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위로, 위로! (4) >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길 며칠.
마침내 팀 NAV와의 결전이 다가왔다.
정명은 조금 일찍 경기장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고, 팀원들과 함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에리, 졸려요? 내가 운전 할까요?”
“응...아니!”
“뭐라고요?”
“어...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는 에리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끼어 있었다. 오늘의 경기를 준비하느라 여러모로 애썼기 때문이다.
사실 에리뿐만 아니라 팀원 모두 당연하다는 듯 잠을 줄여가며 연습했기에 피곤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지만.
‘최선을 다 해 준비했으니, 잘 되겠지. 잘 된다고 믿어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이 경기장에 도착했다. 팀원들은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는지 모두들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기실로 들어가기 위하여 멍하니 걷던 석진이 갑자기 정명을 불러 세웠다.
“어? 형! 저기 조이슬 아나운서님 아닌가요?”
“뭐가? 어디?”
석진이 가리킨 곳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저 멀리서 조 아나운서가 보였다.
조 아나는 PD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석진이 알려주기 전까지 정명은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나야 시력이 좋아져서 저기까지 보이는 거긴 하지만...나 참, 용케도 알아봤군.’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차석진은 아무 맥락 없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형.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우리 팀도 혹시 연애 금지에요?”
마치 아이돌을 관리하는 것처럼, 몇몇 프로게임 팀들은 선수들에게 연애 금지조치를 내리고는 했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거의 무조건이라고 할 정도로 성적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게이머들은 연애를 할 정도로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힘들지.’
그 때문인지 송하니도, 쿠론도 거의 반 강제적으로 모태솔로로 지내고 있었다.
우승이라는 대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아주 모범적인 게이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명은 차석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연애? 당연히 안 되지. 월드 챔피언십에서 세 번쯤 연속으로 우승하기 전 까지는 턱도 없어.”
“헉...”
“그런데 넌 예외로 해 줄게.”
“헉! 진짜요?”
뜻밖의 승낙에 혼자 시시덕거리던 석진은 갑자기 또 궁금한 게 생겼다고 말하며 정명을 불러 세웠다.
“혹시 하니도 예외인가요?”
“예외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되면 그게 예외겠냐? 당연히 안 되지.”
“음...그러면 저는 왜?”
“그냥.”
“그냥이요? 으음....”
‘딱 봐도 넌 어버버 거리면서 주위만 뱅뱅 돌다가 짝사랑으로 끝날 것 같으니까 그러지.’
하지만 그 말을 대놓고 하기는 조금 잔인했기에, 정명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대기실로 들어왔다.
대기실로 들어오니 이상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한사람 더 보였다.
메테오는 오줌 마려운 사람처럼 대기실을 왔다갔다 돌고 있었다.
“메테오, 화장실 가려면 가요. 아직 시간 남았어요.”
“어, 정명. 그게 아니라 지금 여친이 응원하러 왔다고 하는데...만나러 가도 되는 건가 이거?”
‘에휴...뭐냐 이건 또.’
팀원들은 오늘따라 평소에는 절대 먼저 꺼내지 않았던 개인사나 감추고 싶어 하던 얘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꺼내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 그들과 친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완전 가족처럼 모든 걸풀어놓고 얘기했던 것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별 얘기 다 들었지.’
정명이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들이 왜 갑자기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이해는 하고 있었다. 팀원들이 갑자기 이러는 건 자신이 아침에 사용한 아이템 때문이었으니까.
정명은 경기를 위해 부스에 오르기 전, 한 번 더 시스템 창을 열었다.
[혈맹 (파티용)]
*먼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
-팀원들은 당신을 가족 이상의 존재로 대하며, 무척이나 친근감을 느낄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
-팀워크가 소폭 상승합니다.
-오더 스탯이 99로 상승합니다.
[운영법, ‘수면제 메타’ 사용 가능]
혈맹.
한 번 사용한 적이 있었던 A등급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번에 얻은 아이템은 지난 번 사용한 아이템과 이름은 같은데 효과가 조금 달랐다. 무엇이 더 좋은지는 가서 경기를 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더 스탯 99라. 오더 스탯이라고 딱히 피지컬보다 포인트가 적게 드는 것도 아닌데, 이건 나름대로 괜찮은 효과가 있겠지. 아마도.’
