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천재 게이머 (3) >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힘을 주고 윷을 던져도 항상 똑같은 게 나오지 않는데, 자신이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도 미래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정명은 거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래를 정확히 예지해왔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크게 변한 건 없었는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정명은 자신의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보물처럼 모셔두고 있었던, 미래를 적어 놓은 수첩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는 이걸 너무 맹신하지는 말자. 조금 아쉽긴 하지만.’
......
그 후, 정명은 꽤 좋은 조건으로 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정명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기는 했지만, 한국 최초로 월드챔피언십에서 2번 연속 우승한 것은 상당한 커리어였으니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것 그 자체가 훈장이었고, 이력서였다.
그리고 정명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에리에게 보고했다.
-어땠어?
“잘 됐어. 내가 원하는 만큼 얻은 것 같아.”
미드 라이너, 식스맨과 경쟁 없는 주전 보장과 오더 권한까지.
팀 순위가 5위 정도라는 것만 제외하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계약을 해 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긴 했는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돈 되게 많이 주더라?”
-응? 돈?
“나 깜짝 놀랐다니까. 1억만 줘도 감지덕지였는데, 그쪽에서 먼저 3억을 부르더라니까?”
군대 가기 전에는 3억보다 더 받았지만, 공백기가 있으니 연봉이 깎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1억이라도 받으면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협상을 열고 보니, 기본이 3억 부터 시작이었다.
“대단하지? 흠, 역시 이 유정명. 아직 죽지 않았다.”
정명이 자화자찬하자 에리가 픽 하고 웃었다.
-음....이런 말 하긴 뭐 한데, 그 정도야 보통 아냐? OMA만 하더라도 연봉이 200만 달러...그러니까 2억 밑으로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뭐? 진짜? 나 군대 가기 전엔 1억 넘는 사람 손에 꼽았는데?”
-네가 군대 가기 전이라니. 명아, 우리 임진왜란 시절 이야기 하지 말자. 그 때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프로리그는 많은 투자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시장이 커지고 있었다.
선수들 연봉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고, 전에 김호영이 말한 대로 2군 선수들까지 생활비를 넉넉하게 받고 있었다.
그리고 투자하는 돈에 비례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났다.
그동안은 게이머 수입이 일정하지 않기에 쉽게 도전을 하지 못 했던, 재능 있는 게이머들이었다.
-킥킥...만만치 않을 걸? 우리 팀에 있는 메리만 해도 너만큼 하는 거 같으니까.
“뭐? 메리 5호 걔가 나만큼 한다고? 웃기시네. 내가 다 이겨.”
-알았어. 응원할게. 힘 내.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정명은 에리의 말을 허풍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첫 연습을 했을 때, 정명은 예전처럼 쉽지만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래. 거기 점멸 써서 따라 붙어! 그렇지!”
정명의 뒤에 있던 코치가 신이 나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응원에 힘입어, 정명의 탈주닌자가 뱀파이어를 상대로 솔로킬을 따냈다. 마침 패시브 쿨타임이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역으로 당할 뻔 했었던 아슬아슬한 혈투였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그렇지! 역시 월드클래스 어디 안 가네. 유정명 군대 갔다 와서 폼 다 떨어졌다고 한 거 누구야?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아넣어야겠어.”
“하하....고맙습니다.”
솔로킬을 내긴 했다.
하지만 쉽게 솔로킬을 냈던 예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영혼의 싸움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하게 맞붙었다.
여름도 아닌데, 정명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놈도 그렇고, 저 놈도 그렇고. 진짜 대단하네...재능충들을 죄다 모아놨어. 젠장, 내가 짱박혀 있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게임이 끝난 후, 정명이 다시 한 번 팀원들의 스탯을 살폈다.
[김학수]
피지컬 (90/93)
정신력 (70/82)
오더 (60/71)
판단력 (80/87)
다른 네 명의 스탯을 천천히 살펴보던 정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피지컬 90 넘으려면 정말 재능을 타고난 선수여야 가능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개나 소나 피지컬 90을 넘기고 있다. 그렇다고 팀워크나 캐릭터 이해도가 빠지는 것도 아니다.
맞라인에 선 상대는 예상 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고, 변수 또한 무척이나 많아졌다.
잠시 고민하던 정명은 이 상황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래 이건 마치...하드모드로군. 아니면 전에 겪었던 것이 이지모드였던가.’
........
“수고하셨습니다.”
몇 시간 후, 연습게임이 끝났다. 연습 첫 날이기에 특히나 피곤하게 느껴졌고, 정명은 흐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깐만.”
“응?”
집에 가려는 정명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려 보니 탑 라이너 김학수가 실실 웃으며 정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나나 우유 하나 마실래? 내가 하나 쏠게.”
“핫, 그거 좋지.”
팀 입단 환영식까지 치르기는 했지만, 팀원들과는 아직 서먹서먹하다.
정명은 친목을 다지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준 학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연습실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던 정명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요즘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학수야. 요즘도 메이커가 제일 잘 하는 거 맞지?”
“응? 뭐 그렇지. 걔 잘하는 거야 이견이 없으니까. 하여간에 세상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라니까. 사람이면 실수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누가 가장 잘 하냐는 물음에, 학수의 말이 많아진다.
누구는 피지컬만 보면 흑인 못지 않는 것 같더라, 누구는 운영으로만 끌고 가면 지는 것을 못 본 것 같더라 등등 정명으로써는 처음 듣는 이름들이 꽤나 많이 나왔다.
