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43화 (43/226)

13. 양민학살의 시작 (3)

라인전 단계에서 정글러를 부르지 않는다.

즉, 경기가 시작된 후 15분정도의 초반 동안은 순수하게 1:1 대결을 하자는 것이었다.

피터와 서서의 시선이 정명에게로 모였다.

“제정신인가? 이 이야기를 팀 관계자가 들으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 할 거다.”

“그렇군. 네 말이 맞아. 공과 사는 지켜야지. 비록 나는 앞으로 너를 입만 산 겁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말이야.”

정명의 말에 서서는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정명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좋아. 놀아주지. 단, 이 일은 비밀이다. 여기서 깨지고 난 뒤, 다른 곳에서 징징대고 다니지 말라는 소리다.”

“내가 할 소리네. 너야말로 내가 이기면 그 짜증나는 낯짝을 다시는 들이밀지 마라.”

약간의 말다툼 뒤, 서서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피터는 걱정스레 말했다.

“형, 정말 하시려고요?”

“뭐야. 안 하면 어쩌게. 혹시 정글러 안 부르기로 약속해놓고 몰래 부르자는 뜻이야? 흠, 그것도 꽤 괜찮겠는데.”

“아뇨, 만약에 라인전에서 지기라도 하면...솔직히 그렇게 쉽지는 않을 텐데...”

피터는 시즌 초반, 서서와 정명이 팽팽한 라인전을 펼쳤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OMA 팀원들 사이에서 서서는 개그캐릭터 비슷한 것이 되어 있긴 했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고액 연봉을 받는, 북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상당한 선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정명을 포함한 OMA팀원들이 엄청나게 연습을 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토베노를 포함한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다. 혼자만 연습해서 실력을 올린 게 아닌 것이다.

정명은 그런 피터의 걱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 벌리는 사람 아니야. 다 믿을만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한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30분 뒤,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부스에 들어가기 직전.

뒤늦게 이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팀원들은 이 위험한 내기에 기꺼이 어울려 주기로 했다.

서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라기 보다는 정명이 리더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10분 뒤. 경기가 시작되었다.

...

-토베노, 특별한 이유가 있는 밴일까요? 의도를 잘 모르겠네요.

-요즘 정명 선수의 컨디션이 좋아보이기는 했지만, 이건 좀 과합니다. 물론, 결과가 좋다면 상관 없겠지만요.

“저 녀석들, 노골적이네요. 괜찮겠습니까?”

OMA의 서포터, 그린이 걱정스레 물었다.

밴픽 단계에서 토베노 측은 이례적으로 밴 카드 3개를 모두 미드라인 캐릭터를 밴 하기 위해 사용했다. 전부 정명이 자주 썼던 캐릭터들이었다.

비록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어떤 캐릭터를 쓰는가가 아니라, 그 캐릭터를 누가 쓰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경기 시작 10분 째.

서로가 약속한 대로, 두 팀의 정글러는 미드 근처에 얼씬도 안 하고 있었다.

아니, OMA 측에서는 탑 라인과 바텀 라인을 포함해 갱킹 시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미드라인을 제외하고 동선을 짜면 정글러의 위치를 너무 쉽게 예측할 수 있으므로, 시간낭비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0분 동안 혼자서 정글만 돌고 있던 조시는 맵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 생각하는 것은 다 똑같나 봐요. 저 녀석들도 갱킹형 챔피언 보다는 성장형 정글러를 고른 것을 보면요.”

“쟤네들도 바보는 아니라는 거겠지.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승부를 볼 테니까.”

그와 동시에, 정명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CS격차가 점점 벌어집니다. 정명, 어제 경기에 이어서 컨디션이 꽤 좋은 것 같네요. 움직임이 무척 매끄럽습니다.

-서서의 움직임이 둔하게 보일 정도네요. 20대 중반에 저런 움직임이라...역시 한국에서 온 선수는 뭔가 다른 걸까요?

킬은 따내지 못 했지만, CS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이대로 가면 판정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명이 원하는 것은 그런 승리가 아니었다.

‘CS 격차를 냈다고 하더라도, 저놈은 분명 나중에 가서 딴 소리 할 놈인데. 그러니까...’

-정명의 불여우, 달려듭니다! 날카로운 타이밍!

-잠깐 속박에 묶였지만, 말 그대로 잠시입니다! 3...2...1..솔로 킬! 불여우, 화려한 무빙으로 스킬을 피해내며 솔로 킬을 따 냅니다!

“됐다! 이제 탑, 바텀 둘 다 강하게 푸시해. 라인전 끝내고 한타 페이즈로 넘어간다!”

솔로 킬을 따 냈다고는 해도, 겨우 1킬일 뿐이다.

본격적인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정명은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었지만, 상황은 오히려 너무도 쉽게 풀리고 있었다.

“쟤네 갑자기 왜 저렇게 오합지졸이 됐지? 무슨 솔로랭크 하는 것처럼 게임을 하네?”

“아, 저 알 것 같아요. 토베노는 서서가 오더를 맡고 있거든요. 흐, 충격을 많이 받았나 본데요. 우리야 좋지만.”

“좋아, 그럼 회복할 시간 주지 말고, 계속 몰아붙이자.”

토베노는 그렇게 첫 번째 경기에서 허무하게 패한 이후, 두 번째 경기에서도 기량을 회복하지 못 하며 빌빌대기 시작했다.

결국 서서는 두 번째 경기에서도 솔로킬을 내 주며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관심을 모은 라이벌매치는 OMA의 낙승으로 끝이 났다.