경기 시작 전, 잡생각이 많았던 팀원들도 무대에 오르자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적당히 긴장한 가운데, 1경기가 시작되었다.
......
-와, 이거 천기누설 아닌가요? 오늘 완전 작두 타신 것 같은데?
-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밴픽이 끝난 후, 해설들이 밴픽을 맞췄다고 자화자찬하며 웃었다.
사실 3밴일 때는 밴이나 픽이 비교적 예상 가능한 지점에서 변화하고, 또 준결승 급의 대회에서는 안정적인 밴픽을 선호하기 때문에 예측이 더욱 쉬워진다.
따라서 정명도, 상대 팀도 서로가 어느 픽을 할지에 대해서는 대충 꿰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대를 분석하는 일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에리는 눈에 다크서클이 짙게 낄 정도로 상대 팀의 경기를 엄청나게 돌려봤고, 그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온다...’
경기 시작 직후.
NHG 부시 쪽으로 메뚜기 전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NAV의 정글러인 김성무의 안 좋은 습관 중 하나였는데, 그는 3판에 한 번정도의 비율로 생존기를 믿고 와드를 깊숙이 박으러 오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상하고 부시에 전부 모여 있던 팀원들은 숨소리라도 들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침만 꿀꺽 삼키며 그가 부시로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다, 죽여!”
[퍼스트 블러드!]
-아아아아아, 이거 너무...
-1킬 헌납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겠네요.
“히힛, 개꿀.”
“푸하하. 기분 좋게 시작 했네.”
퍼스트 킬은 메테오가 먹었다. 나름 베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라이너가 처음부터 킬 먹어봐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 하니까. 하지만 정글러가 킬을 먹는다면, 곧바로 상위 아이템을 바로 올리는 게 가능했다.
‘시작은 좋긴 한데,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싸움의 신이라 불렸던 박성준은 방랑 마법사를 가져왔고, 정명은 독뱀술사를 가져왔다. 딱히 상성이랄 것이 없는 픽이었다.
“형, 알죠? 킬만 주지 말고 버티기만 하면 되요.”
“그거 대체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나 아직 쌩쌩하다.”
예상대로 박성준은 초반부터 무척이나 공격적으로 싸움을 걸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퍼블을 먹힌 게 열 받았는지, 평소보다 더 공격적인 것 같기도 했다.
‘방금 전 본 박성준의 피지컬은 96이었지. 지금 나는 95고.’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피지컬이었기에, 박성준은 그렇게 싸우면서도 대부분의 싸움에서 이득을 챙겨가고는 했다.
하지만 그와 맞서 싸우는 정명은 박성준이 평소에 쉽게 상대하던 여느 게이머와는 조금 달랐다.
정명 피지컬이 95인 상태이고, 여기에 더해 숙련도 보정을 더하면 피지컬 96.
싸움의 신이고 뭐고,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방랑 마법사! 딜 교환을 걸어보려다가 오히려 손해만 보고 뒤로 무릅니다!
-방금 무빙 좋았는데, 정명 선수도 전혀 밀리지 않네요. 기싸움이 팽팽합니다!
딜 교환에서 이득을 보자, 정명이 석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뭐? 버티고만 있으라고?”
“어....비행기 운전 잘 좀 부탁드립니다 기장님.”
라인전은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15분이 지나 조금씩 라인전이 끝나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반반.
그런데 그 때, 정명이 슬슬 운영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석진아. 용 시야 확보해. 송하니는 탑으로 빠져서 푸시하고. 1:1 이길 수 있지?”
“어....아마도?”
그와 동시에 핑이 정신없이 찍히기 시작하며, 선수 네 명에게 일일이 오더를 내렸다.
“두꺼비는 나한테 와. 바텀 한 번 노려보자. 그리고 나머지 셋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명의 말이 점점 말이 빨라졌다.
곧이어 경기를 중계하는 옵저버가 정신이 없어질 정도로 맵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투가 이뤄지는 곳에는 NHG 팀원들이 NAV 팀원들보다 한 명씩 더 많았다.
