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달라진 풍경 (2) >
코치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정명은 예전에 있었던 팀인 NPG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첫 번째 회귀했을 때보다 더 과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들어갔던 팀이....CL 이였던가? 기억도 잘 안 나네.’
팀 CL. CL이라는 IT업체가 후원하는 팀이다.
1부 리그 중하위권에 위치해있는 팀으로써, NPG와 비교해서 그리 낫다고 볼 수 없는 그런 팀이기도 했다.
‘NPG도 그렇고 CL도 그렇고, 이 녀석들은 돈도 안 쓰면서 성적이 나오길 기대한다니까.’
하지만 그런 팀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을 정명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연습생들은 열정과 희생을 강요받으며 최저시급은커녕 식대만 겨우 받는 채로 연습실에 나오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게이머에 대한 꿈을 접지 못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정명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
[너 말고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 줄 서있는 거 알고 있지?]
[감독님 오시기 전에 빨리 튀어 와!]
‘아이고, 문자 좀 그만 보내라 필성아. 때 되면 어련히 가겠지!’
무슨 팀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명은 일단 연습실로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집구석에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습실이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리고 있었는데, 코치에게 전화하여 거기가 어디냐고 물은 이후로 욕 문자가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명이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맞나?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잘 안 나네.’
정명은 프로게임구단 팀 CL 연습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2시 05분]
‘이런, 이렇게 늦었나? 하하. 필성이가 지랄할 만 했네.’
김필성 코치라는 사람은 꽤나 성격이 더러운 사람인 듯 했으므로, 정명은 약간의 각오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정명에게로 쏠렸다.
‘와, 진짜 애들 어리다. 딱 봐도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그런데 정명이 감탄할 새도 없이 소년 중 한 명이 정명에게 서둘러 손짓했다.
“야, 뭐 하고 있어! 빨리 와!”
“응?”
“뭘 멍하니 있어. 빨리 들어오라니까? 코치님 곧 오실 거야!”
“어, 응.”
정명이 어리벙벙하게 연습실로 들어오자 팀원들의 추궁이 쏟아졌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늦잠을 좀 자서.”
“너 가뜩이나 요즘 폼 안 좋다고 코치님이 벼르고 있는데, 지각까지 하면 어쩌냐?”
“됐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그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던 그 순간, 화장실에서 코치가 나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명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코치는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정명에게 다가왔다.
“이쉬끼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다른 팀원들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고개를 푹 숙였다. 철저하게 상하관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게이머 판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정명으로써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야, 너 뭘 잘했다고 눈을 그렇게 똑바로 뜨고 있냐? 이걸 확....”
그런데 그때, 연습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팀 CL의 감독 최성찬이었다.
“감독님 나오셨습니까.”
“어 김코치. 지금 회의 있으니까 잠깐 회의실로 좀 와요. 어제 블래키한테 졌던 것 때문에 그래.”
“넵. 알겠습니다.”
‘넌 이따 보자’
코치가 인상을 쓴 채 입모양으로 말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코치가 사라지자 다른 팀원들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너도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이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당연하지.”
“그보다 우리 1군은 뭐 그리 맨날 얻어터지고 다니냐?”
“내 말이.”
“그래도 1군으로 가고 싶어...”
“넌 그래도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거 아냐? 코치 형이 되게 칭찬하잖아.”
“그런가? 하하...그랬으면 좋겠네.”
정명은 말을 하기보다는 가만히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물론 직접 물어보는 게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가장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네 이름이 뭐였더라?’ 따위를 말했다가는 금방 정신 이상자로 보일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정명은 팀원들이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을 듣고 연습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연습생이 아니라 2군이네. 하긴, 이런 조그마한 팀에서 연습생까지 둘 여력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제일 잘 하는 녀석은...저 녀석이군.’
정명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남자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현석]
피지컬 (45/70)
정신력 (56/65)
오더 (42/67)
판단력 (40/73)
‘아이고....이게 대체 뭐냐.’
능력치가 바닥이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한숨이 나오는 그런 능력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기에 2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현석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정명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정명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말동안 빡연습 한다더니, 그것 때문에 늦잠 잤지?”
“어, 응?”
“이번에는 연습의 결과를 보여줘야 돼. 너, 진짜 위험하다니까? 내가 코치형한테들은 게 있는데, 이번에....”
그런데 그 때, 감독과 코치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1군의 성적에 관한 회의가 끝난것이다.
그리고 김필성 코치는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를 냈다.
“야! 멍 때리지 말고 연습이나 준비 해! 지금 1군 애들이랑 할 거야.”
그 말에 팀원들이 긴장했다.
팀 CL의 1군 선수들. 언젠가 2군 선수들이 밟고 올라가야 할 사람들이었다.
“아참참, 장판조합으로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야 유정명. 넌 대답 안 해?”
“...네 알겠습니다.”
‘분위기 파악하기도 전에 연습이라니. 아이고, 정신없어라.’
