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천재 게이머 (6) >
월챔 결정전에서 탈락한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정명은 오랜만의 휴가를 갖게 되었다.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거실에 누워 한가롭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을 갖는 것도, 월챔을 가지 못하는 것도 전부.
그리고 그런 정명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정명의 핸드폰에는 정명을 찾는 연락이 수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너 팀 나간다는 거 진짜야? 방출당한 건 아니지?
-안녕하세요. 팀 에바스의 코치 이성일입니다. 시간 되시면 오랜만에 밥 한 끼 같이 하시죠.
-형! 어떤 팀으로 가시는지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연락이 많이 오는 걸 보니, 기사가 떴나 보군.’
정명이 ABC게이밍과의 계약을 끝냈다는 기사가 뜨자마자 연락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구단측에서는 팀의 에이스인 정명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정명의 의지가 확고하여 결국 놓아주었다는 그런 내용의 기사였다.
하지만 정명은 수도 없이 오는 톡과 문자를 전부 무시하며 답장을 하지 않았다.
딱 하나만 빼고.
-지금 거의 다 도착했다!
?알았어. 바로 마중 나갈게.
정명은 답장을 보내자마자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밖에서 기다리길 5분.
택시 한 대가 정명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느라 고생했어. 짐은 나 줘. 무겁겠다.”
정명의 집을 찾아온 것은 쿠론과 에리였다. 에리가 코치로 있는 팀 또한 월챔에서떨어졌기에 시간이 남아 한국으로 놀러 온 것이다.
그리고 둘은 한국에 있는 동안 호텔 대신, 정명의 집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셋은 이미 가족 비슷한 관계였으므로, 이게 더 편하다고 느꼈으니까.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와. 환영해.”
“오, 여기가 아저씨 집이에요? 확실히 조금 후진 것 같은...”
“야, 서울은 땅값 엄청 비싸거든? 이 집도 몇 억 줬어 이것아!”
둘이 한국으로 온다기에 청소하느라 3일을 부지런히 보냈건만 저런 반응이라니.
정명이 발끈하자 쿠론은 농담이라며 킥킥 웃었고, 옆에서 조용히 있던 에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월챔을 못가고 이렇게 집에 처박혀 있다니.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에리의 말에, 쿠론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특히 마지막 경기는 엄청 아까웠어요! 아저씨는 잘 했는데...”
“팀이 못했지? 나도 알아. 난 잘했는데 팀이 쓰레기였어.”
“...저기. 스스로 그런 말하기 좀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쿠론은 이내 뭐가 그리 신기한지 집안 이곳저곳 둘러보며 집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리와 둘이 남게 된 정명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 어른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ABC 게이밍 기사 뜬 거 봤어. 우리는 유정명 선수를 잡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선수의 의견을 존중해서 어쩌구저쩌구 하던데.”
“아하하. 봤구나. 기사엔 그렇게 적혀있긴 한데, 사실은 엄청 싸웠지. 내가 그냥 팀 나간다니까 사회생활 그따위로 하지 말라며 엄청 지랄하더라. 어차피 안 볼 사람이라 이거지.”
“어휴 꼰대 같으니. 네가 빠지면 중하위권으로 내려올 팀인데, 주제를 모르네. 에이스의 중요성을 몰라.”
“누나 팀도 에이스 한 명이 나갔다고 했던가?”
“그렇지. 1년 전만 해도 월챔까지 나가는 잘 나가는 팀이었는데, 에이스 한명 빠지니까 정말 거짓말처럼 성적이 내려가더라. 겨우 한 명 빠진 건데...”
누가 업계에 있는 사람들 아니랄까봐, 둘은 만나자마자 게이머 업계의 뒷담화를 나누며 낄낄댔다.
누구는 스캔들 때문에 성적이 내려갔다더라, 어떤 팀은 월급이 밀렸다더라, 어떤팀은 선수를 몰래 빼왔다더라.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에리는 이내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그건 뭐야?”
“다른 사람들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네 얘기를 해 봐야지. 자, 받아.”
에리가 건네준 서류에는 기존의 팀을 분석한 데이터였다.
