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팀 리빌딩 (2) >
정명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전화를 붙잡고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무도 안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마음껏 참가자들의 욕을 하고 있었다.
“그래. 꼭 참가해야 한다고 해서 옆 방 애들 보내긴 했어. 데뷔하자마자 밉보이기는 싫으니까 지랄 한 번 해주는 거지 뭐.”
그 소리와 함께 남자는 정명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사람도 팀 관계자인가? 말버릇 한번 고약하군.’
남자는 사라졌지만 정명은 그 남자를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을 탁 튕겼다.
‘아하! 생각났다. 팀 C90의 원딜러...였었지? 이름까지는 기억 안 나고.’
정명의 기억에 따르면, C90은 어느 날 갑자기 폭풍처럼 등장한 프로팀이었는데, 기존에 등장했던 북미 프로팀과는 그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C90은 기존의 북미 팀과 비슷하게 간다면 그들처럼 똑같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철저하게 한국 스타일을 분석하고 그 전략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기존의 상위권을 도맡아 하던 팀인 GLG와 TBM까지 박살내 버릴 정도로.
한국 리그를 자주 보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북미 리그는 잘 안 본다. 하지만 한국 리그는 꼭 본다’ 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기도 했으므로 팬들의 평가는 엇갈렸지만, 누구도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말하지 못 했다.
승률 100%. 시즌 내내 승전보를 울리며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는 괴력을 과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그는 3전 2선승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가끔씩 한 세트 정도는 내 주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따 냈고, 결과적으로 18승 0패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던 팀이 C90이었다.
정명은 그런 기억까지 떠올리자, 왠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녀석들이 벌써 나와? 아무리 생각해도 1년 뒤에나 나올 녀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TBM에 GLG, 거기다 C90까지...스프링 시즌은 만만치 않겠군. 젠장.’
정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자, 세인은 바로 앞에 있는 다른 선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몇 가지 설명을 하려고 했다.
“저 선수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저 선수는...”
“아뇨.”
정명은 세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보다 C90이라는 팀, 혹시 아세요?”
정명의 물음에 세인은 정명을 대회장 한 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인은 그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C90...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팀입니다만, 대기업 와플에서 작심하고 키운 것 같더군요. 실력이 엄청나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럼 저 애들이 C90 선수들인가요? 나이가 꽤 어려 보이네.”
“아니요. 저들은 C90의 2군이자 형제 팀인 D35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2군이라고 해서 실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D35의 2부 리그 성적만 해도 17승 1패,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적으로 우승을 한 팀이니까요.”
“음. 그런가요.”
“그런데 실력에 비해 성격이 너무...짜증나는 게 흠이지만요.”
그러자 멀리서 그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그들 중 한 사람이 정명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세인이 있는 쪽이었지만.
그리고는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스카우터 누나! 이곳에 오실 줄 알았어요!”
“안녕하세요 토이.”
겉보기에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세인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무척이나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세인은 전혀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기에 바빴으니까.
하지만 토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저 보러 왔어요? 아쉽다. 저는 이미 계약이 되어 있어서 누나 팀으로는 못 가는데.”
“아뇨. 우연히 만난 겁니다.”
“아...그래요? 그러시면 저희 이벤트 경기 하는 것 보고 가는 것은 어떠세요? 한 시간 뒤에 몇 몇 사람들 모아서 우리랑 게임 몇 판 하기로 했거든요. 혹시 시간 되시면...”
“일행이 있어서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안 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세인은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말을 빠르게 쳐냈고, 토이 또한 그 분위기를 눈치 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세인에게 직접 뭐라고 할 수는 없었는지 타겟을 옆에 있던 정명에게로 옮겼다.
“일행이요? 당신은?”
“유정명입니다. 팀 OMA에서 미드라이너를 맡고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로로 활동하는 사람이 윈터리그에서 2위를 한 팀 선수를 모를 리 없다.
