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실력 증명 (1) >
프로게이머 생활을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에리는 정명의 생각보다 연습실 분위기에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다.
물론 숙소생활을 하지는 못 하고 오후 7~8시면 집으로 퇴근을 하기로 말이 끝났지만, 조만간 연습실 근처로 이사 온다고 하기에 큰 문제는 없을 듯 했다.
팀원들과 인사를 끝낸 에리는 연습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연습실 책상에 다닥다닥 진열되어 있는 피규어를 가리키며 물었다.
“와...책상 위에 있는 이 인형들은 뭐야? 되게 귀엽네.”
에리가 가리킨 것은 조시가 올려놓은 미소녀 피규어들 이었다.
남자들만 있는 환경에 있어서인지 조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관련 물품에 무척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그런 조시의 애장품들이 연습실 책상에 하나 둘 올라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피규어와 포스터 따위가 연습실을 가득 채우게 된 것이었다.
에리는 그 중 한 캐릭터의 피규어를 사진으로 찍었고, 그것을 왜 찍느냐고 물어보는 정명의 물음에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귀엽잖아? 우리 딸한테도 보여주고 싶어.”
“음...이것들을...그 싸가지에게요?”
에리가 찍은 사진은 조시가 ‘미도리짱’이라고 부르던 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피규어였다.
이런 문화를 잘 모르는 에리에게는 조시가 모은 피규어들을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딸과 같이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비키니, 혹은 옷을 거의 헐벗고 있는 피규어들의 사진을 여고생인 쿠론이 보게 된다면?
거기다가 혼자 보지 않고, 단톡방 같은 곳에 올려 친구랑 돌려 본다면?
정명은 본인의 일이 아닌데도,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조금...잔인하군...’
......
처음으로 팀 연습을 하는 날.
에리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정명의 옆에 딱 붙어, 마치 막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한 호기심 강한 애들처럼, 하나하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우스랑 키보드는 뭐 써야 하니? 그냥 비싼 것 쓰면 좋은 건가?”
“아뇨. 잘 모르겠으면 일단 제가 쓰는 거랑 같은 것 써 보세요. 이것저것 쓰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으면 되니까요.”
에리는 마우스와 키보드 가격을 듣고 헉 소리를 내더니,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다른 팀 관계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던데, 누굴까? 혹시 알아?”
“놀러 올 수도 있고...이번엔 연습 게임 일정을 잡기 위해 온 것 같네요. 겸사겸사 친목도 다지고.”
“아무나 붙잡고 하는 거는 아니지?”
“그거는 아니고요, 연습상대를 고르는 기준은 뭐....첫째로는 실력이 비슷해야 하고, 둘째로는 오래 연습할 사람을 찾아야 해요. 한두 판 하고 말 사람은 솔직히 별 도움이 안 되니까.”
“그렇구나.”
그리고 정명은 게임에 접속하며, 에리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오늘은 새비의 팀과 연습게임을 할 거에요. 아, 새비는 제가 SAO시절에 있었을 때 함께했던 동료였어요. 지금은 VirtualBox라는 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지만요.”
팀이 만들어진 직후, 그 영광스러운 첫 번째 연습상대는 새비의 팀인 VB로 결정되었다.
그들 또한 이번 토너먼트에 참가한다고 하는데, 목표는 8강이라고 한다.
2부 리그에서 활동하던 새비의 팀이기에 윈터리그 준우승 팀인 OMA와는 격차가 상당히 난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팀 리빌딩 후 첫 상대로는 제격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일단 샌드백을 두드리며 몸 좀 풀자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VB와의 대전으로 몸을 풀던 정명은 그 결정이 무척 탁월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막 리빌딩을 마친 OMA는 마치 막 SAO에 들어갔을 때를 느끼게 해줄 정도로, 무언가 엉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태창을 불러오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더 스탯 : 50]
[팀의 결속 : D랭크]
[신뢰의 오오라 : 팀의 결속이 D랭크에서 C 랭크로 증가합니다. 또한, 팀원과의 친밀도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기본 결속 랭크가 D라...이건 연습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토너먼트 대회 일정이 코앞이니, 이번 대회에서는 대단한 성적을 내기는 어렵겠어.’