현직 코치답게 일반인이 알기 힘든 자료까지 다루고 있었는데, 요즘 중국이 게임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심상치 않다는 정치적 요소의 분석부터, 여러 구단의 재정상황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유출돼서는 안 되는 1급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였다.
“이런 거 맘대로 꺼내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유출하면 중징계야. 그러니까 여기서만 봐. 어디 가서 내가 이런 거 보여줬다고 얘기하지 말고.”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이런 것은 사실 정명에게 별로 필요가 없다. 정명은 다른 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새 팀을 꾸릴 것이니까.
머쓱해진 정명은 뒤통수를 긁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미안. 내가 얘기 안 했나? 나 팀을 새로 만들 생각이야. 내가 남 밑에 있을 성격이 아니라서.”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아니, 자세히 말해봐. 팀을 만든다고? 맨땅에서 새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에리는 정명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정명의 결심은 확고했다.
특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팍팍 풍기자, 될 대로 되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럼 생각해두고 있는 사람은 있어? 제대로 된 사람 뽑으려면 돈이 많이 들 거야. 잠깐만. 여기 기존 선수가 받고 있는 연봉 데이터도 있을 텐데...”
에리가 다시 가방을 뒤적거리자, 정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찾아도 돼. 실력 좋으면서도 저렴한 가격에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마추어들을 말 하는 거야? 그건 거의 복권이나 다름없는데?”
“그야 그렇지. 그런데 100% 당첨되는 복권이 있어. 그것도 바로 여기에.”
“엥?”
에리는 혹시 자신을 얘기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요즘은 다이아 리그에서도 헉헉댄다던가, 요즘 젊은 애들 무섭다던가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하며 변명하기에, 정명은 푸하하 웃어버렸다.
“하하. 30살 넘은 아줌마한테 애들이랑 싸우라고 하라고 안 하지. 그건 노인학대라고.”
“뭐얏!”
정명은 멱살을 잡을 듯 째려보고 있는 에리를 지나쳐, 방을 구경하고 있는 쿠론에게로 다가갔다. 쿠론은 신기한 듯 김치냉장고를 열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덜 큰 거 같긴 한데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정명은 쿠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고, 슬슬 사춘기에 접어든 쿠론은 정명의 손을 탁, 쳐내며 인상을 썼다.
“잠깐만요. 나 이제 애 아니거든요?”
“애가 아니라고?”
“그래요. 이제 저는 다 컸어요. 당신처럼 고등 사고를 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요.”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꽤나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정명은 그에 굴하지 않고, 쿠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너 나 좀 도와줄 수 있니?”
“뭐예요 뜬금없이. 뭐 상관없지만요.”
“뭔지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아저씨가 저한테 이상 한 거 시키진 않을 거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명은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에리에게 V자로 신호를 보내며 웃었다.
“한 명 확보했어.”
“......후, 맘대로 해. 그럼 다음 사람은 누군데? 아직도 세 명이나 더 필요 한데.”
“금방 영입할 수 있을 거야. 아직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이었으나, 에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두 모녀는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무척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정명은 초저녁부터 뻗어버린 에리와 쿠론을 집에 둔 채, 밖으로 나갔다. 다른 팀원 후보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스케줄을 끝내자마자 정명에게 불려나온 하니는 황당하다는 듯 정명을 돌아봤다.
“응? 프로게이머 해볼 생각 없냐고?”
아역 배우, 뜨고 있는 아이돌, 최근 가장 주목받는 연예인.
하니가 이력서를 쓴다면 경력 란 안에 들어갈 말들이었다.
때문에 하니는 정명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프로게이머 컨셉으로 가는 거지! 그렇게 하면 분명 잘 먹힐 거라니까?”
“으음. 오빠야. 내가 겜순이인 건 맞는데, 프로게이머 아이돌이라니. 그건 좀 오바 아님? 그리고 나 그 게임 잘 못 하는데.”
“연습하면 돼. 너에게는 재능이 있어.”
“우음, 글쎄. 쉽게 결정할 수는 없겠는걸.”
단숨에 수락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상식적이다.
