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44화 (44/226)

13. 양민학살의 시작 (完)

“팬클럽을 만들어도 되냐고?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너.”

그녀가 자신을 잘 따르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팬클럽이라니.

갓 데뷔한 신인이 팬클럽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것처럼 보여 정명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안 돼?

“인기도 없는 선수 팬클럽 만들어서 뭐 할 건가 싶기도 한데...맘대로 해. 사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 하니까.”

-응! 귀찮게 안 할게. 그럼 완성되면 연락 줄게!

벨라는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은 티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발 빠르게도, 벨라는 팬 사이트를 완성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정명의 생각으로는 홈 페이지라는 게 이렇게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 지는 건가 싶었지만, 실은 정명에게 허락을 맡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홈페이지의 주소를 묻는 정명에게 벨라는 한 레스토랑으로 정명을 초대했다. 역사적인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에 톡으로 주소를 알려주는 것은 무척 초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녀가 붙인 이유야 어쨌건, 레스토랑 초대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벨라가 가자는 레스토랑은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전부 알 만큼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벨라에게 톡을 보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그거 더치페이 아니지?”

-사줌 ㅎㅎ; 빨리 오기나 해요.

‘돈 많은 친구를 두는 것은 꽤...아니, 엄청 좋은 것 같아.’

정명은 공짜 저녁을 먹을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

“나 왔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응, 안녕.”

언뜻 보면 무척 귀찮아 보이는 태도.

그러나 그녀에 대해 꽤 알게 된 이후로는 저게 나름대로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벨라는 정명이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새로 만들었다던 팬카페의 화면이 떠 있었는데, 좋은 곳에 의뢰를 했는지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팬페이지 이름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마왕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팬 카페 이름이 뭐 이러냐?”

왠지 이상한 이름의 팬카페였다.

그런 정명의 물음에, 벨라는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내가 지었어. 그 왜, 너랑 엮이는 팀들은 도통 좋은 꼴을 보지 못 하잖아? 그러니까 마왕. 어때? 팀 브레이커로 할래, 마왕으로 할래?”

“둘 다 안 괜찮아. 그보다 너, 선동과 날조의 전문가로구나? 전혀 사실무근이야.”

그러자 벨라는 기다렸다는 듯 몇 개의 사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헤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재미로만 들어. 자, 첫 번째로 NPG. 기억나지? 네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 있었던 팀 말이야. NPG는 네가 팀에서 나간 뒤, 연습생들은 물론이고 2군들의 계약까지 해지해버렸어. 혹시 알고 있었니?”

“그러냐...아니, 몰랐지. 그놈들이 어떻게 살고 있냐 하는 건 관심도 없었으니까.”

“두 번째로 SAO. 이 팀은 네가 나가고 나서 팀원들이 흩어지며 공중분해 되었지. 이건 더 말 안 해도 알 거라 생각해.”

“SAO랑은 좋게 헤어졌거든?”

“그리고 너랑 지냈던 스콜피온즈. 분위기만 보면 이번 시즌 끝나고 거의 해체할 분위기던데. 질펀하게 싸웠던 서서는 어떻고? 섬머 시즌만 해도 북미의 TOP 5 안에 드는 미드라이너였는데 너랑 화끈하게 싸운 이후, 한 시즌만에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고. 어때, 그럴듯하지?”

정명은 할 말이 없어져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사례를 모아놓고 보니, 꽤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벨라는 괜히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고 있는 정명을 보고는, 농담이라며 선을 그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니, 엄청 신경 쓰이는데...혹시 더 있어? 나랑 엮여서 망했다는 애들.”

“응. 끝이야. 사실 중국팀 ITU도 너희랑 지저분하게 엮였었는데, 멀쩡하고.”

“아, 그거...그 일은 정확히 말하자면 ITU랑 엮였다기 보다는 기자 때문에 고생했다고 해야겠지만...”

벨라는 분위기를 돌리고 싶었는지,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정명을 재촉했다.