다만 이번 연습게임은 다른 연습게임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2군 팀은 1군 팀이 원하는 컨셉과 캐릭터를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는 1군 선수들이 장판조합을 원한다고 하니, 장판조합을 맞춰서 해줘야 했다.
‘이건 뭐 연습용 샌드백도 아니고.’
씁쓸해 하는 것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1군 애들이 장판조합을 상대로 개 썰린 게 충격이 컸나 보다.”
“됐어. 그런 얘기 해 봐야 뭐 하냐.”
“그럼 조합을 어떻게 짜는지 얘기나 좀 해볼까?”
곧이어 자기들끼리 쑥덕대며 조합을 짜기 시작한다.
열심히 조합을 짜던 현석은 고개를 들어올려 정명과 눈을 맞췄다.
“정명아, 전기 쥐 가능해?”
“전기 쥐?”
“뭐야, 연습 안 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할 수 있지? 그럼 하자.”
정명은 현석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전기 쥐는 보통 탑에서 쓰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탑 라이너였던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연습이 시작되었다.
물론 연습을 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구도였다. 가뜩이나 1군에 비해서 실력도 달리는데, 조합도 상대가 원하는 조합을 짜 주니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적에게 당했습니다.]
[적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에휴....”
“쩝...”
킬이 나올수록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장판조합. 한타조합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들은 보통 라인전에서 약한데, 아니나 다를까 라인전에서 하나 둘 터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버티는 라인은 정명이 있는 탑 라인 정도였다.
탑 라인에 서는 것은 조금 어색했지만, 버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정명은 자신의 뒤에서 작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김 코치. 정명이 실력이 안 좋다고 하더니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운이 좋은 것뿐입니다. 저 녀석, 재능이 없어요 재능이.’
‘아냐. 내가 볼 땐 정명이의 폼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지켜봐도 되겠어. 김코치가 추천했던 그 녀석은 일단 보류 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그 다음부터는 목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엿들은 대화만으로도 정명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무척이나 충분했다.
‘와....나 방금 잘릴뻔 한 거야? 필성이 이 개놈이 진짜!’
사실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됐다.
그야 정명의 스탯은 아까 봤던 이현석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이다.
정명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스탯창을 열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40/100)
정신력 (62/100)
오더 (30/100)
판단력 (41/100)
[잔여 포인트 : 40]
‘볼 때마다 열 받는다.’
정명의 능력치는 완전히 초기화 되어버렸다.
그리고 500만이던 잔여 포인트가 40이 되어있는 것을 보자, 화가 두 배로 치솟았다.
정명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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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시간 뒤.
월요일부터 정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찍 퇴근했다.
당연히 코치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정명은 CL에서 짤리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므로 연습실에서 한 명 죽어나가야 조퇴시켜 줄 것이냐며 코치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기 퇴근을 한 정명이 찾은 곳은 집이 아닌, 한 PC방이었다.
‘역시 아직 있군. 송하니랑 그 일당들.’
하니는 오늘도 친구들과 같이 PC방에 있었다.
나중에는 자칭 미소녀 아이돌이 되는 송하니이지만, 지금은 ‘아저씨 선불 천원이요.’ 를 외친 뒤, 우르르 몰려가서 우르르 빠지는 코흘리개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선불시간이 끝날 무렵, 정명을 알아본 송하니가 정명에게로 다가왔다.
“오빠 뭐하나? 껨 안 해? 구경하고 싶은데.”
“이력서 쓴다.”
“머? 이력서어? 오빠 백수가?”
“직장이 없는 건 아닌데, 직장 옮기려고.”
‘이런 거지같은 팀은 빨리 탈출하는 게 좋지. 또다시 북미의 2부 리그부터 시작한다는 게 조금 막막하긴 하지만...’
정명은 영문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당연히 해외의 프로게임 구단에 보낼 이력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하니는 우와우와하며 정명의 옆에서 계속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짱이다! 오빠 영어도 하나?”
“하지. 그것도 엄청 잘 해. 아마 너희 학교 선생님보다도 더 잘 할 걸? 미국에 오래 살았었으니까.”
“정말로? 그럼 내 학원 숙제 좀 같이 해도.”
하니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숙제를 꺼냈다. 그리고 정명에게 자신의 숙제를 내밀었다.
“이거 풀 줄 알제?”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하면 무척 실망할 것이라는 표정이다.
정명은 PC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솔직히 어이가 없었지만 어려운 건 아니니 도와주기로 했다.
“진짜아? 와, 와! 오빠야가 최고다!”
“단, 조건이 있다.”
“조건?”
“나한테 뭐 배울 때는 선생님이라고 불러.”
“응! 알았다, 선생님!”
그리고 그 순간, 정명의 시야에 퀘스트 완료창이 떴다.
[히든 퀘스트 No. 223 : 후기지수 양성]
*보상 : 5000 포인트
‘역시 이렇게 해도 되네. 모두 계획대로다.’
아무리 처음으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한 번 걸어왔던 길이다.
당연하게도 정명은 포인트를 모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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