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실력 증명 (3) >
정명의 팀 OMA에서 원딜러로 활동하던 피터는 신생 구단 Mass Impact로 팀을 옮겼다.
서포터인 그린과 함께 말이다.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서포터와 원딜러가 같이 팀을 옮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으므로, 여기까지는 이상하다 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특이했던 점은 피터가 본인의 실력 치고는 상당히 많은 연봉, 15만 달러를 받고 이적을 했다는 것이다.
‘윈터리그 준우승이라는 커리어를 잘 이용한 것이겠지.’
물론 리그에서 중위권 정도의 성적을 내던 OMA가 한 시즌 만에 준우승까지 하게 된 것은 정명의 공이 컸지만, 정명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많은 연봉을 받고 떠난 그들을 축하해 주었었다.
방금 전 까지는 말이다.
정명이 은근히 화를 내자, 피터는 뭐가 잘못된 것이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죠. OMA가 리빌딩 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까다로운 상대인데. 그런 상대를 손 안 쓰고 떨어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런 미친놈이...그래, 내가 그것 때문에 휘청휘청하는 모습을 보니까 보기 좋더냐? 응?”
-저기요 형. 저 이제 형 오더 들으면서 예예 하던 피터 아니에요. 이제는 저도 팀에서 오더를 맡고 있고, 형보다 연봉도...많이 받고 있거든요? 말을 좀 가려 해주셨으면 합니다.
피터는 약간 말을 떠는 듯 하더니, 이내 할 말이 없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정명은 코치와 팀원들에게 피터와 했던 대화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시는 정명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곧장 분노를 터트렸다.
“와, 그거 완전히 개새끼 아닌가요? 연습게임에서 있었던 일도 얘기하지 않는 것이 이 바닥의 암묵적 룰이잖아요. 이번 건은 그걸 훨씬 뛰어 넘었는데요?”
코치 또한 꽤나 놀랐다는 듯,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것 보다는 피터가 정명에게 완전한 대립각을 세웠다는 게 더 놀라운데. 그 친구, 꽤 얌전한 사람 아니었나?”
“그렇긴 하죠. 그나마 성질을 드러냈던 게, 서서가 OMA의 오더를 맡고 있던 때였을 걸요?”
그렇게 운을 뗀 조시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피터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 열등감 덩어리였다니까요. 그 왜, 서서가 인기가 조금 많았잖아요. 실력도 팀에서 가장 좋았고. 피터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서서에게 트집을 잡거나 뒤에서 그의 욕을 하고는 했어요. 이제는 옛날 일이지만.”
정명은 조시의 이야기를 듣고는, 흥미롭다는 듯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나? 나랑 있을 때는 딱히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명이 왔을 때는 음...정명은 몰랐겠지만, 뒤에서 불평하기는 했어요.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지만요. 무언가 겁먹은 표정을 짓기도 했고.”
“흠, 열등감이 강했다고?”
정명은 지난 윈터리그, 토베노 전에서 피터가 서서의 트위터 도발에 넘어가 피터의 컨디션이 최악이 되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어찌어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상당히 짜증나는 경험이었으므로, 정명은 그때의 그 일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하군. 잘 나가는 사람에게 열등감이 강한 측면이 있어.’
조시는 한바탕 욕을 했음에도 분이 안 풀렸는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렇게 설치고 다니는 것 보면 새 팀에서 잘 대해주고 있나본데...어떻게 지내나 한 번 물어볼게요.”
그 후 조시는 몇 명에게 메시지를 보내 피터의 근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한 사람이 얼마 없는 듯 했다.
그러다가 딱 한 명에게서 의미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첼라라는 BJ스트리머한테 물어보라는데요? 그 왜, 지난번에 트이치TV에서 봤던 사람 있잖아요.”
정명도 누구인지는 바로 떠올릴 수 있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근데 그 사람은 피터랑 친한 사람 아냐? 우리의 정보까지 주고 같이 듀오도 돌릴 정도면 그런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말 하긴 했는데요, ‘친하긴 뭘 친해. 온라인상의 인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라고 하네요.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주면서 물어보면 잘 말해줄 것 같다는데요?”
“그래? 흠.”
정명은 지난 번, 꼭 다시 연락해 달라 했던 첼라의 말을 떠올렸다.