하지만 정명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하니를 압박했다.
“야, 너 소속사에서 이거 분명 흥한다던 영화, 클레멘타운에 출연하지 말라고 했던 거 누구야.”
“그거야...오빠지.”
“네가 연기력 때문에 고민할 때, 차라리 배우 그만두고 아이돌 하라고 밀었던 건?”
“그것도 오빠.”
“유명 작곡가가 준 곡이 표절곡이라는 걸 잡아냈던 건?”
“그것도....”
“그래서, 내 말 듣고 뭔가 잘 안된 적 있어?”
“.....”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정명은 그야말로 예언하듯 어디로 걸어야 꽃길이 나오는지 얘기해 주었으니까.
“후우움. 그럼 일단 게임 좀 진지하게 해 보고 다시 연락 줄 게. 프로게이머라는 게 일단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래. 혼자 몇 번 해 봐. 지금 랭크가 어디랬지?”
“골드. 근데 시간이 없어서 몇 번 안 해봤어.”
그 말을 들은 정명은 하니의 스탯을 열어보았다.
[송하니]
피지컬 (56/97)
정신력 (40/92)
오더 (34/90)
판단력 (56/97)
*특성 : 천재
*미분배 스탯이 남아있습니다.
‘으음, 이 정도면 당장 데뷔시켜도 무리가 없겠지만, 너무 몰아 부치면 역효과가 나겠지.’
정명은 그럼 너 혼자 게임 좀 해보라는 말을 끝으로 하니와 헤어진 후,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썰렁했던 평소와는 달리,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
며칠 동안 정명은 바쁘게 돌아다녔다.
오락가락하던 하니는 물론이고 지금 북미의 2부 리그 구단에 속해 있는 메테오에게까지 연락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팀의 코치자리는 물론 에리가 맡을 예정이었다.
“명아, 잠깐만.”
“왜?”
“TBC의 메테오는 상관없는데, 송하니라는 애도 그렇고 쿠론도 그렇고...너무 어린 거 아냐?”
“코흘리개 꼬맹이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 내가 생각하는 팀만 꾸려지면, SKS 잡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아니, 그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이 제한 같은 건 없냐는 거야. 그야 저 아이들은 아직 의무교육을 받는 중학생이니까.”
에리가 꽤나 당연한 지적을 했지만, 이미 규정집을 찾아본 정명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없어. 아직은.”
“아직은 이라니...”
“그거 알아? 리그가 처음 생겼을 때엔 경기 중에 채팅도 가능했어. 하지만 지금은 금지되어있지. 나이 규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하면 돼.”
법이나 규정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차곡차곡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나이 규정이 없었으므로, 정명이 팀원을 등록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에리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이내 TV로 눈을 돌렸다. TV에서는 월드챔피언십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역시 메이커! 견제가 탁월합니다!
-괜히 세체미라 불리고 있는 게 아니죠. 아, 이 말을 하면 한국에 있는 유정명 선수가 좀 섭섭해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와, 되게 잘 하네. 그런데 아저씨가 저런 사람한테 솔로 킬을 냈다고요?”
“흠, 더 칭찬해도 돼. 내가 좀 잘 하긴 하지.”
“쯧쯧, 뭐예요. 완전 재수 없어.”
정명과 쿠론, 그리고 한국의 모든 게임 팬들은 어차피 한국이 이기겠지 생각하며 마음 편히 경기를 관람했다.
그런데 그 때, 다른 라인에서 솔로킬 소식이 들려왔다.
-아, 이러면 안 좋은데요.
-크림파이 선수, 조금 더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에엥?”
당연히 한국이 이길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메이커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헉헉거리며 버티기에 바빴고, 메이커 또한 반반 싸움을 하며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 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진짜 잘 하는데요?”
“그러게. 중국에 저런 팀이 있었나?
맥주만 홀짝거리고 있던 에리도 어느새 TV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상황은 SKS에게 점점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걸 밴에서 풀어주면 안 됐어요. 포킹운영이 아주 수준급이에요.
-이건...역전이 불가능하네요.
-GG.
“어라. SKS가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