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한달 후 >
정명이 대리랭크계를 후벼 파던 일이 있은 뒤로 2주가 지났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리랭크는 성행하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정명 개인으로써는 바뀐 것이 딱 하나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정글링 스킬. 이것 하나를 얻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건을 벌일 이유는 충분했다고.
-GG! 요즘 XTC의 감이 상당히 좋네요. 또 다시 1승을 추가합니다!
-처음에는 별 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 할 거라고 평가되었습니다만, 무척이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XTC.
중하위권 팀을 상대로 가볍게 1승을 챙긴 정명은 기지개를 켜며 부스를 나섰다.
그런데 곧장 선수 대기실로 들어가려는 정명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정명, 잠깐만요!”
정명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메이였다.
“오, 당신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혹시 최근에 대리랭크 관련해서 위에서 연락 받으신 것 있으세요?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어서 저보고 좀 알아봐 달라고 하던데 혹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아, 그거요. 숨기는 이야기도 아니니, 이야기 해드려도 상관없죠.”
정명은 어느 날,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조만간 중국에서도 대리랭크 단속을 시작할 건데, 단속 사무실 개업식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중국에서도 대리랭크를 최대한 통제할 예정이거든요. 테스크포스 팀을 구축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정명 선수가 잠시 자리를 빛내주시는 건 어떨까 해서요.
“제가요?”
-예. 정명 선수가 지난번에 활약한 영상 있잖습니까. 팀장님이 그것을 보고 무척이나 인상 깊었나 봐요. 특히 인터뷰가 마음에 드셨다고 하시더군요.
“아, 예....”
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했던 가식적인 인터뷰를 떠올린 정명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대리랭크 단속 담당자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정명은 결국 제안을 승낙했다.
“사실 조금 망설였어요. 그곳에 유명 정치인까지 온다고 했거든요.”
“왜요? 그런 높은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면 당연히 좋은 것 아닌가요?”
“저는 게이머지 정치인이 아니니까요. 자꾸 정치와 엮이는 게 달갑지는 않아서.”
결국 정명은 그 행사에 참여를 하긴 했다.
비록 누가 누군지도 잘 몰라서 악수만 몇 번 하고, 사진이나 몇 번 찍어주다가 돌아오긴 했지만.
“호호, 생생한 증언 고마워요. 다음에 제 힘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그로부터 며칠 뒤.
그 일을 슬슬 잊어버릴 때 쯤, 부모님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의 신문에, 정명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신문은 정명이 뭘 했는지 보다는, 정명과 악수를 하고 있는 사람의 정치서열이 몇 위인지가 더욱 궁금한 듯 했다.
‘뭐야? 이건.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유학생?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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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일요일 오후.
프로게이머라고 해서 주말까지 전쟁하듯 연습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쉴 때는 쉬어야 평일에 연습을 더욱 열심히 할 수 있으므로, 결승전 무대 정도가 아니면 일요일에는 쉰다.
사실 원래 XTC는 일요일까지 연습을 하는 팀이었으나, 정명이 팀에 들어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정명은 당시, 일요일에 연습을 안 하면 뒤쳐질 것이라는 팀원에게 한 마디 일침을 가하며 일요일 연습을 곧바로 없애 버렸다.
“혹시 학창시절에 공부하실 때, 밥 먹으면서 공부하거나 하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럴 필요 전혀 없습니다. 쉴 때는 쉬어야죠.”
덕분에 다른 팀원들은 쇼핑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정작 정명 본인은 나가기가 귀찮았으므로 연습실에서 개인방송을 돌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삐아님,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조알아님 달풍선 감사합니다.”
대리랭크 사건 이후로, 정명의 개인방송의 랭킹이 상당히 올랐다.
이제 여기서 성적을 더 올리고 싶다면, 성적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최상위권에 진입할 수가 있다.
‘물론, 성적 올리는 게 가장 어려울 것 같지만.’
그러던 그 때, 누군가 XTC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외부인 인 듯 했다.