그리고 제일 잘 하는 사람을 줄줄 읆던 학수는 마지막으로 정명의 이름을 꺼냈다.
“응? 나?”
“어, 형. 형도 나름 월챔 2번 우승 한 사람이잖아.”
“뭐 그렇지.”
“메이커 걔도 딱 2번 우승했거든. 스펙만 보면 꿇릴 거 없잖아? 물론 저만한 포스를 보여주는 팀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근거 삼아, 정명의 남아 있던 팬들은 ‘정명이만 있었더라도 메이커가 세체미 타이틀은 못 얻었을 거다’, ‘아자토스가 진정한 세체미다.’ 등등의 낯부끄러운 주장을 했다고 한다.
정명은 안타깝게도 그들을 실망시킬 것 같아 벌써부터 머쓱해졌다.
“메이커? 지금은 힘든데. 나중에라면 모를까...”
“뭐, 말이 그렇단 거지. 너무 부담 갖지 마. 리그 참가 팀이 10팀이나 되는데, 설마 처음부터 메이커를 만나겠어? 조금씩 감을 되찾아가면서 하면돼.”
그로부터 몇 달 후.
아침부터 보이질 않던 감독이 한숨을 푹푹 쉬며 연습실로 들어왔다.
“얘들아, 개막전 날짜 떴다.”
“오, 정말요? 언젠데요?”
“17일. 그보다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감독이 말을 흐렸다.
그 표정과 제스쳐에서 정명과 팀원들은 감독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에휴...메이커 잡을 준비해라. 정명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뭐.”
감독의 말에, 정명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런 젠장...’
개막전 날짜가 정해졌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팬들에게도 곧 공지가 될 예정이었다.
날짜와 상대가 정해지자 의욕에 불타오른 선수들은 더욱 연습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스태프와 감독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어려운 매치이지만 그래도 혹시나?’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막바지 연습에 한창인 정명에게 톡 메시지가 연달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꺄톡!
-꺄톡!
‘뭐지?’
보낸 사람은 지금 막 앨범 준비로 바쁠 터인 송하니였다.
-새 팀은 어때? 잘 하고 있어?
“힘들어. 수준이 너무 높아 졌어. 이대로라면 리그에서 꼴지하고 말 거야....”
-우히히, 엄살은. 월드챔피언십에서 팀을 2번이나 우승시킨 사람이 그런 말을 해? 별이도 그 말은 안 믿겠다!
“별이?”
-우리 집 강아지 이름.
“아, 그래.”
다행스럽게도 송하니의 아이돌 데뷔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미래가 크게 바뀌어서 혹시나 했는데, 이것까지는 바뀌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정명과 잡담을 나누던 송하니는 이내 본론을 꺼냈다.
-아 참, 나 개막전 보러 갈 테니까 꼭 이겨!
“뭐? 개막전 보러 온다고 네가? 시간 없잖아?”
-응! 없는 시간 빼서 겨우겨우 온 거라구. 그러니까 힘내라구!
“다음 날에 보러 오면...”
-아이 참. 시간 빼기 힘들다니까. 암튼 나 같은 소속사 애들한테 오빠랑 친한 척은 다 했어. 친구들도 다 개막전 보겠대. 그러니까 꼭 이겨달라구. 오키?
“....알았다구.”
그렇게 송하니와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정명은 허탈하게 웃었다.
실망시켜야만 하는 사람이 한사람 더 늘었기 떄문이다.
‘이게 진짜. 내가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날에 좀 오지. 시작부터 보스전인 거 아냐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징징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남자의 자존심으로써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였다.
‘뭐, 이러나저러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다른 경기도 아니고 내 복귀전인데.’
정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스템창을 열었다.
정명은 복귀전을 맞아, 남은 포인트를 아끼지 않고 풀기로 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95/100)
정신력 (91/100)
오더 (91/100)
판단력 (95/100)
[잔여 포인트 : 85210]
‘그럼 스탯을....올릴 수는 없군. 거지다.’
처음에는 쭉쭉 올렸는데, 슬슬 궤도에 접어들고 나니 필요 포인트가 무지막지하다.
정명은 차라리 쓸 만해 보이는 몇 개의 스킬을 구매하기로 했다.
‘5초 영웅이나 뭐 그런 게 제법 좋았지. 응.’
상점 창을 연 정명은 한정된 포인트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쇼핑을 하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 때, 무언가를 떠올린 정명은 이내 상점 창의 맨 마지막을 향해 스크롤을 쭉쭉 내렸다. 그리고 리스트의 마지막 아이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역시 없군. 내 포인트를 싹 쓸어간 도둑놈.’
가격이 무려 500만 포인트였던 기도라는 아이템은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제일 비싼 아이템의 자리는 아테네의 지혜라는, 100만 포인트짜리 아이템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템 설명을 읽어보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도 않고 딱히 살 일은 없을 듯 했다.
‘기도 아이템이라. 기도, 기도...’
[기도]
-###### 하기까지 남은 시간 : 7년 120일
‘설마 뭐가 되려면 7년이 지나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7년 후면 내가 이미 은퇴했을 때라고.’
그런데 그 때, 못 보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어! 뭐야, 이거. 한 번 더 회귀할 때, 아이템 이미 써진 거 아니었어?”
반응이 오자 깜짝 놀랐다.
정명은 속는 셈 치고,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다음 경기에서 이기게 해 주세요. 아니, 500만 포인트나 처먹었으면 뭐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 개자식아.’
그리고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메시지가 나타났다.
[.....####에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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