싸움이 정신없이 벌어져서 상대방이 허둥지둥 하는 동안, 이쪽은 정확한 지시와 수준 높은 팀워크를 통해 항상 유리한 싸움을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그런 합류전을 몇 번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피지컬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때쯤 항복 투표가 가결되며 NAV의 넥서스가 터졌다.
-1:0! 첫 경기를 가져간 팀은 67%의 확률로 승리한다는 통계가 있거든요!
-그만큼 중요한 경기인데 깔끔하게 승리했네요. 상당히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선취점 달성했다. 오늘 이 녀석들을 꺾고, 월드챔피언십에는 무조건 직행으로 가겠다.’
1경기가 끝나고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다들 긴장해서 화장실을 갔기에 대기실은 텅텅 비어있었고, 대기실에 남아 있는 건 송하니와 정명 둘 뿐 이었다.
송하니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정명에게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는 듯,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힘들어써.”
“그래, 잘했어.”
잘했다고 칭찬했는데도 송하니는 뭐가 불만인지 머리를 가까이 들이밀며 강조했다.
“엄청 힘들었다구!”
“잘했다구.”
‘어휴, 이놈이고 저놈이고 무지하게 달라붙는구만.’
1경기를 뛰어 본 결과, 정명은 오더 스탯을 99까지 올려주는 이 아이템에 대해서대단히 만족했다.
완벽한 인원분배와 효율적인 팀워크는 피지컬이 대단하다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런데 조금 이상한 부과효과까지 있어, 정명을 당황시켰다.
선수들이 정명을 편하게 생각해도 너무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뭐 딱히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했다 우쭈쭈 해줘도 될 것 같지만, 긴장감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으니까.’
적당한 긴장상태. 지금이 딱 좋았다.
그리고 잠시 후, 2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경기는 썩 잘 풀리진 않았다.
밴픽에서 조금 말리고 말았고, 그게 스노우볼이 되어 라인전에서 조금씩 밀렸기 때문이다.
“미쳐...CS 차이 너무 벌어졌다.”
“아우...저건 사기야.”
초반에 NAV가 굴린 스노우볼은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기만 했다.
하지만 이정도 고난에 힘들어서야 스탯 99가 운다.
해설들이 일찍 항복하는 것도 나름대로 멘탈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하기 시작할때, 정명이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팀원들에게 운영법, 수면제 메타를 요청했습니다.]
‘대충 계산했을 때 글로벌 골드 격차는 7000정도. 아직 역전이 엄청나게 힘들다는 마의 1만 골드 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지.’
동시에 게임의 템포가 급격히 느려지기 시작한다.
정명은 예전에 모 게임에서 벙커와 탱크를 박고 우주방어를 하는 것처럼 라인 클리어를 하기 시작했다.
“처 맞고 집 가. 집 갔다 오면 맞고 또 집 가.”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는 조합이 포킹 조합이었다.
싸움을 걸려고 하면 허겁지겁 뒤로 빠지고, 그렇게 거리를 벌리면 또 포킹하고.
마음 같아서는 미니언을 끼고 타워 다이브라도 하고 싶은데, 또 라인 클리어가 탁월한 조합을 만들었기에 그것마저 쉽지 않다.
그렇게 꾸역꾸역 버텼지만, 글로벌 골드 격차는 오히려 1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정명이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농성하는 동안, 상대는 타워 밖의 오브젝트들을 모조리 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골드 격차는 이제 상관없었다.
경기 시작 50분 째.
상대방이 얼마를 들고 있건 아이템 칸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물릴 것 같은데요! 작심한 듯 점멸을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서포터 던져주고 겨우 빠져나가네요.
설명에는 수면제 메타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중요한 경기에서 사용하니 그렇게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냥 작심하고 후반 가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지루해하기는커녕 팬들은 잡힐 듯 말 듯, 도망가고 싸우고 하는 모습을 보며 손에땀을 쥐었다.
그 상황에 조바심을 내는 쪽은 당연히 NAV 쪽이었다.
조바심이라기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기에, 결국 백작 오브젝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안 나오겠지’ 생각하며.
하지만 그 순간, NHG 선수들이 시즈모드를 풀고 본진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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