토이는 그제야 정명을 알아보고는 씩 웃으며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 유정명씨? 알죠, 알죠. 요즘 꽤 잘나가는 선수 아닙니까. 지난번에 다이로스한테 솔로 킬 당하고 삭발 하신 것은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큭큭.”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재미있으라고 한 퍼포먼스인데, 재미가 없으면 안 되지요.”
토이는 세인 앞에서 정명을 깎아내리고 싶었는지 정명의 흑역사를 들추기 시작했지만 정명은 그냥 껄껄 웃으며 넘겼고, 그것이 토이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토이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내뱉으며, 시비를 걸었다.
“제가 프로가 된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해외 나가면 찍 소리도 못 하면서 북미에서만 큰소리 떵떵 치는 프로 팀들이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어떤가요?”
“OMA는 해외 나간 적도 없습니다만?”
계속되는 시비에 오히려 세인이 안절부절 못 했다.
하지만 정명은 괜찮다고 손짓하고는,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의 실력이 어떠한지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흠, 피지컬 55, 54, 51...내가 피지컬 50대로 2부 리그를 쓸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대단한 팀이군. 피지컬 50을 넘긴 게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라니. 17승 1패라는 성적을 낼 만 하다.’
하지만 저렇게 승승장구 하다 보니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정명은 이 자신감 넘치는 2부 리그 우승팀을 위해 환영식을 열어주기로 결정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고요, 아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벤트 매치를 하신다고 하던데. 제가 거기 끼어도 됩니까?”
정명의 말에 토이는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큭큭 웃고는, 이내 웃음기를 싹 지우며 답했다.
“상관이야 없는데...만약 그러신다면, 우리도 조금 진지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리그 우승 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당신이야말로 1부 리그에 올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2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올라왔다는 것을 잊으신 것 같네요. 저도 SAO시절에 2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1부 리그로 온 건데요? 요즘은 시드권 거래가 워낙 활발해서 까먹으셨나 봐요.”
정명은 빙그레 웃어준 뒤, 이벤트 참가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만큼, 게임 시작 전에 준비해야 할 게 많았으니까.
잠시 뒤. 정명은 처음 보는 네 명의 사람들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유정명입니다. 저 포함해서...딱 다섯 명이네요. 반갑습니다.”
“예. 안녕하세요. 미카엘입니다. 포지션은 탑 라이너에요.”
“저는 서포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벤트 참가자들은 리그에서 이미 떨어진 사람들이거나 아마추어들이었다.
때문에 실력이 제각각일 것이므로 보통은 티어가 뭐냐 따위를 물어봐야 하겠지만, 정명에게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정명에게는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병아리 감별사 스킬을 업그레이드 시켜야만 했다.
[병아리 감별사 스킬을 업그레이드 하시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선택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환불이 안 된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도 하는군. 알았으니까 업그레이드 한다.’
[7000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
[병아리 감별사 스킬 업그레이드가 성공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선수에 관한 정보를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니 스카우터]
게이머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스카우터.
이 능력과 함께라면, 좋은 팀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선수에 관한 더욱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해금조건을 수행한다면 스킬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조금 비싸긴 했지만 비싼 값을 하겠지. 어디...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저 사람부터 보기로 할까.’
[미카엘]
피지컬 : 45/59
운영능력 : 43/65
팀워크 : B
포텐셜 : C
[겁쟁이] : 큰 무대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합니다.
임시로 팀이 된 사람들을 둘러본 결과, 딱 2부 리그. 혹은 아마추어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정명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정명이 바보도 아니고, 애초에 이길 자신이 없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리고 30분 뒤, 이벤트 매치가 시작되었다.
대회와는 달리, 이벤트 경기이므로 분위기가 꽤나 자유분방했다.
때문에 정명의 뒤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었고, 밴픽 단계에서도 구경꾼은 이것을 픽 해라, 저것을 픽 해라 하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인 또한 옆에서 정명에게 조언을 건넸다.
