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아줌마, 돈 갚아요 (3) >
“잠시만요! 클라이언트 오류 때문에, 30분 후에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장비를 세팅하던 스태프가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 말에 열심히 작전을 구상하던 사람들은 맥이 풀렸다는 듯, 화장실을 가거나 음료수를 먹으러 자리를 떴다.
‘오늘따라 엄청 활기가 넘치네. 아무래도 저 사람들 때문이겠지. 유명한 배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배우와의 콜라보레이션’ 특집에 참여한 게스트들은 총 6명.
그들은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부 배우들이라 그런지 여섯 명 전부 가만히 있어도 주목을 끄는 외모들을 자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가 기회라 생각한 사람들은 그런 배우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요청하기 바빴다. 스크린 화면에서나 보던 사람들을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정명은 그것이 남 일이라는 듯, 구석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배우들이 누군지 전혀 몰랐으니까.
‘누가 누군지 몰라서 즐겁다는 연기도 못 하겠네. 저기 붉은 머리 여자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배우들에게 시선이 돌아간 것은 에리도 마찬가지였다. 에리는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심호흡을 했다.
“나도 사진 찍어달라고 해도 되겠지? 나 저 사람 팬인데. 엄청.”
“누구요?”
“이디. 이디 넬슨. 저기 붉은 머리 여자 말이야.”
에리가 가리킨 것은 에리와 비슷한 장신의 여자였다.
정명이 보기에, 이디는 그 상황이 무척이나 지루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사진 찍어달라고 해도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리는 장신의 붉은 머리 여자에게 다가가서는, 슬쩍 카메라를 꺼냈다.
“저기, 이디. 같이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저기, 저...”
이디는 우물쭈물 하고 있는 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에리의 손을 꼭 쥐었다.
“오, 에리! 나 당신의 팬이에요!”
“어? 제 팬이요?”
“네. 저, 당신이 나온 경기는 모두 챙겨봤어요. 데뷔전부터, 월드챔피언십의 경기까지요. 사진이요? 이리 오세요. 그리고 번호도 좀...”
‘다행이네. 이런 소소한 재미라도 얻을 수 있어서.’
정명은 할 게 없었기에, 그런 시끌벅적한 광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런데 그런 정명의 뒤로, 갑자기 한국어가 들렸다.
“와, 저 두 사람. 그림이네, 그림이야. 역시 영화배우는 다르다, 달라.”
그런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정명을 마주보며 섰다.
“한국말 되시죠? 해외에 오래 있다고 까먹은 거 아니죠?”
“네. 그건 아닌데, 당신은?”
“최성렬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즌부터 OMA에 합류한 사람이에요.”
‘아, 이 사람이 그 OMA가 비싸게 주고 사왔다는 그 원딜러...’
정명은 성렬이 입고있는 OMA의 유니폼을 슬쩍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보다 누가 영화배우라고요?”
“누구겠어요? 저기 붉은머리랑 노랑머리 여자 말이에요. 역시 성형이다 뭐다 해도,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다니까요. 안 그래요?”
성렬은 에리를 못 알아보는 듯 했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영어가 아예 안 되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였다.
“역시 미국 오길 잘 했다니까. 완전 눈 호강 한다. 그러고 보니, 정명 씨는 뭐 하러 중국으로 갔어요? 솔직히 중국 애들은 좀 별로지 않나?”
“조심해요. 그런 말, 미국에서 하고 다니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어요.”
“허어, 그래요?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 아닌가? 어이없네, 참.”
정명은 2분도 채 안 되는 대화를 통해, 성렬이 무척 짜증나는 타입의 사람인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서둘러 대화를 끝내려는 정명에게, 상렬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OMA의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벤트전이기도 해서 살살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지금 감독님한테 연락 왔는데, 꼭 이기라고 하시네. 배우들 많이 나와서 시청률 좋을 거니까, 지는 모습 보여주면 안 된다고.”
“OMA 감독님이요?”
“예. 무척 좋은 분이에요. 서양인이면서, 한국을 엄청 좋아한다니까요?”
“음...”
정명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영어로 욕을 내뱉었다.
[아, 그 십새끼...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
“예? 뭐라고요?”