예의상 한 말인지는 모르나, 게임에서 친구추가를 하는 것 정도면 부담 없는 일이기에 바로 접속하여 첼라에게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첼라는 게임방송으로 먹고사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접속해 있었고, 바로 답장이 왔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못 말해줄 것은 없는데.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첼라가 다음 달에 개인 리그를 열거거든? 거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 해주면 말해 줄 수도 있지~ 가끔 트이치TV의 유명 BJ들은 현직 프로, 혹은 아마추어들을 모아서 개인 대회를 열고는 했다.
게이머로써 커리어를 쌓는다기보다는 재미. 혹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참가하는 대회인 것이다.
하지만 정명에게는 무척 귀찮게 느껴졌으므로, 첼라의 제안을 일축했다.
“다음 달이면 스프링 리그가 코앞인데 그럴 시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겠다.”
-아니아니, 잠깐! 그럼 게임이나 같이 몇 판 하자. 그 정도로 만족할게!
첼라는 다급하게 정명을 만류하며 타협안을 내밀었다.
정명은 현재 북미 게이머 중, 인기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으로 꼽힌다.
첼라는 그런 정명과 같이 방송을 한다면 틀림없이 달풍선 매출이 급상승 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친한 척 말을 거는 것이었다.
정명이 ‘그 정도야...’하며 승낙하자, 첼라는 그제야 정보를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나도 많이 친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는데, 그동안 들은 얘기를 좀 해주자면......
피터는 팀 Mass Impact으로 들어간 이후, 오더를 맡았다고 한다.
MI는 대기업에서 후원하고 있는 팀으로써 다른 팀원들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들로 모였고, 각종 지원도 상당하기에 1부 리그 상위권을 목표로 한 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정명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중요한 부분은 그 다음이었다.
-피터는 오더를 맡게 되서 무척 좋아했던 것 같아. 첼라에게 자랑을 엄청 했거든.
“그래?”
-응. 그리고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며 말했어. 정명의 연봉은 얼마였다, 서서의 연봉은 얼마였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들보다 더 잘 나간다 이런 식으로...뭐, 조금은 집착같이 느껴지기도 했지~
‘그렇군. 그것 때문이었던 거야.’
정명은 그 말을 듣고는 반쯤 확신했다.
처음에는 첼라라는 BJ에게 홀려서 정보를 꺼낸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퍼즐을 하나 둘 맞춰 본 결과, 그것보다는 피터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첼라는 정명에게 듀오 약속을 받아낸 것에 기분이 업 되었는지, 신이 나서는 묻지도 않은 것 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또 칭찬을 무척 좋아하고. 좋아하는 과일은 바나나. 그리고...
“그런 것은 됐어. 아무튼 고맙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첼라와의 채팅을 같이 보고 있던 조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오, 피터 이 개새끼는 염치도 없나? 누구 덕분에 그 연봉 받고 잘 된 건데!”
“아니, 오히려 잘 됐어. 어차피 이렇게 간파당할 운영이었다면 언젠가는 파훼되었을 테니까. 오히려 지금 일이 터진 게 낫다고 볼 수도 있겠지.”
정규 리그인 스프링 리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무척이나 골치 아팠을 테지만, 지금은 보너스 스테이지라고 할 수 있는 토너먼트 리그.
그나마 부담이 적었기에, 정명은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일시적이지만, 오더는 에리씨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라면 제 대신 운영을 잘 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우리도 연구해보도록 하죠. 피터가 요즘 어떤 방식으로 오더를 내리고 있는지를.”
......
며칠 뒤. 마스터즈리그 8강전이 열렸다.
8강전에서의 상대는 팀 D35.
정명이 지난 번, 새로운 선수를 찾기 위해 대회장에 갔을 때 한 판 붙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 정명과 다퉜던 장본인인 토이는 정명을 만나자마자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당신이 그랬죠? 다음에는 우리를 더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하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당신들을 상대할 비장의 수를 알아냈거든요.”
정명은 걸려오는 시비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내 실력도 그대로고, 당신 실력도 그대론데 다르긴 뭘 달라요. 할 말이 그것뿐이면, 난 이만 가겠습니다.”
말을 무시하고 갈 길 가는 정명의 뒤로, 토이는 선언하듯 외쳤다.
“OMA가 하는 운영방식의 허점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 공략법만 있으면 당신은 끝이라고요!”
......
정명이 토이와 만나고 1시간 뒤.
마스터즈 리그 8강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명과 팀원들은 16강전 경기에서와 같은 패턴으로 진행되는 밴픽을 보자, 하나 둘 피식 웃기 시작했다.