‘뭐지?’
소리는 났지만, 정명은 신경을 껐다. 어차피 매니저가 나갔을 테니까.
그리고 잠시 후, 현관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어라? 매니저님밖에 없어요?”
‘그 녀석인가.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안 올 텐데, 부지런하게도 오는군.’
놀러온 사람은 한빽티웅이라는 선수였다.
이름은 그랬지만 발음이 힘들었기에, 정명은 그의 아이디인 와플로 그를 부르고는 했다.
선수들은 경쟁자인 동시에 동료다.
승점을 걸고 싸운다고 해서 으르렁거릴 필요는 전혀 없고, 친하게 지내면 여러모로 좋다.
물론 그것도 사람을 가려야겠지만, 와플이라는 19살 청년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현재 연습실에는 정명밖에는 없었었기에, 와플은 개인방송을 하고 있는 정명에게 곧장 다가갔다.
“오, 정명. 개인방송 해요?”
“네. 요즘 시청자도 늘어나고 해서, 할 맛이 나네요.”
“어디, 시청자 수 8만 명이라. 되게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전 11만 명이지만요. 하하.”
‘이 새끼가...?’
괜찮은 사람이긴 한데,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는 부분이 조금 짜증나는 사람이었다.
이미 피해자는 많았다. 자신의 장난감 컬렉션보다 좋은 것을 가져온 와플에게 타격을 입은 매니저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매니저가 대화에 참전했다.
“중국에서는 그렇지만, 정명은 미국에 팬이 많아요. 그쪽 사람들까지 합하면, 11만 명은 그냥 넘을 걸요?”
“흠, 정명. 진짜에요?”
“그렇게 되겠죠? 미국에는 팬클럽까지 있었으니까 제법 잘 나갔거든요. 한 번 보실래요?”
정명은 곧바로 자신의 팬클럽 홈페이지를 열어, 와플에게 보여주었다.
홈페이지는 정명이 중국으로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허...그렇군요. 달풍선도 많이 받으셨겠어요. 저는 한 번에 많이 받을 때는 5만 개씩 받을 때도 있었는데. 저를 좀 많이 좋아하시는 열혈 팬들이 있어서 하하.”
와플은 ‘이건 어떠냐!’ 는 표정으로 정명을 쳐다보았지만, 정명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달풍선이요? 달풍선으로 많이 받기도 했지만, 만나서 받은 게 더 커요.”
“만나서 받은 선물이요? 어...그럼 받은 선물 중 제일 비싼 게 뭐예요?”
“제일 비싼 거라. 아무래도 차겠죠? 제가 조금 이상한 차 탔더니, 바로 바꿔 주겠다고 하던데. 아니면 법률 지원 서비스일 수도 있겠네요. 변호사 친구가 뭐 궁금할 때마다 무료로 상담해주거나 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와플은 상심한 표정을 한 채, 터덜터덜 돌아가버렸다.
매니저는 그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면서도, 얼굴을 찌푸렸다.
“저 녀석, 나중에 또 지 컬렉션 중에 좋은 거 하나 자랑하러 오겠네요. 천재들은 괴짜라더니, 실력 좋은 선수들에게는 꼭 이상한 취미가 있어요 하여간.”
그리고 그 다음 주.
와플이 또다시 연습실에 찾아왔다.
XTC 선수들은 와플이 어떤 물건을 갖고 올지를 기대하며 연습실로 모여들었다.
“아예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 아닐까요? 그 왜, 팬이랑 선수랑 사귀는 케이스가 무척 많잖아요. ‘팬에게 받은 선물 중 가장 가치 있는 건 이 사람이에요. 몸도 마음도 준다고 했거든요.’ 라던가.”
“티웨이, 너 이상한 걸 너무 많이 봤어. 만화사이트 꺼라.”
하지만 와플은 오후가 되도록 오지 않았다.
때문에 모두가 오늘은 안 오는가보다 생각하며 연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쯤, 연습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플이었다.
