하리만치 끝이 나버렸다.
-GG!
-KTA가 월드챔피언십 결정전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독일행 티켓을 거머쥡니다!
스코어는 3:2.
정말 한 끗 차이의 승부였다.
.......
“쟤네 셋이서 나 물러오는데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포지션을 잘 잡았어야죠!”
“거석이 궁써서 그냥 나한테 박아버리는데, 내가 별 수 있나? 서포터인 네가 날 지켜줬어야 하는 거 아냐?”
경기 후.
선수들이 험악하게 싸우며 팀 분위기가 살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한대 칠 듯 싸우고 있었지만,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남 탓 싸움과 정치질. 그것은 이 게임의 필수요소 같은 것이었으니까.
다이아에서 마스터 리그로 랭크가 올라도,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어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물론 게임 내에서 캐리를 하고 있던 정명은 그 정치질에서 한 발짝 비켜설 수 있었지만.
“정명아, 수고 했다. 이제 가서 쉬어라.”
“후....네.”
코치가 팀원들을 위로하려 애썼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다.
정명은 한숨만 푹푹 내쉬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KTA도 못 이기는데 SKS를 어떻게 잡아. 무리지, 이 팀으로는.’
정명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게임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닌, 팀 게임이라는 것을.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지금 쯤 애들이 많이 컸을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정명이 지금 떠올리고 있는 영입 후보는 싸게 부려먹을 수 있으면서 실력이 좋은,그런 녀석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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