서포터에서 원딜러로 포지션 변경을 하게 된 아이작부터 시작하여,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중국인 탑솔러 스팀팩. 그리고 오랜만에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아 무언가 어색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에리까지.
그 상황은 정명에게 소년가장처럼 혼자 돌파구를 찾던 SAO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했지만, 그 때보다는 나은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조시가 여전히 팀에 남아있었다는 것이었다.
경기 초반의 탑 라인.
상대 탑 라이너의 HP도 적고, 라인 상황도 좋았기에 타워에 맞으며 들어가는 ‘타워 다이브’를 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조시는 되도록 천천히, 그리고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 미니언 웨이브가 오면 내가 코너를 돌아서......아니, 두 다이브. 오케이? kill! kill him!"
겉보기에는 무슨 코미디냐 싶은 모습이었지만, 정명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잘 안 통한다기에 조금 걱정했는데, 대충 알아먹긴 하는군. 하긴,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GLG의 메타트론도 잘 살고 있는데 저 정도쯤이야.’
그리고 몇 십분 뒤. 겨우겨우 게임에서 이기기는 했다.
정명과 조시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게임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조시는 새로운 팀원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며 나름 만족하는 듯 했지만, 정명에게는 걱정거리가 늘어났던 한 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정명은 상점창을 열며 한숨을 쉬었다.
‘휴...일단 스탯이라도 올려 둘까. 스탯은 꽤 오랜만에 올리는 것 같네. 정규리그가 없으면 상태창도 잘 안 열어 보게 되니까.’
윈터리그에서 받은 포인트가 아직 꽤 남아있었으므로, 정명은 망설임 없이 오더 스탯을 50에서 60으로 올려버렸다.
[오더 스탯이 60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오오라 스킬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많은 포인트를 투자하여 스탯을 올렸으나, 나타난 것은 돈을 더 내라는 메시지였다.
정명은 그동안 오더 스탯을 올리면 받을 수 있었던 오오라 스킬을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휘관의 오오라 :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팀원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받습니다.]
[사령관의 오오라 : 사용자의 카리스마가 일시적으로 높아집니다.]
[신뢰의 오오라 : 팀원과의 친밀도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지휘관의, 사령관의, 신뢰의. 각각 오더 스탯이 30, 40, 50 이상일 때 얻을 수 있었던 오오라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오오라 스킬 또한 사야 한다.
정명은 ‘포인트 처먹고 부자 되라’ 하고 욕을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오오라 스킬을 구입했다.
[스킬을 구입했습니다.]
[군단의 오오라 : 팀 장악력이 서서히 늘어납니다.]
-습득 조건 : 오더 스탯 60 이상
‘참나. 장악력은 또 뭔소리람. 포인트만 날린 건 아니겠지?’
스킬 구입을 마친 정명은 잠시 궁시렁 대더니,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게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연습게임을 몇 판 치르고 난 뒤, 쉬는 시간.
에리는 연습게임에서 연달아 낸 실수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졌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더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그 풀죽은 모습을 보던 정명은 별 일 아니라고 위로하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괜찮아요. 이번 리그에서는 금방 떨어져도 됩니다. 월드챔피언십 포인트도 걸려있지 않은 주제, 일정은 빡빡하고. 엄청 짜증나는 대회니까. 차라리 그냥 무대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요.”
“네에...그래도 비교 많이 되지? 기존 멤버였던 원딜러 피터랑...”
“서포터 그린이요? 어휴, 말도 마세요. 걔네들이 얼마나 속 썩였는데요. 내가 꾹꾹 눌러놨으니까 얌전히 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사고 쳤을 것 같기도 하고......아무튼 어차피 우리의 첫 상대는 조금 쉬운 애들이니까, 너무 겁먹지 마세요.”
“어? 대진표가 나왔어?”
에리가 놀라며 묻자, 정명은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우리의 첫 상대는...이 팀이네요.”
“어라? 이 팀은...”
@@@@
며칠 뒤.
