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천재 게이머 (2) >
“스읍, 하아... 바깥 사회는 역시 공기부터 다르구만. 아주 상쾌해.”
돌아오는 길에 시청 앞 전광판에서 미세먼지 주의경보를 보긴 했지만, 그딴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드디어 전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정명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군대를 2번 갔던 경험은 정말 정신력을 갉아먹을 정도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짜잔! 내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정명이 개인적으로 구입해 혼자 사는 집이었으므로, 그동안 수북하게 쌓인 먼지만 정명을 맞아줄 뿐이었다.
그리고 전역을 한 정명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것이었다.
-오늘부터 민간인. 부르면 곧장 튀어나감.
‘뭐 전역했다고 해서 딱히 할 건 없네.’
정명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소파에 누운 채, 치킨을 주문하며 TV를 틀었다.
다른 사람을 불러내어 놀고 싶어도 이렇게 평일 낮부터 집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명 자신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명은 이내 리모콘을 다다닥 눌러서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고, 이내 TV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한국 팀이네요!
-미드라인을 시원~하게 밀어버립니다!
정명이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시작되었던 월드챔피언십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군대를 가기 전과는 달리, 전역 후 월챔의 양상은 꽤나 바뀌어 있었다.
리그 초기에 세계를 주름잡았던 북미팀은 순위권에서 보이지도 않았고, 그 대신 중국과 한국 팀이 양강구도를 형성하며 세계를 주름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명은 조금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앞서 달려 나가고 있는데, 자신만이 멈춰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감독님한테 다시 연락 넣어봐야 하나? 아냐, 좀만 더 쉬고. 딱 일주일만 놀고 일자리 알아보자.’
군대에서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빈둥대며 시간을 보내길 며칠.
심심하게 시간을 보내던 정명에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정명이! 너 전역했구나!
“어. 한지 얼마 안 됐어. 따끈따끈하지.”
-그럼 혹시 13일 날 시간 돼? 오랜만에 애들이랑 만날 건데 잠깐 만나자. 술 많이안 마실 거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가 술자리를 제안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안 나갔을 테지만, 백수로 지내다 보니 꽤나 심심했던 정명은 옛 친구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갈 게.”
-잘 생각했어. 그럼 그 때 보자!
‘팀 CL 애들이라. 2군에서 빌빌댈 땐 참 고생했었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
그로부터 며칠 후.
약속시간에 딱 맞춰 치킨집에 도착한 정명은 남자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룹을 발견하자마자 그쪽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 오랜만이다 정명아! 잘 지냈어?”
“잘 지내긴 씨. 군대 끌려갔다왔는데 잘 지냈겠냐?”
“아 군대 갔다고 했었지 참. 군대 다녀와 보니까 어때? 요즘도 막 때리고 그래?”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힘든 시절에 같이 고생을 한 동료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뱃속으로 술이 조금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길 잘했다. 나름대로 재미있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팀원들은 모두 프로게이머에 대한 꿈을 접고, 공부를 하거나다른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은퇴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재능의 한계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시간을 연습 하는데 누구는 올라가고 누구는 떨어지니, 절망감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정명 또한 게이머 일을 쉬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현역프로게이머는 딱 한 명이었다.
“다들 은퇴했다니까 아쉽네. 요즘은 리그에 대한 투자도 활발해져서 월급 많이 올랐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월 600 이상 가져가고.”
“와, 진짜? 그 나이에 600이면 되게 잘 버는 거 아냐?”
“그런가? 하핫.”
‘어휴, 김호영 저 놈만 아니면 딱 좋았을 텐데.’
김호영은 2군에서 유일하게 1군으로 올라간 게이머였다.
그는 친구들끼리 만나는 곳에 자기 애인을 데려와서는 눈꼴사나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는데, 애인이 없는 다른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야유하기 바빴다.
“이 자식이 지 여친을 데려와?”
“부럽냐? 부러우면 너네들도 만들던가.”
“와, 진짜 재수 없다. 누군 만들기 싫어서 여친 없는 줄 아나... 그치 정명아?”
“응? 나?”
정명 또한 당연히 없다는 말투였지만, 정명은 굳이 나서서 나도 애인 있다며 깽판치진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 치킨집 안에 있는 TV채널로 시선을 옮겼다.
가게 내의 TV에서는 요즘 게임의 인기를 증명하듯 월드챔피언십의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과연 이번 경기는 어떻게 될지 궁금한데요.
