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정리, 스프링 리그 시작 >
“슬슬 하겠네. 새비 녀석이 내가 준 선물을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 한번 볼까.”
정명이 새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며칠 뒤.
정명은 다른 팀원들과 함께, 구단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TV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지금 이 시각. 새비가 코치를 맡고 있는 팀 코니와 피터가 속해있는 MI의 8강전이 한창 진행 중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명은 경기를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럭저럭 잘 하고 있나보군. 알려준 보람은 있다.’
2부 리그 팀과 1부 리그 팀 간의 대결.
누가 봐도 팀 코니의 전력이 열세라고 할 수 있었지만, 코니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MI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경기가 클라이막스로 향할 때 쯤, 정명의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8강전 하고 있어? 팀 코니에 있는 코치, 아는 사람이랬지?”
정명이 고개를 돌리자,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서 있는 에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에리는 수건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미안. 땀 냄새 나지?”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딱 좋을 때 오셨어요. 지금 한창 재미있어지려고 하거든요.”
정명이 턱짓으로 가리킨 화면에서는 MI 선수들의 캐릭터들이 부시 한곳에 뭉쳐서 매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코니측에서는 매복을 이미 예측하고 있다는 듯, 그들을 포위한 채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MI,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코니의 움직임을 보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죠?
-자, 팀 코니. 탱커를 먼저 던져 넣고...들어갑니다! MI는 낚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스킬을 탱커에게 쏟아 붓기 시작하는데요!
에리는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종이뭉치를 주워들더니, 종이에 적혀있는 글과 화면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탑 라이너 혼자 라인을 밀고 있을 때, 돌고렘 부시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을 확률 75%...와, 대단하다. 딱 들어맞았네!”
에리가 주워든 것은 피터의 팀, MI에 대한 분석 자료였다.
종이뭉치에는 그것 말고도 많은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정글러가 가장 선호하는 정글링 루트, 서포터가 시야 와드를 가장 많이 박는 위치, 심지어 탑 라이너가 캐릭터를 의미 없이 두 번 좌우로 움직이면 근처에 정글러가 있을 확률이 100%라는 습관까지.
MI 선수들의 플레이 패턴을 통계적으로 기록해 놓고 확률로써 정리해놓으니, 꽤나 살벌한 자료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에리는 감탄을 터트리다가도 이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게 빅데이터인지 뭔지 그건가? 그럼 혹시나 우리도 똑같이 당하면 어쩌지? 걱정되는데...”
“그건 괜찮아요. 이걸 경기에 당장 적용하기에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 많거든요. 변수들도 너무 많고요.”
“그래? 그래도 지금 저 사람들을 보면 제법 쓸모 있는 것 같아. 분석이라는 거.”
“기억력이 좋다면, 지금 이 수준의 분석이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요. 아마도.”
그렇게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던 도중, TV의 화면이 전환되었다.
게임의 화면이 아닌, 선수들이 부스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로 화면이 바뀐 것이다.
화면에 잡힌 MI 선수들의 모습은 게임에서 나오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무척 시끄러운 모습이었다.
“피터. 이 다음은 어떻게 하지?”
“어...어?”
“저쪽에서 백작 잡으러 가잖아! 막으러 가던가, 포기하고 용을 먹던가 해야지 어떡할 거냐고! 씨발. 답답하네.”
“아니, 그게...”
다른 팀원의 욕설과 함께,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정명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피터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림수가 번번이 막히다보니, 머리가 굳었군. 다급한 상황일수록 리더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야. 쩝, 그래도 옛 동료가 저렇게 욕먹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씁쓸하군. 아니면 내가 너무 호구일지도.’
...
첫 경기가 끝난 뒤.
쉬는 시간이 모두 끝났지만, 게임은 재개되지 않았다. MI의 요청으로 쉬는 시간이 10분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작전회의가 조금 길어지나보다 생각하며 경기 재개를 기다리고 있었고, 카메라는 무언가 격렬하게 토론 하고 있는 MI선수들의 모습을 잡기 시작했다.
그 화면에서 코치는 화났다는 듯이 피터에게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 있었고, 피터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뒤, MI의 오더가 바뀌었다는 해설자의 설명과 함께 게임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정명은 그 설명을 들으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결단, 아주 훌륭하군. 문제점을 바로 짚어냈어. 저쪽 코치진 또한, 상당히 우수한 모양인데...’