에리가 계약서에 찍은 도장이 마를 때 쯤, OMA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새로운 팀 멤버를 발표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를 본 팬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다른 팀은 현 솔로랭크 그랜드마스터 랭킹 1위, 실력파로 유명했던 유명 BJ 등 듣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나오는 라인업으로 무장해,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OMA는 라인업을 강화하기는커녕, 윈터리그 준우승을 이끈 주역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듣도 보도 못한 선수들만 잔뜩 모아두었기에 팬들의 입장에서는 욕이 절로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dayday : 어휴, OMA이 멍청이들. 피터를 버리고 이상한 중국인 하나를 데려왔네. 기적의 트레이드 인정합니까? 네. 인정합니다.
seafood : 그래도 새로 들어온 여자는 예쁨 ㅋㅋ 프로필 사진만 봤는데 첼라보다 예쁜 것 같더라.
? 프로필 사진을 믿는 등신도 있네. 나중에 첫 방송 뜨면 봐라. 에리인지 뭔지 굴욕샷 나올 꺼다.
악플이 달리는 것은 에리 뿐만 아니었다.
공격 대상은 ITU가 해체된 뒤, 겨우 새 직장을 찾은 탑 라이너 웨이홍. 그리고 팀 미라클과 재계약을 하지 못했던 아이작도 포함되는 것이었고,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하기 전 까지는 무차별 폭격을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프로게이머가 된 미어스 에리는 그런 댓글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입술을 꾹 깨물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괜히 들어간 것 아닌가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딸을 위해서......’
이미 게이머 수명이 다했다고 전해지는 30대.
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프로게이머 판에 뛰어든 이유는 별 다른 게 아니었다.
정명이라는 게이머가 무척이나 많은 연봉을 제시하며 계약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리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었음에도 개인 방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항상 부끄러워했지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생각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욕 먹더라도...무조건 버틸 거야. 내가 못 하더라도, 구단에서는 계약서대로 돈을 지불할 수밖에는 없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멘탈 관리를 위해서 되도록 커뮤니티 사이트 같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 조언했지만 호기심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의견이 오고가는 게시물을 보며 우울해하던 도중, 에리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보고 있던 창을 껐다.
“엄마아. 혼자 불꺼놓고 뭐해?”
들어온 사람은 에리의 딸, 쿠론이었다.
쿠론은 에리가 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훔쳐보더니,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게임해? 그럼 나도 같이하자. 내가 캐리해줄게.”
“그럴까? 우리 딸만 믿을게.”
에리가 보기에, 진짜로 프로가 되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쿠론이었다.
쿠론은 3년 전, 에리가 프로게이머를 그만 둔 이후로, 게임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제 엄마가 다시 게이머가 되었다고 하니, 같이 게임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처럼, 에리는 쿠론에게 캐리받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엄마를 무척 좋아했던 쿠론은 그런 것에 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는 가차 없었으므로, 자꾸 헛발질만 하는 자신의 팀원을 보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저기 원딜러 되게 못한다. 그치? 지금까지 한타에서 앞 점프 하다가 죽은 것 밖에는 못 본 것 같아.”
“응. 내가 해도 더 잘 할 것 같네. 쿡쿡.”
그렇게 두 모녀가 시시덕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던 도중, 팀원의 보이스채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빠 뭐해! 앞 점프 좀 그만 하라고! 바보야? 아, 진짜 짜증나.
스피커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트이치의 유명 BJ, 첼라였다.
그녀를 포함한 몇몇 여자 BJ들은 여왕벌이라고 불리고는 했는데, 게임만 하는 외로운 남자들을 홀리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게이머와 팀을 짜서 게임을 하던 첼라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같이 들어온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대진표 이거 진짜 너무하다. 우리가 OMA를 어떻게 잡아! 우린 망했어...
-괜찮아. 그 OMA가 지난 시즌의 OMA냐? 사람 다 빠졌는데. 너희 팀이라면 충분히 해 볼만 해.
-그런가?
-인원수만 대충 채워놓은 것 같은데, 그래서야 2부 리그 행이지. 자, 내가 OMA 특별 공략 법을 알려줄게. 먼저 게임 시작 직후에는 말이야......
그리고 쿠론이 그런 시끄러운 음성채팅을 차단하기 직전, 에리는 상대방의 아이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왠지 저 아이디 낯이 익은데...어디서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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