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나는 자신 있는데? (2) >
며칠 후.
어느새 정명의 첫 번째 중국 매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대륙에서의 첫 번째 경기이기에 조급해할 법도 했지만, 정명은 자신의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하여 차근차근 경기를 준비 해 나갔다. 언제나 하던 것처럼.
그리고 막 연습게임을 마친 정명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OMA에서 해고되고 백수가 되었던 사람이자 귀여운 개를 키우는 남자, 전 OMA의 코치였다.
“뭔가 슬슬 되는 느낌인데? 처음에는 솔로랭크 하는 것처럼 완전히 오합지졸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모양새가 나오잖아.”
아무리 잘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 놓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호흡은 맞춰보고 경기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오합지졸.
형편없이 패한 뒤, ‘아오, 내가 저런 놈들한테 지다니.’ 따위의 말이나 하게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XTC는 드디어 프로 팀이라고 할 만한 팀워크를 갖췄다. 정명이 생각하기에는 경기에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실력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대충 팀이라고 할 만한 수준까지는 왔군. 어디 가서 부끄럽지는 않을 수준으로 말이야.’
정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전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시스템 창을 띄웠다.
[팀의 결속 랭크 : D+]
*호흡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팀입니다.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호흡이 맞는 듯 하지만, 조그마한 변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D+면, 내가 막 OMA에 들어갔을 때의 그 랭크 아닌가? 나름 신경 써서 연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네.’
하지만 정명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실력을 보완해줄 만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까.
‘여기에 버프 효과를 합하면, 꽤나 그럴듯해질 거야. 막 리빌딩을 마친 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음 연습게임을 시작하기 전, 정명은 곧바로 오오라 효과를 작동시켰다.
[승리의 오오라 : 팀 전체의 결속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승리의 기운이 팀원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팀의 결속 랭크 : C+]
*리더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의외의 변수가 나온다 해도, 리더가 정확한 오더를 내린다면 팀원들은 금방 회복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효과를 확인한 정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좋아. 여기서 조금만 더 실력을 끌어올린다면, 이번 스프링 리그에서 곧바로 승강전을 치를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어.’
모든 게 계획 대로였다.
팀원들은 자신을 받쳐줄만한 팀워크를 갖추었고, 실제로 분위기도 좋았다.
옆에서 정신 사납게 허둥거리고 있는 매니저만 제외하면 말이다.
“어째서 대진표가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녹스가 아니라, 엔터인 거야. 돈이나 받아먹지 말던가!”
그 모습을 보며 정명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바보 같긴. 언젠가 저렇게 뒤통수 맞을 줄 알았다. 돈만 주면 다 해주는 녀석들을 너무 믿는 거 아냐?’
대중들에게 리그의 대진표가 발표되기 직전, 갑자기 대진표가 조금 바뀌었다.
하위권 팀이던 녹스 대신, 중상위권 팀 엔터프라이즈로.
그리고 그 곳은 지난 번, 정명이 대신 술을 샀던 한국의 이원희가 있던 곳이었다.
이원희는 그 때 정명의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고, 대진표를 다시 바꿔버렸다. 자신의 상처 받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정명은 바뀐 대진표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난 상관없어. 녹스던, 엔터던간에 자신 있으니까.”
@@@@@
그로부터 3일 뒤.
어느 새, 정명의 첫 번째 경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방송국에서, 조시는 건물의 크기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와, 사람 많은 것 좀 봐. 이거 2부 리그 맞아요? 미국에서 이정도로 사람이 차려면, 거의 결승전 급은 되어야 하는데?”
“내 말이. 저쪽은 복잡하니까, 뒤로 돌아가자. 아, 암표 안사니까, 꺼져요.”
정명은 암표상에게 파리 쫓듯 팔을 휘휘 내젓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명이 경기장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전자]
안정적인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의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당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십시오.
목표 : 중국 리그에서의 첫 승 달성 보상 : [초급 중국어] 습득
‘뭐야, 이거 진짜야? 중국어를 내 머리에 집어넣어 주겠다고?’
이제는 퀘스트와 보상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꽤나 익숙해진 정명이었지만, 이번 퀘스트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미국에서 건너 온 뒤로, 정명과 조시는 틈틈이 중국어 책을 들여다보며, 중국어를 중얼중얼 공부하고 있었다.