“자, 빨리 팬카페에 가입 신청을 하도록 해. 널 2인자로 만들어 줄 테니까.”

“회원도 너 밖에는 없으면서 2인자는 무슨...”

그렇게 말 하면서도 정명은 가입 신청서를 써 넣었고, 신청서를 제출하자마자 뜻밖의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팬 클럽이 창단되었습니다. 2000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팬 클럽이 더욱 발전한다면, 특별한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등급 : 유령 카페

“뭘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명은 입을 다물었다.

한국의 별 볼일 없던 프로게이머 연습생이던 자신이 팬 카페까지 생겨서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웠으니까.

......

“자고 싶다...이런 룰은 대체 왜 만든 걸까요. 이해할 수가 없네.”

“몰라. 그보다 축 처져있지 말고 힘 좀 내 봐. 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4위는 확정이니까 오늘 무척 중요한 경기라고.”

이틀 뒤, 슈퍼위크 마지막 날.

길고 길었던 슈퍼위크의 마지막 경기 날이 되었지만, 팀원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1주일에 4일이나 경기를 치르는 일정은 모두를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 상대는 슈퍼위크 일정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중국팀 ITU. 그야말로 슈퍼위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한 만큼, 본전 생각이 나는지 요즘 부쩍 돈 타령을 하던 피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돈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번에 이기면 4위 확정이라고요?”

“어. 목표로 했던 3위랑은 별 차이도 안 나. 1, 2위랑은 차이가 꽤 심하지만.”

“4위라...구단주가 내걸었던 보너스가 아른거려요. 4위부터 보너스를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OMA의 구단주는 4위 이상의 실적을 거두면 통 크게도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약속했다. 팀 창단 이후 거둔 최고 실적에, 구단주 또한 기대감이 엄청나게 높아진 탓이었다.

단,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달성하는 순위에 따라 그 보상에 차등을 뒀다.

4위는 고급 레스토랑 히어스에서의 회식.

3위는 실물로 보면 귀여워 보일 정도의 소형차.

2위는 현모라는 한국 기업의 중형차.

그리고 1위를 한다면 페라리를 사 주겠다고는 했는데, 당연하게도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아...차...갖고싶다. 싸구려지만, 저 녀석들만 이기면...!”

피터는 말을 흘리며 건너편에 있는 선수들을 노려보았다.

체력이 다하여 축 처져있는 것은 OMA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정명 또한 슬쩍 건너편을 보니, 오늘 경기상대인 ITU 또한 무척 지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체력이 좋다면, 그게 신기한 일 아닐까 싶네.’

체력적으로 멀쩡한 것은 두 팀 10명의 선수들 중 정명 혼자뿐이었다.

사실 정명은 피지컬 스탯이 60을 넘어간 이후, 어지간해선 피곤함을 잘 느끼지 못했으므로 흐느적거리는 팀원들 사이에서 혼자 여유롭게 경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

@@@

ITU와 OMA가 경기를 하던 그 시각.

서서를 응원하는 팬인 힐러리는 ITU와 OMA의 경기를 보며 게시판에 댓글을 달고 있었다.

힐러링 : 쟤네들, 왜 저렇게 못함? 반응속도도 느리고, 이거 ITU랑 OMA 경기 맞음? 얼핏 보면 스콜피온즈랑 래디언즈가 경기 하는 것 같은데.

? 비타 C : 슈퍼위크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듯? 아마 쟤네 잠도 잘 못잤을거임.

?힐러링 : ㄴㄴ. 이제야 바닥이 드러난 것 같은데. 역시 토베노 이긴 건 운빨이었나.

?kcal : 네 다음 퇴물 빠는 사람.

“에이씨, 뭐만 하면 퇴물이래. OMA도 별 것 없구만 뭘. 미드라이너 하나 잘 영입해서 팀이 운 좋게 순위를 올린 주제...”

