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아줌마, 돈 갚아요 (2) >
쿠론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너, 그동안 북미 팀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
“호들갑 떨기는. 야, 내가 중국 간 게 지난 시즌이야. 5개월 만에 바뀌었으면 얼마나 바뀌었으려고?”
“맞아. 네 말대로 북미야 여전히 비슷해. C90, GLG, TBM 세 팀이 다 해먹고 있는 거 말이야. 원래는 GLG 대신 OMA가 치고 올라왔었지만, 이제는 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지.”
쿠론은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구강 청결제를 입에 칙칙 뿌리고는 말했다.
“OMA가 구단에 돈 엄청 쏟아 붓고 있다고 하더라고. 한국 사람들도 2명이나 영입하고, 한국처럼 형제 팀도 만들고. 돈지랄이지.”
그 말을 끝으로 쿠론은 입을 닫았지만, 정명은 쿠론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기존 선수들한테는 그 따위로 대우를 했냐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그것은 정명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대답해줄 말이 없었기에,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쿠론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야, 너한테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부탁하는 자세가 아니라서 맘에는 안 드는데, 얘기는 해 보렴.”
“OMA는 네가 어쩌지 못 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건 됐고, 그 대신 피닉스 연습실 와서 우리 엄마 기좀 살려주고 가. 너 엄마랑 친하잖아.”
정명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쿠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에 에리에게 들었던 대로, 에리의 말을 잘 안 듣는 팀 피닉스 선수들의 이야기였다.
“여기 애들 성격 알잖아. 말 더럽게 안 들어. 그러니까 네가 와서 애들 좀 혼내주고 가면 안 되냐? 네 말은 잘 들을 거 아냐.”
“뭔 소리야. 걔네들이 내 이야기를 왜 들어?”
“너 유명하잖아. 중국 가서도 한 번에 1부 리그 뚫었을 때, 레딧에서 꽤나 난리가 났다고. 그러니까 네가 가서 이야기 좀 하면, 잘 먹힐 것 같은데.”
완전히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정명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다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면, 에리의 입장만 곤란해질 거야. 너도 괜히 딸이랍시고 어설프게 끼어들지 마라.
“선수가 은퇴하고 코치가 됐다 하니까, 퇴물이 새 일자리 찾아서 기웃거린다고 생각하나봐. 지금 현역으로 뛰어도 충분한 사람인데!”
“아니, 솔직히 조금 힘든 것은 맞지.”
“이씨, 뭐라고?”
쿠론이 정명을 올려다보며 눈을 치켜떴지만, 정명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원래 프로게이머 나이 30을 넘으면 은퇴를 바라보는데, 에리는 이미 30대 중반이잖아. 자연스러운 거라고.”
쿠론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 엄마는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그만 둔 거거든?”
“안다.”
“네가 뭘 알아! 아까는 힘들다며!”
“나야 뭐, 에리랑 같은 팀이었으니까 잘 알지. 아무튼, 네가 말한 건 생각해 볼게.”
.......
다음 날.
정명은 조시와 함께, 아침부터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딜레이로 인하여 시간이 남게 되자, 무척이나 심심했던 정명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꺼내놓았다.
“에리네 집 꼬마가 그런 소리를 했어요? 꼬마 녀석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꼬마는 무슨, 18살이면 다 컸지 뭐. 그보다 너는 어때, 너도 막 OMA를 부셔버리고 싶고 그러냐?”
정명의 말에, 조시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구단 입장에서는 계약서 내에서 움직인 것이니, 문제는 없겠죠? 정명은요?”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꼬마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했다. 그 돈, 기존 사람들한테나 투자하지, 왜 돈 많이 써서 새로운 팀을 키우려고 하는 거야? 나 참.”
정명이 기억하기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 또한 월드챔피언십이라는 성적표 치고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마치 재계약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듯이.
정명의 불평에, 조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 하기는 뭐 한데요, 제가 이렇게 팀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으니 구단에서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이미 실력이 검증된 사람들이 있는데, 새로 사람들을 뽑아서 처음부터 시작할 이유가 있다고? 뭔데? 그 이유가.”