-상대가 북미 팀이라고 방심할 수 없는 게, OMA라는 팀은 북미에서 단 1패만으로 섬머 리그에서 우승한 팀이거든요. 지난 경기에서 보여준 실력도 무척 좋았고요.
-북미 팀답지 않은 북미 팀이네요. ATX도 절대로 방심할 수 없겠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TV에서는 한국 팀과 북미 팀의 경기가 한창이었다.
한국 팀은 한 때 정명이 몸을 담았던 팀인 ATX.
팀의 에이스였던 정명이 빠지고 나서 쭉 하락세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월챔 진출까지는 성공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는 북미 팀은 역시나 정명이 과거에 한 때 몸담았던 팀이자 현재 에리가 코치로 있는 팀인 OMA였다.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먼저 포탑을 깬 것은 ATX입니다!
-역시 한국팀! 북미 팀과는 수준이 다르죠!
북미 1위 팀이라고는 하지만, 상대가 한국 팀이다 보니 OMA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호영은 그 모습을 보며 제 여친과 낄낄거리기 바빴다.
“킥킥, 역시 북미잼이라니까. 진짜 어지간히 못 한다.”
“맞아, 맞아. 눈 썩겠다 진짜!”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북미의 한 선수가 솔로 킬을 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환영술사가 킬 각을 잘 봤네요! 점화까지 써 가며 아슬아슬하게 진화 안드로이드를 잡아냅니다!
-프로게이머도 사람이다 보니 집중력이 조금 떨어진다거나 하면 솔로킬 내줄 수도 있죠. 앞으로 잘 하면 됩니다.
북미잼 운운하며 낄낄대던 두 커플이 순간 입을 닫았다.
그야 방금 솔로킬을 당한 게이머는 김호영 연봉의 세 배는 받는 사람이었으니,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명은 둘이 입을 다문 모습에 만족하며 경기를 감상했다.
‘환영술사가 잘 했네. 한국 선수를 솔로킬 내다니, 근데 북미에 저런 녀석이 있었나?’
북미 선수라면 이름 없는 선수들까지 거의 다 기억하고 있는 정명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모르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그 후, 정명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경기는 OMA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김호영은 밴픽 단계에서부터 아는 체를 하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아오, 왜 쿠거 사냥꾼 밴 안 하냐? 저걸 밴 안 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저거 밴 하는 게 좋아?”
“당연하지! 저거 요즘 뜨는 개 OP인데!”
호영은 현직 프로게이머라는 권위를 내세워 기세등등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호영이 듣고 넘기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밴픽을 보니 코치가 아주 월급루팡이네. 하는 게 없어.”
“뭐라고? 야, 이런 씨...”
“어....뭐야, 너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정명은 호영과 욕하며 싸우는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럼 지금 전화해서 물어보자. 왜 저런 한심한 밴픽을 했는지.”
정명의 말에, 김호영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 또한 뭔 개소리냐는 듯 쳐다본다.
정명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곧장 에리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이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한데 나 지금 바빠. 나중에 전화할게.
“잠깐만. 지금 밴픽 하는 거 말인데, 왜 쿠거 밴 안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지금 보고 있구나? 그건 OP로 뜬지 얼마 안 됐으니까. 상대 선수의 숙련도가 적으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 오히려 해주면 고맙지. 그런데 왜?
“일이 있어서...나중에 설명 해줄게.”
시청자들은 단순히 OP 밴 하면 되는 거 아냐? 하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프로들은 그 다섯 수 앞을 보고 움직인다.
OP를 하나 내주고 OP캐릭터 두 개를 가져온다거나 상대하는 선수의 숙련도와 전체적인 조합 등을 고려하여 밴픽과 전략을 구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명은 호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녀석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밑도 끝도 없이 OP캐릭 밴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호영의 말은 그의 낮은 게임 이해도를 보여주는 말이었으니까. 귀찮게 스탯을 불러올 필요도 없었다.
전화를 끊은 정명이 에리의 말을 그대로 설명하자, 호영이의 여친, 희진이는 방방뛰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우와! 그거 진짜에요? 방금 TV에 나온 사람이랑 통화한 거?”
“당연히 진짜죠. 제가 월챔에서 2번 우승한 거 모르세요? 저 인맥 되게 넓어요.”
“우와, 우와, 정말요? 짱 신기하다!”
그 후, 일행의 대화는 정명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정명이 팀 CL을 나간 후 썰은 무척이나 소설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팀원들뿐만 아니라 희진 또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딱 한 명, 김호영만 빼고.