역시나 대기업이었다.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고, 머리 좋은 사람이 많다보니 좋은 의견이 바로바로 튀어 나온다.
오더를 바꾸고 치러진 다음 경기.
코니가 운 좋게 한 판을 따내기는 했지만, 오더를 바꾸자마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별 다른 일 없이 일방적으로 게임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코니는 1:2로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고, 정명은 입맛을 다셨다.
‘뭐, 괜찮아. 이 정도면 많이 흔들어 놓은 거지. 그리고...내가 직접 혼내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정명은 경기가 끝나자 다시 운동을 하러 돌아가는 에리. 그리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다른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조시는 헉헉대면서도 열심히 살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파....후....힘들어...”
다른 팀들이 열심히 연습하는 동안 OMA 선수들이 피트니스 센터에서 한가하게 운동을 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웨이홍과 아이작이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다가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한 명이면 용병이라도 구해서 어떻게든 출전 해봤을 테지만, 두 명이나 뻗어버리니 답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기권. 대회일정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때문에 그 이후로 OMA는 새벽 연습을 금지시키고, 정규 리그가 시작될 때 까지 체력 단련에 힘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명 또한 운동을 하다가, 다음 경기가 시작되자 다시 TV 앞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C90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러는 정명에게 또다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야. 뭐 보냐? 운동 안 할 거면 그냥 연습실 들어가서 보지 그래?”
정명에게 다가온 사람은 에리의 딸, 쿠론이었다.
처음의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몇 번 보다보니 그래도 정상적으로 대화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기에 쿠론은 거리낌 없이 정명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 또한 운동을 했는지 제 엄마처럼 땀투성이였고, 정명은 그런 쿠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아니, 조금 땀 냄새 나서.”
“뭐? 냄새라고?”
정명의 말을 들은 쿠론은 자신의 땀을 손으로 닦아내더니 정명에게 문질렀다.
“나 같은 미소녀에게서 나오는 것은 땀이 아니라 성수지 성수! 꺄하하하.”
“이런 미친...아 저리 좀 가 봐. 이거 봐야해.”
“뭔데?”
“C90의 경기.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팀이야.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런 C90의 8강전 상대는 전 윈터리그 3위 팀이자, OMA가 4강전에서 무척이나 힘겹게 잡았던 팀. GLG였다.
하지만 C90은 그런 GLG를 상대로도 밀리기는커녕 여유롭게 점수 차를 벌려나가고 있었다.
“특히 이 녀석들 좀 봐. 미드랑 정글 쌍둥이 듀오. 엄청 잘 하지? 일란성 쌍둥이라 그런지 호흡이 착착 맞는다니까. 요즘 제일 유명해.”
“흠, 뭐 그럭저럭 하네. 나한테는 안 되지만.”
쿠론은 잘 하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며 그들의 플레이를 가차 없이 깎아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춘기 소녀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이었지만, 정명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물론 지금 당장 붙는다면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쿠론이 밀리겠지만, 잠재력으로는 그녀가 위였던 것이다.
정명은 그런 생각을 지우며, 이번에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오는 반응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벨라지오 : 탈북미급 게이머 인정합니다. 이 사람들이라면 월드챔피언십에서 중국 팀이나 한국 팀을 이기는 것이 가능할 지도...
?아이고, 이놈아. 북미팀한테 또 속냐! 믿을 놈을 믿어야지!
스페이스 : ㄴㄴ. 잘 하긴 하잖아. 내가볼 땐 한국의 메카듀오인가? 걔네보다 더 나은 것 같던데 뭘.
?그것까진 아님.
?한 마디만 했으면 될 걸, 두 마디 해서 욕먹네.
스페이스라는 사람의 댓글은 그 뒤로도 수많은 반박 댓글이 달려 있었고, 거기에 더해 비공감 1000개 폭탄을 받으며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있었다.
쿠론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뭔데? 메카듀오?”
쿠론의 물음에 정명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한국에서 엄청 유명한 미드정글 듀오를 말 하는 거야. 그나저나 이 게시물은 어떤 한국인이 좌표라도 찍었나보네. 미국에서는 그렇게 알려진 사람들이 아닌데 댓글이 많이 달렸어.”