비록 경기 중에는 핑 따위의 신호를 통해 의사소통이 원활하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계속 거주하려면 기본적인 언어는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이번 퀘스트에서, 중국어 공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 것이었다.
‘내가 받은 퀘스트 보상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마음에 드는 보상이야. 중국어 더럽게 어려워서 공부하기 짜증났는데, 아주 잘 됐어.’
그러던 그 순간, 드디어 정명의 상대가 경기장에 도착했다.
관중석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하는 여섯 명의 사람들, 팀 엔터프라이즈의 선수들이었다.
정명은 자신의 상대가 될 사람을 응시하며, 옆에 있던 매니저에게 흘리듯 말했다.
“이원희인가 뭔가 하는 놈이 미드로 왔으면 두드려 패줬을 텐데, 아쉽네요.”
“네. 엔터의 미드라이너는 레몬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20살. 슈퍼 루키라며 구단주가 직접 모셔온 선수죠.”
“음, 빨간 머리로 염색한 저기 저 사람 맞죠?”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명은 빨간 머리 남자의 상태창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레몬]
피지컬 : 72/85
운영능력 : 60/75
팀워크 : B-
포텐셜 : B
‘피지컬이 70이라...확실히 유망주라고 불릴 만하네. 제법이야. 나한테는 안 되지만.’
정명은 자신의 상태창과 비교해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80/100)
정신력 (70/100)
오더 (71/100)
판단력 (75/100)
잔여 포인트 : 23120
잔여 포인트 2만. 지난 번, 월드챔피언십에서 벌었던 포인트가 조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정명은 포인트를 어디다 쓸지 천천히 고민해 보기로 하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밴픽이 시작되었다.
......
-정명이 환영술사를 택했습니다. 의외의 픽이죠? 환영술사가 나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니까요.
-엔터의 미드라이너, 레몬이 선택한 캐릭터는 파이어맨이군요. 스킬을 연계해서 상대를 태워버리는 데 적합한 캐릭터지요.
환영술사는 한국, 그리고 한국을 따라하는 북미에서는 이상할 것 없는 픽이지만, 중국에서는 별로 인기 없는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는 초중반에만 강하고, 후반에 가면 잉여 스럽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에 별로 선호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XTC의 탑 라이너, 티웨인은 정명의 환영술사를 보며 우려를 표했다.
“조심하세요, 북미와는 달리 중국 스타일은 엄청 공격적이니까요.”
“걱정 마. 이번 경기에서 만큼은 내가 더 공격적일걸? 광전사처럼 플레이 해볼게.”
정명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니언은 뒷전이고 미친 듯이 딜 교환을 시도했다.
-레몬 선수로써는 정말 짜증나겠군요. 스턴으로 잡아넣기 전에, 보란 듯이 빠져버리니 말입니다.
-정글러를 불러보지만...안 통했군요. 정글러가 쫒아간 것은, 분신이었습니다. 분신 컨트롤을 무척 잘 했네요.
빠른 기동력을 살린 일방적인 딜 교환.
보란 듯이 날아오는 불똥을 피한 뒤, ALT + 3 키를 눌러, 크하하 웃는 모션을 취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결국 스킬 한 방에 데미지가 쑥쑥 박히는 것을 확인한 레몬은 첫 귀환 타이밍에 마법 저항력 아이템을 구비해 왔다. 이것으로 정명에게 받는 스킬 데미지가 상당히 감소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딜러가 초반부터 방어 아이템을 사온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XTC는 유리한 상황을 계속 이끌어나갈 수 있었고, 정명의 환영술사는 홀로 미친 듯이 성장을 해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대치전에서, 정명은 네 개의 스킬을 전부 파이어맨에게 꽃아 넣었다.
네 개의 스킬이 파이어맨에게 전부 들어가기까지는 0.2초도 걸리지 않았다.
-터졌습니다! 레몬 선수의 파이어맨, 환영술사의 풀 콤보에 말 그대로 터져버렸습니다!
-이렇게 자꾸 터질 바엔, 방어 아이템을 한 개 더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물론 공격력은 조금 떨어지겠지만요.
당하는 측에서는 ‘아 시발, 이거 사기 아냐?’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순간적인 딜량.