“나 왔어요! 그리고 오늘은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제 비장의 컬렉션이에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의 와플의 손에 들려있는 상자로 모아졌다.
와플은 그 상자가 보물이라 된다는 듯, 소중하게 들고 있었고, 이내 하얀색 장갑을 끼고는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나온 것은 한 음악앨범으로 보이는 무언가 였다.
“이건...CD?"
“그냥 CD가 아닙니다. 송하니 2집 앨범 골드 에디션이라고요! 보고도 모르시겠어요?”
-에이, 뭐야.
-난 또 뭐라고.
다른 사람들은 실망하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버렸고, 와플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외쳤다.
“야, 티웨이! 너도 송하니 팬이잖아. 이게 안 놀랍단 말이야?”
“근데 이 사람, 가수에요? 프로게이머 아닌가?”
“본업은 프로게이머죠. 앨범 내는 건 부업이고요. 이래서 송알못들은. 쯧쯧.”
정명이 이 대화를 받아줘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도중, 에리가 참견하듯 말했다.
“정명, 지난번 받은 거 있지 않아? 이거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지난번이요?”
“그 왜, 이곳으로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왔던 택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아, 그거요? 어디 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잠시만요.”
에리가 말하는 것은 몇 개월 전 송하니에게서 받았던 택배였다.
에리의 말에 겨우 그것을 떠올릴 수 있었던 정명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서 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명은 마침내 한 먼지 쌓인 상자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거 맞나? 연습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받았던 것 같은데. 그땐 하도 정신이 없어서 확인만 하고 창고에 넣었지.’
중국 가서 힘내라고 송하니에게 받았던 무언가 였지만, 음식물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마자 창고에 갔던 비운의 물건이었다.
정명은 그 상자를 와플의 앞에서 꺼내들었다.
“어? 이, 이건...? 다이아몬드 에디션?”
“다이아몬드 에디션이 뭔데요?”
와플은 정명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멍하니 그 물건을 쳐다보았다.
“허, 이 물건을 여기서 볼 줄이야. 당신, 제법이군요.”
“당신거랑 비슷해 보이는데요?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정명, 더 이상 저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다이아몬드 에디션은 매니아로써도 구하기 힘든, 초 희귀 아이템이란 말입니다. 그런 걸 갖고 있는 당신이 이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니, 저를 놀리시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네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정명은 그냥 입을 다물고 알아서 상상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뭔가 송하니 오타쿠 같은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졌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꼭 더 좋은 컬렉션으로 당신을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와플은 터덜터덜 연습실을 나갔다.
하지만 놀라우리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그가 나가든 말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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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이 다녀간 뒤로, 또다시 2주가 지났다.
막 경기를 마친 XTC는 선수 대기실을 향해 걷고 있었고, 매니저는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와, 진짜. 엄청 세네요, 저 녀석들. 역시 리그에서 상위권을 도맡아 하는 팀다워요.”
오늘 패배를 함으로써, XTC의 성적은 3승 2패가 되었다.
매니저는 진 게 뼈아프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팀 내부에서는 이것도 상당히 좋은 성적이라고 평가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붙었던 팀이 다들 만만치 않은 팀들이었으니 이정도만 해도 선방했다는 것이다.
걱정이 끊이질 않아 보이는 매니저에게 정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다음 상대는 더 강한 상대지만요. 아무래도 다음 경기 또한 질 확률이 높은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다음 상대 팀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죠?”
“예. 김준상이라는 사람이에요. 친하지는 않은데, 안지는 오래되었죠. 제가 OMA시절에 처음으로 상대했던 한국 팀의 원딜러였어요. 그 때는 완전히 박살이 났었는데. 하하. 한국 2위 팀이랑 북미 중위권 팀이랑 대결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돼요.”
정명의 다음 상대는 지난 시즌 중국 3위팀 AAIG 게이밍. 한국에서 손꼽히는 원딜러였던 김준상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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