“흐음. 그래? 그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사람들이라.”
쿠론은 최강의 지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도 고평가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호승심이 발동한 듯, 인터넷을 뒤져 메카듀오의 플레이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오, 이 사람들인가. 음...음.”
“잘 하지?”
“과연. 썩 괜찮네. 내 라이벌로 삼아줘도 될 정도야. 뭐...그래도 내가 이기겠지만.”
“그렇지? 완전 잘 한다니까?”
“그건 그런데...잠깐. 근데 네가 왜 뿌듯해해? 기분 나빠.”
@@@@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토너먼트 또한 윈터리그 우승팀인 TBM이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았으나, 그 예측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토너먼트 대회의 우승은 신생 팀인 C90이 차지했고, TBM은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컴퓨터 앞에 앉아 C90 선수들의 인터뷰를 읽기 시작했다.
리포터 : 이제 막 출발한 팀인데도 불구하고, 마스터즈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하셨는데요. 기분이 어떠세요?
니어스 : 당연히 좋죠.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습니다.
펙토르 : 정말로 우리가 우승하다니, 꿈만 같아요. 처음에는 8강까지만 진출해도 운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터뷰 내용을 보자면, 마치 한국 사람들 같은 모양새였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떤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기존 북미의 인터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정명은 그 인터뷰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펙토르? 저놈은 그놈이잖아. 그때, 대회장에서 봤던.”
C90의 펙토르라는 원딜러는 정명이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선수들을 찾기 위해 찾아간 대회장에서, ‘이 사람들 다 쓰레기이니 올 필요 없다’ 는 말을 했었던 사람이 저 펙토르라는 원딜러였고, 정명은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명은 이내 그런 내용을 쿨하게 넘겼다.
‘하긴. 프로게임 판에서 성격 이상한 사람 보는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더 한 놈도 있는 걸 뭐.’
그리고 정명은 막바지 연습게임에 들어가기 전, 상태창을 한 번 열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70/100)
정신력 (50/100)
오더 (60/100)
판단력 (70/100)
남은 포인트 : 3821
‘좋아. 이제는 더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린다. 이 상태로 스프링 리그에 부딪혀 보는 수밖에.’
이제는 어지간한 포인트로는 스탯 1도 올리기 버거웠다.
때문에 차라리 스탯 보다는 스킬을 구매하는 것에 집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매 가능한 스킬도 무척 적었기에 정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뒤. 연습게임이 시작되었다.
정명의팀 OMA는 다른 팀과의 연습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스프링리그를 앞두고,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명은 빨빨거리며 맵을 돌아다니는 에리에게 핑을 찍으며 지시를 내렸다.
“거기 시야 와드 박혀있을 것 같은데. 좀 지워 봐요.”
“응. 알았어.”
정명은 다시 오더 자리를 찾았다.
자신의 습관도 어느 정도 파악했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수도 없이 반복하여 교정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포인트를 전부 털어 넣어 스탯 또한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기에, 오더로 복귀해도 상관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30분 뒤. 연습게임에서 가볍게 승리한 뒤 정명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스프링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연습게임 일정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휴, 드디어 퇴근인가.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팀의 실력도 상당히 물이 올랐고 팀원들의 감기도 말끔하게 나아, 컨디션도 상당히 좋았다.
때문에 팀이 반파된 이후, 엉망으로 되었던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정명은 속이 후련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단, 소문으로 들려오는 C90이나 TBM, 그리고 다른 쟁쟁한 경쟁 상대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속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연습실에서 모두가 퇴근했을 무렵.
코치는 정명에게 최근 프로게임단에 퍼져 있는 소문을 들려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 시즌만 해도 최상위권만 잘 하고 나머지는 깔아준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시즌부터는 그럴 것 같지가 않더라고. 내가 다른 구단 가서 구경해 봤는데, 만만한 팀이 거의 없어.”
잠시 말을 끊은 코치는 머뭇머뭇 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거는 퇴근하는 애들 기분 잡치기 싫어서 말 안했던 건데...우리 스프링리그 첫 상대가 나왔어. 상대는...TBM이야. 전 윈터리그 우승팀.”
ⓒ 추어탕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