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그 녀석들 (2) >
정명은 팀원을 바꾸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메테오는 정명의 간곡한 설득 끝에 결국 팀에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신, 팀에 새 사람이 추가되었다.
에리의 밑으로 오게 된 팀의 매니저이자 메테오의 애인, 이진희였다.
“안녕!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 똑같다, 똑같아!”
메테오의 애인은 게임 캐릭터의 성우였다.
진희는 애인의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는지 게임 캐릭터의 대사를 똑같이 따라하며 팀원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는데, 그러한 노력은 하니랑 쿠론이 특히나 좋아했다.
“깽깽이 발로 갈까여?”
“우와...신기해! 또 해봐 또!”
“어...또?”
진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달팽이색 총 공격이다!”
“푸하하하!”
‘나 참. 뭐가 저렇게 좋은지...’
저 나이대의 소녀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터진다고 하더니, 딱 그 말이 맞는 듯 했다.
“저...그래서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진희는 임산부라고 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잔다면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무언가 일을 하길 원했다.
따라서 에리는 평소 성격처럼 자상하게 일을 하나하나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돼~”
“아, 응. 고마워요. 그런데 언니, 한국말 되게 잘하시네요.”
그렇게 팀의 재정비가 끝난 후 몇 달 뒤. 드디어 스프링 리그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팀들은 스프링 리그가 시작되자마자 순위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들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팀은 물론 정명이 있는 NHG였다.
-완벽한 운영입니다! 역시 월챔에서 우승한 팀은 다르긴 달라요!
-갱킹 성공! 용까지 가져갑니다. 이 팀에게 우승자 징크스라는 말은 아예 통하지 않나 봅니다.
월챔에서 우승한 팀은 다음 시즌에서 죽을 쑨다.
NHG는 대부분의 우승팀이 겪는, 일명 우승자 징크스는커녕 오히려 다른 팀들을 초반부터 압도하며 월챔 우승팀의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윈터리그가 사라져서 참 다행이에요. 월챔에서 빡세게 하자마자 윈터리그 준비하라면....으으, 솔직히 전 못할 것 같아요.”
“맞아맞아. 그렇게 되면 놀 시간도 없다구. 파업 각이야!”
한 달 뒤.
스프링리그가 꽤 진행되었지만, NHG는 여전히 부동의 1위였다.
때문에 나머지 팀들은 2위라도 차지하기 위하여 박 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TV로 다른 팀의 경기를 보던 메테오는 옆에 있던 정명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메테오가 슬쩍 물었다.
“저 팀이지? 네가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팀이.”
“응.”
“그런데 실력이 별로인 것 같은데? 잘하는 팀인 거 맞아?”
“....응. 아마도.”
리빌딩과 함께 폐관수련을 하던 KAO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SNK라고 이름까지 멋지게 바꾼 후였다.
그런데 리빌딩 직후여서 그런지 SNK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리그가 꽤 진행되었음에도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에 반하여 NHG는 더욱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NHG의 실력이 월챔 때보다 더 올라갔다고 평가하고는 했고, 정명도 그런 평가에 동의했다.
‘당연히 실력이 올랐겠지. 포인트를 그렇게 퍼부었는데.’
정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스템 창을 연 뒤, 아이템 하나를 사용했다.
[팀원 송하니에게 한계 돌파! 아이템을 사용합니다.]
[한계 돌파!]
*팀원들이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효과 : 팀원 한명의 잠재력을 모두 1씩 끌어올립니다. 단, 스탯의 상승은 97까지만 적용됩니다.
‘일단 잠재능력을 뚫어는 놨는데, 90부터는 스탯이 더럽게 안 오른단 말이지. 경험치 부스터를 그렇게 들이 부었는데도.’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도 NHG가 우승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NHG! 스프링 리그에서 무패로 우승합니다!
-과연 이 팀을 꺾을 수 있는 팀이 나오기는 할까요? 정말 소름이 돋네요.
[스프링 리그에서 무패로 우승하였습니다!]
[50만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포인트를 많이 썼지만, 그만큼 포인트가 더 충당되어 들어왔다.
해설자들의 말처럼, 이제 NHG를 꺾을 팀은 없는 듯 보였다.
‘내가 거만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당연한 결과지. 하지만....’
........
스프링 리그가 끝난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팀원들은 다음 리그를 위하여 연습을 하면서도 각자의 취향대로 여가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메테오는 알콩달콩 연애를 하느라 바쁜 듯 했지만, 연습실에서 방해가 될 정도로 티를 내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기에 애인이 팀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
에리는 뭐가 그리 피곤한지, 잠이 부쩍 많아졌다.
“언니, 자?”
“응...”
“하암...그럼 나도 잠깐 눈 좀 붙일까?”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느라 새벽에 잔 하니 역시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쿠론은 요즘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야 금발! 그 택배 뭐야? 먹을 거면 같이 좀 먹자.”
잠에서 깬 하니가 택배 상자를 들고 오는 쿠론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쿠론은 얼굴을 팍, 찌푸리며 선을 그었다.
“먹을 거 아니니까 절대 건드리지 마! 혹시 몰래 뜯어보기라도 했다간 진짜로 화낼 거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안 뜯어본다.”
하니는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며 곁눈질로 상자를 노려보았다.