힐러리는 팀 OMA의 뒷담화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을 다르게 해석하자면 정명만큼은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힐러리는 게시판 사람과 말다툼을 하다가 키보드를 잠시 내려놓고, 다시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명, 또다시 솔로 킬! 자, 이쯤에서 중요한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요즘 정명 선수가 솔로 킬을 내는 것을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사실, 자주 보는 게 당연하죠. 집에서 돌리는 랭크 게임도 아닌데, 경기를 할 때마다 상대 라이너에게 솔로 킬을 따 냈으니까요!

-지금까지 북미 리그에서 5경기 연속 솔로 킬 기록을 달성한 사람은 딱 세 명입니다.

지금은 은퇴한 미트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은퇴한 GLG의 스테파노, 마지막으로 TBM의 탑 라이너 엑소더스까지. 딱 세 명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엄청난 업적이거든요!

해설자의 말과 동시에, 중계화면 밑에는 [OMA 미드라이너 유정명, 5경기 연속 솔로 킬 달성] 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방송국에서 꽤나 대단한 기록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힐러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5경기 연속 솔로 킬...진짜 쩐다...”

힐러리는 경기를 보다말고 또다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콜레스테롤 : 그나마 정명이 있어서 볼거리는 있네. 요즘 물 오른 것 같던데.

?힐러링 : 인정. 북미 허접들 하는 것 보면서 암 걸리다가 눈 정화되는 느낌 그리고 힐러리가 말하는 ‘북미 허접들’에는 그녀가 응원하던 서서 또한 포함되고 있었다.

‘솔직히 요즘 퇴물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기는 하지. 거기다가 머리도 빡빡 밀어서 못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서서의 팬이 되기로 했을 때, 당시 서서는 북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미드라이너였다.

하지만 지금은 퇴물 빡빡이일 뿐이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정명은 어떻게 성장할지 정말 기대되는 선수라고 할 수 있었다.

힐러리는 응원하는 사람을 바꾸기로 마음을 굳혔다. 현상유지라도 하고 있다면 모를까, 계속 추락하고 있는 선수를 응원해봐야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서서에게 매달 보냈던 팬 선물을 이번에는 정명에게 보내기로 한 힐러리는 정명의 공식 팬 카페라는 곳에 접속하자마자 피식 웃었다.

“마왕의 협곡? 참 이상한 이름이네. 센스 없어.”

@@@

-OMA, ITU를 2:0으로 꺾으며 4위로 올라섭니다!

-파죽의 4연승입니다! 슈퍼위크 기간 동안 크게 어려운 상대는 없었다고는 해도, 4연승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니거든요!

“드디어 끝났다...잘 수 있어...”

조시는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좋아하는 기색 없이 의자에 축 늘어졌다. 긴장이 풀려 움직일 힘도 없는 것이다.

정명은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둔 채로 혼자 부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정명이 나오자마자 코치가 다가와서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직원 전용 복도로 정명을 끌고 갔다.

“정명, 저기 봐라. 저기 저 사람 ITU 매니저인데, 선수들 살벌하게 갈구고 있다. 보다보면 재밌어.”

코치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매니저라는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선수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말은 안 통하지만 누가 봐도 패배의 책임을 묻는 모양새였다.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한국 연습생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와, 한국보다 더 하네요. 한국은 최소한 방송국 안에서는 아무 말 안 했는데. 오픈된 곳에서도 저 정도면, 연습실 가서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데요.”

“어떻긴 뭘 어때. 작살나는거지. 내가 알기로 중국 팀 관리자들은 선수들을 때리기도 한다던데.”

“예? 진짜요?”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확실히 중국 팀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미국이니만큼 대놓고는 못 하겠지만, 중국 본토에 가면 100%였다.

정명은 큰소리로 떠들고 있는 매니저를 잠깐 지켜보다가 곧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참견하는 것은 오지랖이겠지. 신경 끄자.’

......

그리고 그 다음 날.

정명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중국팀 ITU의 구단주, 진샤오랑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와중에 웃긴 것은, 그 연락을 받자마자 정명은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라는 생각 보다는 벨라의 말을 먼저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 녀석도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별 일 생기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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