“됐다, 됐어. 은퇴한 사람이 예전에 있었던 일 얘기 해봐야 추억팔이밖에 더 되나? 우리 다른 얘기 하자.”
“나 은퇴한 거 아닌데? 이번에 다시 복귀 할 거야.”
“....요즘 애들 수준 되게 높아. 네가 복귀하려면 2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걸? 그 힘든 생활을 견뎌낼 수 있겠어?”
“하하. 너야말로 월챔 우승 경력을 너무 ㅈ으로 보는 거 아니냐? 난 그런 거 안 해도 돼. 지금도 나 모셔가겠다는 팀 많아.”
정명의 말에,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 같아도 경력 있는 사람 뽑긴 하겠다.”
“오빠 오늘따라 쪼잔하게 왜 그래?”
희진까지 호영을 타박하자, 호영은 말없이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너 때문에 여친이랑 싸웠다고 징징거리는 호영의 톡이 도착했지만, 정명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차단했다.
######
친구들을 만난 후, 정명은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더 빈둥대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제 그만 놀고 취업이냐, 창업이냐를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당장 팀을 만드는 건 힘들지. 유력한 멤버인 송하니의나이가 지금...중학생이기도 하고.’
마침 송하니랑 연락한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정명은 송하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통 걸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기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송하니입니다!
“그래, 하니야. 나 정명이야.”
-아, 오빠! 휴가 나왔구나? 그런데 내가 쫌따가 다시 전화 줄 게. 잠깐만 기다려!
뚜...뚜...뚜...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고, 정명은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하니의 바뀐 말투가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털털하던 사투리는 사라지고, 만화의 마법소녀 같은 상쾌한 목소리였다.
‘너무 작위적인 하이톤 목소리라 솔직히 조금 소름 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정명은 말투에 대해서 물었다.
-내 말투? 방송에서는 사투리 쓰면 안 좋다고 해서 억지로 바꿨더니...헤헤.
“사투리 쓰면 안 되는 거야?”
-멀라. PD가 안 된대. 이젠 내가 사투리 쓴다는 거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그보다 오빠 또 휴가 나왔어? 생각보다 자주 나오네?
‘너, 또 나왔어?’
연락하는 사람마다 이 소리다.
휴가를 나왔다면 발끈했겠지만, 아예 전역을 한 정명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또라니 이게 진짜. 한 번 나오기 엄청 힘들거든? 아무튼, 이번엔 아예 나왔어. 전역이야.”
-와, 징짜? 그럼 함 볼까?
“너 시간 돼? 너 바쁘잖아.”
-없어도 내야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야가 전역했다는데.
‘오, 이 녀석 의리 보게? 분명 바쁠 텐데.’
하니는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돌! 뭐 그런 것이었는데, 그녀의 화려한 등장에 놀라지 않은 것은 전 세계에서 정명 혼자뿐이었다.
하니는 스케줄을 확인한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이내 정명에게 비는 날짜를 문자로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정명의 집에 송하니가 도착했다.
“오, 여기가 오빠 집이야? 집 좋네!”
“뭐...그렇게 좋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서울은 워낙 집값이 비싸서.”
“웅...아냐! 이 정도면 집 좋지. 헤헤.”
남자 혼자 사는 곳에 겁도 없이 놀러온 하니는 집안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이 따듯한 핫초코를 한잔 내 오자, 하니는 잘 먹겠습니다 하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아 참. 오빠, 그거 알아?”
“그럼. 하니의 일인데 당연히 알지!”
“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암튼...나 팬클럽 생겼다? 히히.”
“와, 정말? 축하해!”
정명이 순수하게 축하했다. 친한 친구가 잘 되는 건 무척 기쁜 일이었으니까.
“근데 더 신기한 게 있는데, 킥킥, 아이 참. 이거 말해도 되나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 뭔데?”
“내 팬클럽 만든 사람이 외국인이다? 그것도 되게 유명한 외국인.”
“되게 유명한 외국인?”
“벨라라는 사람인데, 엄청 실력 좋은 테니스 선수래. 한국말도 잘 해!”
“뭐? 벨라라고? 에바 벨라?”
“아는구나? 지난번에 나 만나러 한국까지 왔었다구. 히히. 그 언니 되게 예쁘더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명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모르는 게이머들이 많다 싶더라니. 무언가.......바뀌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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