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프로게이머-38화 (38/226)

12. 큰 물에서 놀아야지 (1)

‘한국 기자라니, 괜히 더 떨리네.’

정명이 오랜만에 메일 계정으로 로그인 하자, 수많은 스팸메일들이 정명을 맞아주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메일들은 팬들의 응원으로 시작하여 의미 불명의 욕설, 그리고 승부조작으로 돈 좀 벌어보지 않겠냐는 말이 담긴 것까지 별의 별 게 다 있었고, 정명은 쓸모없는 메일을 슥슥 넘기며 언벤에서 왔다는 메일을 찾기 시작했다.

“언벤...언벤...아, 여깄다.”

[한국 선수들의 북미, 그리고 중국 진출에 관하여]

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시간은 언제든 괜찮으니 잠깐 화상채팅으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명은 한국 기자라고 하니 괜히 더 긴장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선수들의 북미 이적에 관해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지금 북미에 진출한 선수들은 총 3명. 중국에 진출한 사람은 그 두 배 정도. 아직 거의 없다시피 한 숫자다. 그리고 정명은 그 중에서도 후발주자였다. 때문에 가진 노하우가 그다지 없어, 알려줄만한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일단 말은 해 봐야 했기에, 정명은 바로 언벤의 기자라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시간이 언제든 괜찮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는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unven_gija님이 대화를 요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래.’

정명이 대화를 수락하자마자, 바로 화면이 뜨기 시작한다. 화면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은 피곤에 찌든 30대 남자의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언벤의 김상중 기자라고 합니다. 제가 갑자기 연락 드려서 놀라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은 새벽 1시. 하지만 화면 너머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아직 사무실인 듯 했다. 퇴근을 하지 못한 것이다.

정명은 미국에서 취업을 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뇨. 괜찮습니다. 근데 북미 시장에 대해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요?”

“예. 요즘 한국 선수들이 해외 진출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언벤에서도 해외 시장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어요. 미국에서는 잘 지내고 계세요?”

“그럼요.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것만 빼면 한국에 있을 때랑 별 다를 것도 없어요. 그러면서 월급은 배로 주니까 더 좋기도 하고. 다른 선수들도 그럴걸요?”

“아. 적응력이 무척 좋으신가 보군요. 사실, 제가 에드워드 권이나 메타트론선수하고는 얘기를 해 봤거든요. 그런데 무척 힘들다고...혹시 그 분들하고는 친하게 지내시나요?”

“잠깐 인사를 하긴 했죠. 경기 날이면 자주 보는 얼굴들인데. 근데 별로 친하진 않고요.”

또 다른 한국선수인 메타트론. 그는 한국의 1부리그 팀에서 식스맨으로 있던 사람이자, 북미로 이적했던 거의 초창기 게이머였다.

그리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북미 2위팀 GLG로 그 둥지를 옮기며 상당히 성공적인 이적을 했고, 덕분에 가장 성공적인 해외 진출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는 했다.

같은 한국인임에도, 정명과는 전혀 친하지 않지만.

“그거 이상하네요. 제가 인터뷰 했을 땐 메타트론선수, 한인 타운도 자주 간다고 하던데. 한국말이 그립다고.”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꼭 다 친해야 하나요. 아무튼, 다른 궁금한 것은요?”

20분 뒤. 그 외 자질구레한 것을 묻던 기자는,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는지 적당히 질문을 마무리했다.

“아 참. 해외 진출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을 묻고 싶어 하는 선수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 선수들에게 이 연락처를 가르쳐줘도 될까요?”

“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죠.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

그 일로부터 일주일 뒤.

북미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한국 선수들의 연락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자의 너스레와는 달리, 정명의 메일함에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명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신경 끄고, 오늘 경기 준비나 하자.’

정명이 오늘 치를 매치는 이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경기가 아니었다. 오늘의 상대는 현 북미 4위팀인 포몬고와의 경기였기 때문이다.

OMA의 현재 랭킹은 5위. 포몬고와 한 끗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번 경기에서 OMA는 포몬고에게 지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OMA는 포몬고에게 설욕하기 위해 칼을 갈고 나왔다.

부스에 들어가기 전에 팀원을 불러 모은 정명은, 짧게 브리핑했다.

“좋아, 오늘도 같은 전략으로. 알지?”

“상관없긴 한데...이거, 너무 자주 쓰는 것 아닌가? 막히면 어떡하지?”

“원래 그런 거야. 막힐 때 까지 쓰다가 막히면 딴 것 쓰면 돼. 걱정 마.”

같은 전략이라 함은 요즘 OMA가 자주 써먹고 있는 전략인 미드 키우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미드라인 의존도가 높은 팀인 주제,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이번 것은 좀 더 적극적이다.

정명이 요즘 밀고 있는 캐릭터는 일명 왕의 귀환 캐릭터였다.