[1부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2:0 완승 보너스! 500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됩니다.]

경기가 2:0으로 끝난 뒤.

정명은 언제나처럼 포인트 매시지창을 닫고, 개인 키보드와 마우스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 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킬을 알게 되었습니다. <팬덤 결성>]

*그가 영입 제안을 해 왔을 때, 나는 방방 뛸 듯이 기뻤다.

그와 한 팀이 된다면, 내가 유명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로게이머 A***의 회고록 중에서.

*습득 조건 : 팬 수가 5000명 이상인 게이머를 상대로 솔로 킬 달성*패시브 효과 : 사용자의 팬 증가율과 명성의 증가율이 15% 상승합니다.

*가격 : 100 포인트

[명성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명성은 사용자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명성 수치가 오르면 타 팀과 연습 게임을 잡기 쉬워지거나 팬 수의 증가, 그리고 연봉 협상에서 이득을 보는 등의 부가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현재 명성 : 357

새로 발현된 능력에 정명은 들뜬 마음이 들었다가, 10초 만에 흥이 팍 식는 것을 느꼈다.

‘포인트 100...이런 씨, 이럴 거면 그냥 공짜로 줘. 툭하면 포인트 뜯어가.’

속으로 궁시렁대기를 잠시, 정명은 방송국 스태프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명? 지금 MVP 인터뷰 하러 가야 하는데요?”

“예. 지금 나가겠습니다.”

곧바로 부스 밖으로 나간 정명은 금발의 미녀 리포터와 함께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리포터는 의례적인 축하인사를 건넨 뒤, 경기 내용에 관한 예리한 질문들을 건넸다.

“오늘 첫 경기에서는 정글러가 갱킹에 무척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는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뇨. 단지 갱킹보다는 정글러의 성장에 초점을 둔 전략을 썼을 뿐입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전략을 바꿔, 초반부터 몰아쳤지만요.”

정명은 능청스레 말을 받았다.

한 1-2년 후, 토크쇼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면 모를까, 지금 당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리포터는 정명의 말에 납득했는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해설가들의 말에 의하면, 정명 선수의 피지컬이 리그 초반에 비해 늘어난 것 같다고 평가하더라고요. 하지만 피지컬은 20살이 넘어가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죠. 이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냥 하다 보니 잘 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부스에서 다음 게임을 준비하고 있던 선수들은 살짝 인터뷰를 들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피지컬 상승의 비결이 뭐냐고 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 한 리포터는 적당히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OMA의 미드라이너, 유정명 선수와의 인터뷰였습니다.”

‘명성...그리고 팬인가...’

인터뷰가 끝난 뒤,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니 명성치가 357에서 359로 증가해 있었다. 인터뷰를 했기에, 명성치가 오른 것이다.

정명은 자신이 북미에 와서 남긴 발자국들에 대해 생각하며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

그날 밤.

정명은 잠들기 전, 자신의 방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커뮤니티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그곳에서는 오늘 경기에 대한 키보드 배틀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리쿠르 : 오늘부터 토베노 팬 관둔다. 머리 빡빡 밀면서 으쌰으쌰 하길래 좀 기대했는데, 그냥 미용실 가는 비용 아끼려고 자기들끼리 깎은 듯함.

?351067 : 응, 다음 OMA 추종자.

스테이크 : 아직도 서서 그 퇴물을 빠는 사람이 있다니...오늘 경기에서 발렸던 건 서서가 아니라 소소였나?

?등대마을 : 냅 두셈. 쟤네들은 과거를 살고 있음. 아직도 서서가 1티어급에 속하는 프로게이머인줄 앎. 현실은 내년에 재계약도 불투명한 퇴물. 이거리얼 반박불가.

경기에서 이겼기에 오늘만큼은 OMA팬들이 기세등등하게 토베노 팬들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게시판에는 토베노의 팬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정명은 그 모습을 보며 오늘 경기에서 얻었던. 아니, 오늘 경기 이후 상점에 나타난 스킬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100포인트면 얼마 되지도 않는데...살까? 그래, 사자. 얼마나 한다고.’

[팬덤결성 스킬을 구입하시겠습니까?]

*주의하십시오. 이 스킬은 패시브 스킬이므로, 구입 이후에는 효과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뭐야. 왜 겁줘. 100 포인트 짜리 스킬 주제 건방지게...구입한다.”

[스킬을 구입했습니다. 잔여 포인트 3820]

[이제부터 팬클럽 결성이 가능해집니다.]

[수많은 팬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을 알아보는 팬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메시지는 썩 기분이 좋아지는 메시지들이었다.

덕분에 정명은 기분 좋게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

다음 날 점심.

팀원들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간 정명은 어색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근처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정명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명을 향해 다가온 꼬마들은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형, 프로게이머 맞죠? 사진 좀 같이 찍어줄 수 있어요?”

“어, 응. 그래라. 근데 너희들, 나 알아?”

“네. 프로게이머 유정명 선수잖아요. 우리 반 애들은 다 알아요.”

그 말에, 피터가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난 알아?”

“어...프로게이머...신가?”

피터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로,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명을 알아보는 것은 꼬마들뿐만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는 양복을 입은 회사원까지.

직접 말을 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도, 자신에게 시선을 오래 주는 것을 보며 정명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명은 기쁜 마음이면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해. 트위터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말고, 연예인병 걸렸다는 소리 듣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을 확인해보니, 이제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된 에바 벨라였다.

그녀는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언제나처럼 바로 본론을 말했다.

-정명아. 나 네 팬클럽 만들고 싶은데,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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