한타를 해 보기도 전에, 딜러들이 하나 둘 짤리니 엔터 입장에서는 짜증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후반 가면 힘이 빠진다는 것도, 후반까지 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 난 후반까지 게임을 질질 끌 생각이 전혀 없어.’
그 이후는 정명의 독무대였고, 엔터의 선수들은 무력하게 1경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2경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양에서 온 사람들에게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라며 경기장에 응원 온 팬들은, 팀 엔터가 무력하게 박살나는 것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GG, 팀 엔터 선수들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나 보군요.
-다른 팀의 고민이 깊어지겠군요. 생각보다 강력한 침략자의 등장입니다.
......
[2부 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5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2:0 완승 보너스! 500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됩니다.]
‘엇, 2000 포인트? 이건 제법 쏠쏠한데?’
북미의 1부 리그에서 이겼을 때 받았던 포인트가 2000 포인트 정도였다. 지금 이긴 것이 중국의 2부 리그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포인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능력치를 올리는 데 드는 포인트를 생각하자면, 이것도 너무 낮은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1부 리그로 올라가야겠어.’
......
경기가 끝난 후.
무대 뒤에 있는 휴게실에서 한 커뮤니티 사이트 기자와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명은 중국에 와서 지금껏, 여러 번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왔으니까.
“이번 레몬 선수와의 대결은 어떠셨나요? 혹자는 그 둘의 싸움을 용쟁호투였다고 표현했습니다만. 미국에서 대결할 때보다 훨씬 힘들죠?”
기자의 질문에 정명은 자신 있게 답했다. 북미에서 인터뷰 했던 태도 그대로.
“아, 레몬 선수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보셨잖아요? 별 문제 없이 제가 이겼던 걸요.”
정명의 말에, 기자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레몬 선수는 떠오르는 잠룡이라고 평가되었던 선수입니다만, 구단의 스카우터들의 평가가 잘못 되었다는 뜻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미국 선수랑 비교 하시길래 말해 드린 것뿐이에요. 미국에도 저 정도의 선수는 꽤 많아요.”
정명이 솔직하게 말함과 동시에, 기자의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기자는 중국의 선수들을 고평가 해주기를 원했지만, 정명은 솔직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저 정도의 선수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봤다.’ 고.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자, 옆에 있던 매니저가 안절부절 못하며 정명을 몰아세웠다.
“인터뷰를 조금만 더 겸손하게 하셔야죠! 겸손이 미덕인 것 몰라요?”
“뭐가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매니저는 다음 번 부터라도 정명에게 얌전히 인터뷰 할 것을 요청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인터뷰를 거론하며, 그렇게 겸손하게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하지만 정명은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런 로봇같은 인터뷰가 재밌나요? 지금 당장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뭐, 욕을 엄청나게 먹거나 하면 생각 해 볼게요.”
“팀 엔터의 구단주가 중국 리그의 협회장을 맡고 있다니까요? 분명 위에서 한 소리 들을 거예요.”
정명은 ‘그래서 어쩌라고?’ 라 하며, 퉁명스레 대답해줄까 하다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알았기에 적당히 대꾸했다.
“그래요? 협회장이 뭐 별건가? 북미에서는 다들 하기 싫어해서 구단주들을 대상으로 제비를 뽑곤 했는데. 너무 걱정이 심하시네요.”
@@@@@
인터뷰를 끝낸 후, 숙소로 가는 차에서 정명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연락 5건, 메일 5개. 연락이 꽤 많이 왔네.’
정명에게 연락을 한 것은 정명의 친구들이었다.
요즘은 취업준비로 바쁜 자신의 동갑내기 친구들부터, 정명의 부모님,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팬들, 거기다가 최근 연락이 뜸했던 송하니까지. 모두들 정명에게 경기 잘 봤고, 수고했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명은 딸 자랑에 여념이 없는 에리의 메일을 보고 킥킥 웃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잘 살고 있나 보네. 나중에 미국 가면 한 번 놀러 가야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조금 피곤해했던 정명이었지만, 친구들의 안부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마음은 오래 가지 못 했다.
다음 날, XTC에게 썩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매니저는 정명에게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외쳤다.
“오늘 예정되었던 연습경기가 취소되었어요. 협회장이 움직인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다른 팀이랑 하면 되죠.”
“그게...우리 팀이랑 연습하겠다는 팀이 아무도 없어요. 완전히 고립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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