‘음...뭐야, 당사자 외엔 절대 개봉 금지라고 적혀 있네. 뜯어보고 싶은데, 그랬다간 뒷감당 안 될 것 같고...’
그리고 석진은 뒤늦게 찾아온 연애를 위하여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으으....나도 메테오처럼 연애 하고 싶어. 하니야, 너 혹시 형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월챔에서 우승 한 번 더하면 연애금지조치를 풀어준다던가 뭐 그런 말...”
“오빠가 그러는데 너한테는 그런 거 없다던데?”
“어? 정말?”
“그보다 사귀고 있는 거는 맞아? 이슬이 언니랑.”
“아하하, 그게 좀 애매해서...”
연애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던 석진은 팀의 여성 게이머들에게 열심히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누님,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고견을 주십시오.”
“미안, 난 이미 10년 전에 연애세포가 다 죽었어...”
에리가 정말로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석진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니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엣헴, 그건 내가 잘 알지! 그럴 땐 어떻게 하냐면...”
“송하니 말은 듣지 마. 분명 자기가 보는 만화에서 나온 걸 가르쳐주려고 들 테니까.”
“그거 상당한 고증을 거친 만화거든!”
“아무튼 연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이라는 거지. 도움이 안 돼.”
“우씨,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석진은 투닥거리고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솔직히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결국 석진은 이 팀에서 가장 듬직한 팀의 리더인 정명을 찾아갔다.
정명은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형 생각은 어때요?”
“어? 뭐가? 아...연습할 시간 됐구나? 그럼 연습하러 가자.”
마지막으로 팀의 리더인 정명은 뭐에 쫓기기라도 하듯, 무언가 성과를 내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월드챔피언십이 걸린 섬머 리그가 시작되었다.
정명은 이번 리그에서는 다시 한 번 메이커가 있는 SNK라는 팀에 주목해보기로 했다.
......
-SNK! 스프링 리그 때와는 명백히 다른 모습입니다!
-정말 성장세가 무서울 정도네요. 성장세가 이렇게만 지속된다면, NHG도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리그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
정명은 멀리서 메이커와 그 일행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정명이 과거에서 TV로 보던 그때의 그 모습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노력 한 흔적이 보였다.
‘제법이네. NAV를 꺾고 2위 진출이라. 이번 월챔에서 기대해볼만 하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NHG와 비교한다면 아직 한참 모자르다.
NHG는 섬머 리그에서도 우승하며 팬들의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한국 1위로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작년에도 한국에 부트캠프 차리겠다고 전 세계에서 한국으로 몰려 왔었는데...”
“그렇지. 그런데 이번엔 한국으로 오는 팀이 그 때의 세 배쯤 되네.”
월챔 시즌이 되었지만, 출국 준비를 위하여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이번 월드챔피언십은 한국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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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봤어? 불여우 인형이랑 버섯동자 모자 팔고 있었어!”
월드챔피언십 당일.
하니가 귀여운 캐릭터 상품을 하니가 사러가겠다고 나서자, 쿠론이 붙잡았다.
“농담이지?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네가 가서 줄을 서겠다고?”
“힝...”
“이따 매니저 언니한테 부탁하던가.”
“흑, 그래야겠답.”
그런데 그 때, 메테오가 캐릭터 상품을 한 박스 갖고 왔다.
“어, 그거 산거야?”
“아니.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선수는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너희들 것까지 챙겼어.”
“야호! 신난다!”
그런데 그때, NHG의 대기실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작년 월챔의 준우승팀인 팀 오리엔탈의 리더, 라이언이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중국인이지만 영어 발음이 깔끔하다.
정명은 팀원들을 뒤로 한 채로 대기실에서 나왔다.
라이언은 정명을 조용한 곳으로 안내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도?”
“만약 우리 팀이 당신에게 진다면, 저는 이번 리그를 끝으로 은퇴합니다.”
뜻밖의 폭탄선언에, 정명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만약 이번 월챔의 결승에서 우리 팀이 당신에게 진다면...저는 은퇴합니다. 이번에 이길 수 없다면 영영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일 테니까요.”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발목을 붙잡는 팀원 때문에 못 이긴다느니, 1:1 게임이었으면 자신 있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여전히 자기자랑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좀 고려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1위를 할 수 없는 분야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뭔가 우리 팀이 진다고 가정해서 얘기가 흘러갔는데요, 이번엔 무조건 우리가 이깁니다. NHG의 연승을 꺾는 건 우리 팀이 될 거라는 얘깁니다.”
라이언다운 말이었다. 천재였기에 자존심 또한 강해진 그에게 2등의 위치란 별로맘에 들지 않았을 테니까.
“할 말은 이게 끝입니다. 그럼 이만. 다음에는 결승에서 봅시다.”
라이언은 방금의 얘기는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 떠나갔다.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린 것이다.
정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휴...시간 날렸네.”
“뭐래? 뭐래?”
라이언이 뭔 말을 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는지, 하니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정명을 쳐다봤다.
“이번 리그에서 우승 못하면 은퇴한대.”
“엥? 진짜?”
정명은 팀원들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쿠론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걔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며?”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 적 없어. 재수 없는 녀석, 지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더라.”
그로부터 한 달 후.
결승에서 보자던 라이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팀 오리엔탈은 8강에서 허무하게 탈락해버렸다.
SNK에게 2:0으로 깔끔하게 잡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