“불여우랑 유령해적은 밴 하시는 게 좋아요. 저들이 리그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고, 또 가장 승률도 좋은 캐릭터들이거든요.”
“오, 그래요? 그러면 사양할 것 없죠. 바로 밴 해야지.”
‘너 하고 싶은 것 다 해봐라’ 하며 배짱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정명이 그 정도로 자만하고 있지는 않았다.
거기다 정명은 승률을 1%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정당한 방법 내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므로, D35 사람들이 잘 한다는 캐릭터들을 모조리 밴 해버렸다.
그리고 3분 뒤. 게임이 시작되었다.
...
[오더 스탯 : 50]
[팀의 결속 : D랭크]
[신뢰의 오오라 : 팀의 결속이 D랭크에서 C 랭크로 증가합니다. 또한, 팀원과의 친밀도가 빠르게 증가합니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다섯 명 모두 오더가 나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동작되는 스킬인 거야.’
솔로랭크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았던 오오라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합지졸일 줄 알았던 팀이 제법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미드는 오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서도 솔로킬 낼 수 있어요. 몇 번 스킬을 섞어보니 알겠네요.”
정명은 미드에 서는 것은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색함 따위는 느끼지 못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이의 얼음여왕을 빈사상태로 만들고는, 씩 웃었다.
‘그러면 이쯤 해서 관객들에게 재미 좀 줄까?’
정규리그와는 달리, 이벤트 매치에서는 딱히 룰이랄 게 없다.
정명은 얼음여왕을 일방적으로 두드려 팬 뒤, 웃으며 채팅을 날렸다.
이벤트팀_미드 : 휴, 너무 힘드네여. 살살좀 ㅎㅎ;
한창 이기고 있는 정명이 살살 하자고 한다?
누가 봐도 비꼬는 채팅이었기에, 이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고, 토이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열이 받았는지 무리해서 달려들더니, 결국에는 정명에게 솔로킬을 내주고 말았다.
[이벤트팀_미드님이 D35_토이 님을 처치하셨습니다.]
“좋아. 저는 이제 풀렸네요. 음...힘드시죠?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조금만 더 버텨보세요.”
토이에게는 그야말로 클래스 차이를 느끼게 해 줬지만, 다른 라인에서는 팀원들이 헉헉대고 있었다.
때문에 정명은 생존기가 좋은 캐릭터인 펄스건가이를 전진배치 시키며 시선을 끌었고, 그 미끼를 문 D35 정글러는 정명에게 매달리며 시간을 허비했다.
‘좋아. 다른 라인은 숨통이 좀 트인 것 같군. 라인전에서 손해만 안 보면 이길 수 있어. 운영 싸움이 내 특기니까.’
그리고 게임시작 30분 뒤, 5:5 대치 상황에서 서로 눈치만 보던 그 때 정명이 벼락같이 오더를 내렸다.
“야! 미카엘 임마, 바로 들어가! 쫄지 말고!”
[가혹한 지휘를 사용합니다. 스킬은 5초간 지속됩니다.]
[팀원들의 결속이 B+로 증가합니다.]
[집중력이 150% 상승합니다.]
그와 동시에 정명의 팀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수많은 연습을 통해 이뤄낸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이었고,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동안만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한타에서 승기를 가져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명의 임시 팀은 5:5 한타에서 한 명도 죽지 않고 상대를 마무리 지으며, 그대로 넥서스를 밀어버렸다.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타고난 오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이 경기를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분위기에 휩쓸립니다.]
*일시적으로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며, 지금이라면 영입이 불가능했던 선수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팀 D35의 명성이 대폭 하락합니다.]
*아무것도 걸린 것이 없는 이벤트 매치이지만, 사실 자존심이라는 게 걸려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D35 선수들은 낮은 확률로 슬럼프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했지만, 정명은 메시지 창에만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좋아. 이건 돈이 좀 부족해도 좋은 선수를 데려올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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