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천재 게이머 (4) >
리그 개막전 당일.
경기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앞에는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모두 개막전을 기대하며 모인 팬들이었다.
그리고 개막전 표를 겨우 구하여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김인석 또한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와, 점심 먹고 바로 달려왔는데 벌써 줄이 이렇게 길단 말이야? 미치겠네.”
“프로게이머 친구라도 있었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너 혹시 그런 거 없냐?”
인석은 그런 거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쳐다보며 시간을 때우던 것도 잠시.
기다리는 것에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 일행이 주위를 둘러보며 지루함을 달래기 시작했다.
“야, 저기 모자 눌러쓰고 있는 저 여자 되게 귀엽지 않았냐?”
“이건 누가 군바리 아니랄까봐 휴가 나오자마자 여자 타령부터 하고 있네. 작작해 임마.”
인석은 한심하다는 듯 그의 군인 친구를 쳐다봤지만, 친구는 오히려 인석을 닥달했다.
“야, 진짜거든? 난 무슨 연예인인줄 알았다니까?”
“흠...그래?”
친구의 말에, 인석은 못 이기는 척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친구가 말한 여자는 줄을 가로질러 먼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 여자는 일반 관객이 아닌 리그 관계자인 듯 했다.
결국 얼굴조차 보지 못한 인석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어차피 신 포도였을 거라고 정신승리를 했다.
‘에이, 됐어. 어차피 평범한데 저 군바리 놈이 또 헛소리 한 거겠지.’
그로부터 잠시 후.
모자를 눌러쓴 채 묵묵히 있던 여자는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푸하하 웃었다.
“내가 귀엽다구우? 당연하지! 나도 알아. 그야 나는 우주 최고의 미소녀니까.”
인석의 친구가 봤다던 미소녀의 정체는 송하니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벨라는 하니가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말 까진 안 했던 거 같은데...”
“응? 언니, 뭐라고 했어?”
“역시 다음에 왔어야 했었다고. 사람 너무 많아서 마음에 안 들어.”
“잉, 또 그 소리야? 미안한데 다음엔 시간이 없어.”
“그럼 1경기만 보고 가는 건 어때? 경기 다 끝날 때쯤엔 너무 혼잡할 거 같은데.”
“시이러! 다 볼 거야! 메이커인지 베이커리인지 바르는 꼴 보고 싶다구! 근데 왜 자꾸 물어봐?”
‘이번엔 네 친구가 발릴 거니까 그렇지. 그럼 네가 또 짜증 낼 거잖아.’
벨라는 송하니의 성향에 대해서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응원하는 정명이라는 사람이 이 경기에서 질 거라는 것도, 그 후에는 하니가 이건 사기라며 빼애애액 거릴 거라는 것도. 벨라에게는 너무 훤히 보이는 미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하니와 벨라는 정명 덕분에 가장 좋은 자리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메이커의 팀 SKS를 응원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우이씨. 짜증나. 왜 다들 SKS만 응원하는 거야?”
“그야...압도적인 성적으로 월챔에서 우승한 팀이니까. 특히 메이커라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이기도 하고.”
“아니거등? 우리 오빠도 디게 잘하거등?”
그리고 그 순간, 드디어 선수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모습이 보이자 팬들은 더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SKS! SKS!
-오늘도 칼퇴근 가자!
하니는 자신도 질수 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정명을 불렀다.
“오빠아! 여기다 여기!”
하지만 정명은 하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묵묵히 부스로 들어갔고, 이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벨라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만, 저 녀석...’
#######
드디어 SKS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무척 힘든 싸움이기는 하지만, 선수들은 이 날을 위하여 다른 여가를 모두 포기하고 여기에만 매달렸다.
질 땐 지더라도 허무하게 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이 경기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밴픽이 시작되었다.
코치와 선수들은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최선의 픽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메뚜기는 줘야겠네. 요즘 1티어 정글러인데.”
“괜찮아. 우리도 다른 거 가져오면 되지 뭐.”
밴픽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었다.
암살자, 원딜러, 서포터, 하드 탱커.
양 팀은 순서대로 하나씩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골랐고, 정명은 보라색 공을 굴리는 캐릭터인 어둠의 여제를 골랐다.
그리고 상대 쪽에서 마지막으로 캐릭터를 고르고 곧바로 선택을 눌렀다. 일명 칼픽이었다.
““우와아아아아!”
“
-메이커의 탈주닌자가 개막전부터 나왔습니다!
‘되게 오버들 하네.’
마지막 픽을 하자마자 환호성이 크게 터져 나왔다.
부스 안이라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탈주닌자가 나오자마자 관객석의 팬들이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명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 또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 미러전 했던 게 임팩트가 크긴 컸나봐.”
“하하, 그때 잘 하긴 했으니까.”
팬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지난 시즌에 만들어졌던 명장면 때문이었다.
지난 시즌에 메이커가 한 선수와 탈주닌자 미러전을 붙었는데, 그 때 보여주었던 1:1 매치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혔던 것이었다.
물론, 정명은 그렇게 당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두고두고 고통 받는다고. 잊을 만하면 명장면이라고 튀어나와서는 괴롭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딩이 끝났다.
오랜만의 방송경기라 조금 떨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
“괜찮아? 버틸만 해?”
“1:1은 괜찮은데 견제가 미드로 몰려서 그게 좀 힘드네.”
“어휴, 메이커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더니...”
-잘하는 팀의 특징이 바로 이렇거든요. 팀에서 유명한 선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다 잘해요!