“좋은 감독을 둬서 좋겠다고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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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A 시절, 정명의 자리는 항상 가운데였고, 에리는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바텀 듀오를 서게 된 에리와 정명은 바로 옆 자리에 앉게 되었고, 에리는 그런 자리배치를 어색하게 바라봤다.
“정말 괜찮아? 지금이라도 미드로 바꾸는 게 어때?”
“괜찮아요. 저도 솔로랭크에서 원딜 좀 해 봤어요.”
“그래. 어차피 대회 경기도 아니니까. 져도 상관없겠지. 이벤트전인데...”
에리가 자신에게 말 하듯 중얼거렸지만, 정명은 질 생각이 없었다. 그 OMA의 감독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무조건 이긴다. OMA의 감독도 엿 먹이고, 에리의 기도 살려주고. 일석이조겠네.’
상대 바텀듀오는 북미의 유망주 서포터, 그리고 OMA가 비싼 돈을 들여 영입했다는 한국인 원딜러, 최성렬이었다.
정명은 방금 전 살펴봤던 최성렬의 능력치를 떠올렸다.
‘아까 봤을 때, 최성렬의 피지컬은 80이 넘었지. 확실히 비싼 값을 주고 사올 만 해. 피지컬 80 이상은 재능의 영역이니까.’
평소 같았다면 무조건 피했을 싸움이었다. 하지만 정명으로써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당당히 원딜러 캐릭터를 선택했다.
‘스킬 사용.’
[임시 동맹] 스킬을 사용합니다.
-같은 라인 보너스! 팀워크가 한 등급 더 상승합니다.
-서포터와의 팀워크가 A-랭크로 유지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과 서포터는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임시 동맹 스킬은 지난 번, 판단력 80과 오더 80을 달성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스킬이었다.
그리고 상급 스킬이 발동되자마자, 정명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이거다. 아무리 피지컬이다 뭐다 해도, 결국 이 게임은 팀 게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니까.’
정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리를 쳐다봤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지 않아요?”
“으응, 그런 것 같기도 하고...정명아. 우리가 이렇게 호흡 맞춰보는 거 처음이지? 이상하게 익숙하네...”
지금으로써는 정명이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상대는 조시와 에리 뿐. 정명은 다른 선수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상대는...악마 사냥꾼이랑 미노타우루스네요. 정석적인 조합이죠? 우리처럼.”
정명의 캐릭터는 복수자, 그리고 서포터는 영혼수집가. 바텀듀오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었다.
“에리, 저기에 와드...”
“이미 했어.”
라인전에서 원딜러 포지션은 그다지 할 게 없다.
상대를 잡아두는 상태이상 스킬보다는, 오로지 많은 딜을 뿜어내는 데 최적화 되어있는 스킬만 잔뜩 있으니까.
때문에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서포터의 몫이다.
에리는 미니언 밖으로 살짝살짝 얼굴을 내미는 상대 원딜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각 나온 것 같은데...싸워도 되지?”
에리는 상대 원딜러가 한국에서 꽤 잘 나가던 선수라기에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정명은 단호하게 말했다.
“예. 정글러 동선만 확인되면 바로 들어가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 없어요. 말하면 늦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허락을 구하는 사이에 타이밍을 뺏겼다.
그리고 각이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상대의 서포터가 정명에게 달려들었다.
“마이볼!”
에리는 그렇게 말하며, 미노타우루스의 가장 위협적인 스킬연계인 Q+W콤보를 바닥 쓸기로 쓱, 밀쳐냈다. 무척이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오, 에리. 반응 좋은데요?”
“보고 쓴 게 아니라, 대충 예상한 거지. 스킬을 쓰겠다 하는 타이밍이 있으니까.”
그 후, 바텀 라인전은 일방적으로 흘러갔고, 정명은 상대와의 CS 격차를 두 배로 벌렸다.
만약 프로 대회였다면, 여기에서 게임은 반쯤 끝났다고 할 수 있을만한 격차였다.
하지만 정명의 팀에 속해있는 게스트들이 탑에서 솔로킬을 당하거나 했기에 균형이 맞춰졌고, 게임은 중후반까지 이어졌다.