“선수들이 말을 안 듣잖아요. 특히 정명 때문에.”
“나? 난 협조 잘 했어. 구단하고 관계도 원활했는데?”
“그게 아니라, 팀원들이 돈 주는 사람보다 정명의 말을 더 잘 들었다는 거예요. 아니꼽게 보일 수도 있겠죠. 특히 새로 온 사람 성격대로 라면요.”
“아, 그 사람. 그렇지. 그런 사람이긴 했지. 명예욕도 조금 있었고 말이야.”
둘은 그렇게 10분 동안 OMA의 감독에 대한 험담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험담은 조시가 시계를 보면서, 끝이 났다.
“시간 됐네요. 저 이만 갈게요.”
“그래, 치료 잘 받고, 나중에 또 연락해. 꼭 미소녀들이 몰려있는 학원에 취업하고.”
“예. 실패하면 부모님이 하신다는 PC방에라도 꽃아 넣어 주세요.”
둘은 낯간지러운 인사 대신, 시덥잖은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게 조시는 한국으로 떠났다.
‘뭐, 금방 볼 수 있겠지.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간단한 수술이니까.’
그리고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정명은 지난 번, 방송국에서 자신에게 방송 출연을 요청했던 PD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 PD님. 전에 말하셨던 방송이요, 지금 그 얘기 아직도 유효해요? 거기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나가고 싶은데.”
@@@@@
정명이 조시와 떠들고 있을 시각.
방송국 안에서는 PD가 방송 작가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지금 스케줄 되는 프로게이머는 꽤 많은데요. 몇 사람에게 연락 해 보면...”
“방송에 나갈 사람이 없잖아, 방송에 나갈 사람이. 적당히 인기가 있으면서도, 카메라 앞에서 얼어있지 않을 사람 말이야.”
“그럼 코빅스는 어때요? 요즘 뜨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실력도 괜찮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도 PD는 고개를 저었다.
“실력이 괜찮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게 아니야. 얘는 말을 잘 못 하잖아. 말문이 트였다 싶으면, 이상한 아저씨 개그나 쳐대고.”
“그럼 OMA 사람들은 왜 넣은 거예요? 얘네들, 신인이라 인지도도 얼마 없고, 한국인인 사람은 영어도 잘 못 한 다던데.”
PD는 대답대신, 제작비 예산 현황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OMA를 운영하는 기업에서 광고 많이 댔거든.”
“아...”
방송작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OMA 돈 엄청 쓰네요. 나 같으면 차라리 이 돈으로 기존 선수 대우나 잘 해줬을 텐데. 경력직 자르고 신입을 뽑은 꼴이잖아요?”
“아, 그건 안 돼. 그 사람, 무척이나 독점욕이 많은 사람이야.”
“무슨 소리에요? 독점욕?”
“그런 게 있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 말 잘 들을 사람들만 갖다 놨다 이거지.”
그리고 잠시 후.
끙끙대며 모니터를 바라보던 PD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작가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는 PD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스폰서 아니면 국장님인가보군. 저 짓거리, 참 징그러우니까 그만 뒀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PD는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야, 코빅스한테 연락 했어?”
“아직요.”
“잘 됐다. 걔는 리스트에서 지우고, 정명 끼워 넣어. 그리고 에리도. 아, 에리 알지? 지금 은퇴하고 코치하고 있는 사람 말이야.”
작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아는데...괜찮을까요? 그 사람들이랑 OMA 사람들 섞어놓는 것 말이에요. 제가 소문 듣기로는, 나쁘게 헤어졌다면서요.”
@@@@@
[네,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그 일은 보류하고요. 네.]
그리고 정명이 중국에서 온 전화를 끊자마자, 에리가 놀랐다는 듯,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오오, 중국어야? 엄청 잘 하는 것 같은데. 대단하다!”
“아, 예. 조금...”
XTC 구단에서 휴가 시즌에 전화를 하는 것을 보니, 슬슬 중국에서 해야 할 일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섬머리그를 대비하려면, 지금의 방송은 이번 휴가에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 될 지도 몰랐다.