“OMA 공략법이라고 했던가? 하하, 나 참. 같은 수에 두 번 당해줄 줄 아나 보네요. 우리도 플랜 A로 가겠습니다.”
OMA와 같은 프로 팀은 RPG 게임에서 공략법 대로 맞아주는 레이드 몬스터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전에 써먹었던 공략법 따위가 통할 리 없었고, D35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여기선 바로 치자. 빠르게 데미지를 넣으면, 금방 잡고 빠질 수 있을 거야.”
-D35선수들, 너무 눈치만 보고 있는데요? 지금 OMA가 백작에게 프리딜을 넣고 있습니다.
-D35입장에서는 이거 주면 정말 큰일 나거든요? 이것마저 뺏기면 역전의 가능성이 정말 0%가 됩니다 0%가!
맵 중간 위쪽에 있는 몬스터 백작.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이기 때문에 잡는 시간은 좀 오래 걸리지만, 상당한 버프와 돈을 주는 몬스터이기에 잡는 것을 멍하니 내버려둬서는 절대로 안 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D35 사람들은 그런 움직임을 자신들을 유인하기 위한 낚시라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레 전진하고 있었고, 결국 백작 버프를 빼앗기고 말았다.
-아...D35,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였던 건가요? 서포터를 던져서라도 확인을 했어야지요!
-마치 백작을 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뭐...이렇게 되었지만요.
정확한 판단과, 그에 맞는 오더.
정명은 에리가 오더를 내리는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음...나라면 여기서 낚시를 했겠지. 안전하니까.’
하지만 에리의 결정은 달랐다.
과감하게 백작을 잡기 위해 들어갔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던 것이었다.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운영이 정말 깔끔하다. 최상위권 팀의 운영을 보는 듯 해.’
상태창으로 표시되는 에리의 운영능력은 70. 정명의 스탯보다 10이 높은 수치였다.
그리고 정명은 ‘운영을 진작 맡겨 놓을 걸’ 이라 생각하며, 남은 포인트를 전부 투자해서라도 스탯을 올리리라 다짐했다.
그 이후에도 그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경기 한 번 당 몇 없는 중요한 순간, 에리가 정명의 생각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 땐 그들이 비교적 쉽게 막아내었고, 정 반대의 결정을 내리면 그들은 허둥지둥 반응이 늦었다.
애초에 8강까지 온 것도 용했던 팀이었다.
그리고 결국, 정명의 말 대로 정명은 지난 번 보다 더욱 쉽게 D35팀을 꺾을 수 있었다.
깔끔한 2:0 승리였다.
[마스터즈 리그 8강 승리!]
*포인트 2500점을 얻었습니다.
*팀이 하나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팀의 결속이 일주일 동안 한 단계 증가합니다.
‘4강 진출이라...대진운이 좋았군.’
정명은 시스템 메시지창을 치우고는, 기뻐하고 있는 팀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는 8강전 승리가 기쁜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겨서 정말 다행이다! 이걸로 한 건 해결이지?”
“이기긴 했지만...아직 해결이라고 하기엔 끝을 못 봤어요.”
“끝이라니?”
“얻어맞기만 하는 것도 성격에 안 맞고. 피터에게는 똑같은 선물을 줄 생각입니다.”
그 말과 함께 정명은 반대편 부스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D35 선수들은 무척이나 화를 내고 있었고, 방음 부스이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은 카메라에 잡힌 입모양으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피터 그 새끼를 믿은 네가 병신이지. 내가 뭐랬어? 그놈, 허언증이 있는 것 같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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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팀 코니의 연습실.
팀 코니의 코치가 된 새비는 팀원들을 다독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기운 좀 내라. 우리도 이길 수 있어! 벌써부터 진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하지만 팀 코니의 8강전 상대는 Mass Impact.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신생 팀이었다.
16강전도 운 좋게 이기고 올라온 코니로써는 이기기 힘든 팀이었기에, 팀 선수들은 벌써부터 기가 죽어있었다.
‘어휴, 답답한 놈들. 싸워보지도 않고 꼬리를 마냐.’
덕분에 팀 연습실의 분위기는 점점 축축 쳐져만 갔고, 새비의 한숨이 점점 잦아 질 때 쯤. 새비의 핸드폰에 연락이 왔다.
새비가 발신자를 확인하니, 정명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Mass Impact 팀을 상대할 기가 막힌 방법이 있는데요. 가격은 피자 두 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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