“나! 나 랜턴 태워줘, 에리!”
콜론이라는 팀원이 죽기 직전, 에리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콜론은 그다지 잘 하지 못했으므로, 에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미안, 스킬 아껴놔야 해서...”
그리고 PD는 그 모습을 보며 킥킥 웃으면서도, 카메라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OMA 선수들 표정 잡아. 그렇지.”
“약이 많이 올랐나보네. 그런데 이상한데요? OMA 봇 듀오면 GLG 봇 듀오를 상대로도 팽팽했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밀리나?”
“글쎄, 이벤트 전이라 설렁설렁...한 것 같지는 않고, 이따 인터뷰에서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PD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정명의 캐릭터가 상대의 넥서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
“다들 수고했어요.”
“역시 프로들은 잘하네. 아무것도 못 했어.”
“어휴, 다이아라고 엄청 까불더니. 똥만 싸냐?”
게임이 끝난 뒤.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긴 팀 쪽에서만.
에리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헤헤 웃었다.
“저기 있지. 게임이 꽤 잘 되는 것 같아.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OMA에서 아이작 이랑 호흡을 맞췄을 때보다 훨씬 더.”
“그거 듣기 좋은 말이네요. 이참에 현역으로 복귀하는 건 어때요?”
정명의 장난 섞인 말에, 에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네. 조시가 손목 부상으로 수술 받아야 한다는 것 들었어. 휴, 나도 이제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어라, 당신도 손목 안 좋아요?”
“응, OMA시절, 나 혼자서 능력이 무척 떨어지는 것 같아서 엄청 혹사했으니까. 그리고 손목뿐만 아니라, 체력도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고. 아무튼 그래.”
아프다고 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정명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아픈 데가 많은 거야, 씁쓸해지게.’
1시간 후. 모든 방송 일정이 끝났다.
그리고 정명이 호텔로 돌아가기 전, PD가 정명에게 다가왔다.
그는 방송에 쓸 거리가 많아졌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무척 좋아보였다.
“정명! 혹시 이번 방송 나오려고 연습이라도 했어요? 둘의 호흡이 장난이 아니던데.”
“설마요. 평소 실력이죠.”
“그래요? 그렇다면 에리를 코치로 돌리기엔 아까운 것 같은데. 다시 선수로 할 생각은 없대요?”
PD의 말에, 정명은 쓰게 웃었다.
“에리도 여러모로 건강이 안 좋아서. 자기 말로는, 게이머 연습량을 이겨내기 힘들 것 같대요.”
정명의 말에, PD는 아쉽다는 입맛을 다셨다.
“조금 아쉽네. 그 정도의 플레이를 계속 보여준다면, 북미에서 바로 상위권으로 치고나갈 수 있을 텐데. 아무튼 기대해. 경기도 그렇고, 토크파트도 그렇고. 무척 재밌는 방송이 될 것 같아.”
그리고 에리 또한, 방송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재밌게 편집됐으면 좋겠다. 정명이 너, 오랜만에 나오는 방송이잖아.”
“저야 상관없는데, 에리야말로 그렇지 않아요? 팀원들이 무시한다면서요.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다면, 분명 생각이 바뀔 거예요. 코치가 자기들보다 잘 하는데, 당연히 닥치고 따라야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헷.”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슬슬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정명은 호텔방에서 달력을 보며 귀국 날짜를 잡고 있었다.
‘방송 촬영했던 걸 보고 갈까 말까. PD말로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될 거라고 했는데.’
PD를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은 북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슈퍼플레이를 연달아 보여줬다며 정명과 에리의 플레이를 극찬했다.
그리고 이번 방송이 화제가 되면 후속 방송도 내보낼 생각이라며 신나해 했지만, 정명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금방 중국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냥 중국으로 먼저 가야겠다. 다른 애들 연습하는 것도 봐야하고. 더 이상 놀고 있을 수가 없네.’
그리고 정명이 특집방송은 중국으로 가서 다운받아보자고 마음을 굳힐 때 쯤, 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왠지 울먹울먹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구단에서 권고사직이 내려왔는데...어쩌지? 내가 선수들에게 평판이 별로인 것 같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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