‘한 일주일만 더 쉬었다가 중국으로 돌아갈까.’
정명은 원래 방송을 나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끔은 얼굴이라도 비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방송출연 요청을 승낙했고, 에리와 함께 방송국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 다들 예쁘다. 신기해.”
“다들 영화업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고 하니까요. 외모야 다들 좋죠.”
이번 방송은 일종의 영화 홍보성 방송이었다.
프로게이머 2명, 배우 3명이서 팀을 맺고 친선전을 벌인다.
그리고 게임을 하면서 간간히 대화를 나누는, 경기라기 보다는 친구들끼리 PC방에서 떠들며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정명은 반대편 대기실에서 OMA 팀복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이 OMA사람이에요? 한 명은 한국인인 것 같고...둘 다 모르는 사람이네.”
정명, 에리, 조시가 짤렸을 당시 OMA에 남은 사람은 2명. 황웨이와 아이작이었다.
하지만 정명은 그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으므로, 딱히 연락은 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두 사람도 곧 계약 해지 한다는 소문이 있더라. 이제 연락을 안 해서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래요? 예전 색깔을 다 지워버릴 모양이네. 그러면서 OMA라는 이름은 왜 쓰는 거지?”
“OMA의 예전 명성에 묻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들이 월챔 8강 이상의 성적을 낸다면, 뭐. 그때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이름으로 바꿀지도 모르지.”
다들 영화인이라서 그런지 외모가 출중했는데, PD의 말로는 게임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정명에게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여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여. 코코에요. 오늘 잘 부탁해요!”
“예.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번 이벤트전 있잖아요, 꼭 이겼으면 좋겠어요. 지는 쪽에서 기부금을 좀 많이 내기로 했거든요.”
“열심히 해 볼게요. 하하.”
그리고 잠시 뒤. 정명은 에리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그녀의 정보를 띄워 올렸다.
[미어스 에리]
피지컬 (53/55)
정신력 (55/83)
오더 (65/78)
판단력 (81/92)
결속력 : 71/100
-오랫동안 신뢰를 쌓은 동료입니다. 이 사람은 당신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캐릭터가 같은 화면에 있을 시, 판단력이 +4, 정신력이 +3 상승합니다.
상태 : 잠정적 은퇴
‘음, 역시 현역으로 뛰기엔 조금 애매하긴 하네. 만약 에리를 쓴다면, 서포터로 돌려서 오더를 맡기는 게 최선이려나. 아무래도 나이가 30을 넘어가면, 현역으로 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은 법이니까.’
하지만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결속력이 [임시 동맹]스킬 사용 커트라인인 65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조시보다 살짝 높은 정도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에리는 게이머를 거의 은퇴한 상태였기에, 의미는 그다지 없었지만, 이번 이벤트 경기에서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이런 진지한 게임 안 한지 오래 됐는데. 못 한다고 욕 하지는 마?”
“진지한 경기 아니에요. 편하게 해요.”
개인 키보드나 마우스는 물론이고, 대회용 부스도 없다. 오히려 게임하며 서로 떠들 수 있게 상당히 가깝게 자리를 붙여 놨다. 완벽하게 이벤트 대회인 것이다.
경기를 준비하기 전, 이 게임을 꽤나 잘 한다고 자랑했던 다이아리그 유저, 코코가 라인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미드는 비워놨는데요.”
정명은 배우들이 선호하는 라인에 대해 물어본 뒤, 상대편에 있는 OMA소속 선수들에 대해 물었다.
“OMA 선수도 있다 했죠? 그 사람은 라인 어디 서요?”
“OMA 선수 두 명은 원딜러랑 서포터에요. 듣기로는 원딜러를 무척 비싸게 모셔왔다고는 하던데,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에요.”
“아, 그래요? 무척 잘 아시네.”
정명의 칭찬이 기뻤는지, 코코는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 정명은 팀원들이 가야 할 위치를 하나하나 정해주기 시작했다.
“미드는 코코 당신이 서세요. 저는 에리와 함께 바텀 듀오로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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