팀의 원딜러인 김호종이 푹푹 한숨을 쉬며 라인을 당겼다.
라인의 주도권은 이미 시작하자마자 내줬고, 전 라인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한 곳, 미드 라인만 빼고.
-그동안 커뮤니티에서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지 많이들 궁금해 하셨는데, 곧 알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널 고정하세요!
‘이런 망할...내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다른 라인에 지원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경기 직전에 본 메이커의 피지컬은 97.
지금 정명보다 높은 수치였다.
“정명아. 네가 6렙 느리니까 사려야 돼. 너까지 말리면 진짜 끝이야!”
“알았어!”
그런데 그 때,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메이커가 달려들었다. 메이커는 이미 궁극기를 배운 상태였다.
‘괜찮아. 침착하게 하면 막을 수 있어.’
온다는 것을 알고 대응하는 것과, 몰랐던 상태에서 대응하는 것의 차이는 무척 크다.
하지만 메이커는 상대방이 알아도 가드를 뚫어내는 사람이었다.
[적 플레이어, 메이커가 ‘1:1의 제왕’ 스킬을 사용합니다.]
“어!”
동시에 메이커의 탈주닌자가 점멸까지 사용해가며 쇄도해왔다.
예전에 명경기를 만들어냈을 때처럼, 극한의 피지컬이 여실히 드러나는 무빙이었다.
-또다시 명장면 만들어 내나요!
-이거 무조건 잡히는 각입니다. 100%입니다, 100%!
무조건 잡히는 각이라던 해설자의 말과는 달리, 정명은 500점짜리 당구실력을 보여주며 메뚜기와 탈주닌자를 동시에 쳐내며 반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뭐랄까요.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구마적대 신마적의 대결을 보는 것 같네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간신히 위기를 넘겼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메이커는 궁극기나 점화 쿨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들이댔고, 정명는 그제야 왜 메이커가 그 실력 좋던 선수들을 상대로 솔로킬을 낼 수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적 플레이어, 메이커가 ‘1:1의 제왕’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 플레이어, 메이커가 ‘영혼의 듀오’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 플레이어, 메이커가 ‘일격 필살’ 스킬을........]
‘그동안 많이 연습했나보네. 스킬이 이것저것 많아.’
지금 메이커가 쓰는 것은 정확히는 스킬이 아닌, 게임 플레이 노하우라고 할 수 있었다.
스탯이 90이 넘어가는 선수들이라면 하나씩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피지컬이 97에 도달한 메이커는 그런 스킬을 꽤나 많이 갖고 있는 듯 했다.
‘뭐 그렇다고 순순히 솔로킬을 주겠다는 건 아니지만. 주기는커녕 내가 가져와야 해.’
지금까지 잘 버티긴 했지만, 버티기만 해선 이길 수 없다.
뭔가 승부를 걸어야 할 때임을 직감한 정명은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기도 한 후에 나온 스킬인데....괜찮겠지?’
잠시 집으로 귀환한 정명은 그 틈을 이용하여 스킬 설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초월]
*5초 동안 모든 스탯이 100으로 증가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정신력 스탯이 충분히 높지 않은 상태에서 스킬을 사용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최소 정신력 : 90
-권장 정신력 : 100
‘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지금 정명의 정신력 스탯은 91. 설명에 나와 있는 최소 조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하지만 스킬을 쓸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정명이 아이템을 사고 라인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메이커가 몰아치기 시작했으니까.
[적 플레이어, 메이커가 ‘5초 영웅’ 스킬을 사용합니다.]
‘뭐야, 저거. 5초 영웅? 에이씨, 저건 힘든데....’
오랜만에 복귀하자마자 솔로킬을 당할 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한 정명이 새로 얻은 스킬을 사용했다.
5만 포인트와 500만 포인트짜리 스킬의 대결이었다.
[초월을 사용합니다.]
[드높은 의지가 당신의 한계를 시험합니다.]
순간 동공이 확장되며 시야가 넓어졌다.
메이커가 자신에게 궁극기를 사용하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고, 동시에 메이커를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 20가지 정도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메이커 선수가 암살자를 잡으면 55%의 확률로 솔로 킬을 낸다는 통계가...엇!
공격적으로 들어갔던 탈주닌자는 어느새 쫓기듯 도망치고 있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메이커는 점멸을 사용하여 몸을 빼려고 했으나, 정명은 점멸을 사용하는 장소에 예측 샷을 날리며 막타를 쳤다.
모두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메이커를 잡았다는 메시지가 뜨자, 신나서 떠들던 해설자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팬들 또한 숨을 죽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멀뚱멀뚱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방금 뭐였죠?
-리플레이를 한 번 봐야겠는데요. 너무 빨리 지나가서 잘 안 보였습니다.
모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직업정신이 투철한 카메라맨이 급히 정명의 모습을 잡았다.
정명은 솔로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아이 씨, 머리아파. 두 번은 못 쓰겠는데?’
스킬을 사용한 것은 겨우 5초였지만,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다.
때문에 정명은 집으로 귀환하는 동안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렸고, 맵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판세를 가늠했다.
‘됐다. 이걸로 뭔가 보여주자! 라고 말 하고는 싶지만....’
어렵사리 메이커에게서 솔로킬을 따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의 흐름이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명이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닌, 팀 게임이었으니까.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 더블 킬!]
“으아...진짜 못 이기겠다. 왜 저렇게 잘 하는 거야!”
“미안하다 정명아. 넌 엄청 잘해줬는데...”
‘에휴, 터졌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