초반엔 약하지만, 후반엔 무척이나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2:1도 가능할 정도의 성장을 보이는 그런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키우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편이 그런 캐릭터가 성장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경기 시작 후 순조롭게 성장을 계속해 나가던 정명은 문득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포몬고, 정말 집념의 갱킹입니다. 이것을 포함하면 벌써 네 번째 시도에요!

-그래도 이번에는 갱킹에 성공할 확률이 무척 높아 보입니다. 정명 선수, 위기인데요!

세 명이서 한 명을 공략한다면, 없는 틈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LOH라는 게임이다.

자꾸만 성장하는 정명을 잡는데 연달아 실패한 포몬고는 이제 정글러 뿐만 아니라 서포터까지 대동해서는 정명을 한 번 잡아보려고 갖은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다음 미니언 웨이브가 오면 100% 죽는 각인데?’

사방이 적으로 막힌 상황.

아무리 봐도 도망갈 구석이 없자, 정명은 다급한 마음에 가까이에 있던 조시를 불렀다.

“조시!”

“알았어!”

급박한 상황에서 긴 말은 필요 없다.

조시는 뒤따라오는 적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고, 조시가 두드려 맞는 틈을 이용하여 정명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아, 포몬고...네 번째 허탕입니다. 조시를 잡아봐야 영양가가 없어요. 정명을 잡아야 합니다.

-그나저나 정명 선수, 정말 도망 잘 가네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 갑니다. 많은 연습으로 단련된 팀워크가 빛이 나는 순간이네요!

‘휴....다행히도 이번에는 성공...’

정명이 도망갈 확률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힘들게 오더스탯을 50으로 만들고 난 뒤 생겨났던 하나의 스킬 때문이었다.

[새크리파이스]

주변의 동료 하나를 희생하여, 도주 확률을 높인다.

*팀의 결속 랭크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집니다.

*사용자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팀원에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끔씩은 쓸 만 한 것 같다. 조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썩 대단한 스킬은 아니었다. 고작 오더스탯 50에 얻은 스킬에서 뭘 기대하겠냐만, 새로 생겨난 스킬은 딱히 스킬이라고 할 것도 없는 스킬이었다.

그래도 좀 더 자주 살아가는 것 같기는 했으니 정명은 상당히 자주 애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20분 뒤. 정명이 죽지 않고 계속 성장한 덕분에 게임 중반을 넘어가자마자 말도 안 되는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고, 포몬고는 한타를 할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미드에 갱킹을 집중한 것이 오히려 실책이 되었어요. 차라리 다른 곳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명의 떠돌이 마법사에게 두 명이 붙어보지만, 소용이 없군요. 이미 너무 커버렸거든요. 포몬고, 깔끔하게 밀렸어요. GG! OMA가 리그 4위 팀, 포몬고에게 승리하며 승점을 바짝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OMA는 지난번 패배를 설욕하며, 리그 4위 팀 포몬고에게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1부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실력이 뛰어난 팀을 잡아냈습니다. 70%의 포인트가 추가로 주어집니다.]

“됐다! 리벤지매치 승리다!”

“조금만 더 하면 4위도 뺏어올 수 있겠다. 조금만 더 힘내자!”

경기에서 2:1로 승리한 뒤.

OMA 팀원들은 경기에서 승리하여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정명은 살짝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정명은 부스에서 살짝 나온 다음 허공을 응시했다.

‘포인트가 많이 올랐네. 많이 올랐긴 한데...’

정명은 상태창을 열어, 지금껏 모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현재 능력치]

피지컬 (60/100)

정신력 (50/100)

오더 (50/100)

판단력 (50/100)

[잔여 포인트 : 5500]

5500포인트. 이 포인트를 모으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갈수록 포인트가 쪼들리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정명은 북미 1위 팀 TBM에게 졌을 당시 받았던 퀘스트 하나를 다시 읽어보았다.

[상위권 도약]

B랭크 이상의 팀을 5회 쓰러트리십시오.

달성 횟수 [0/5]

보상 : 10000 포인트

’혹시나 했는데...순위 4위로도 부족하다니, 그럼 대체 어떤 녀석들을 이겨야 한다는 거야?‘

현 랭킹 4위 팀을 잡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달성횟수가 오르지 않았다. 이 말은, 더 강한 팀을 잡아야 퀘스트를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게 된다.

정명은 4위팀인 포몬고보다 위에 있는 팀의 이름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정명은 팀 연습실에서 코치와 한창 회의를 하고 있었다. 팀의 연습경기 일정에 대한 것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연습경기 일정을 확인한 정명은 조금 볼멘소리를 냈다.

“TBM하고 GLG는 여전히 연습경기를 잘 안받아주네요? 이젠 우리 팀의 평가도 꽤 괜찮아져서 이것보다는 많을 줄 알았더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 이것도 고맙다고 해야 할지.”

꼭 저들과 연습게임을 해야 실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퀘스트. 퀘스트가 문제였다.

1만 포인트짜리 퀘스트가 나타난 시점이 TBM에게 경기에서 패한 직후이니, 그런 팀들을 잡으면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TBM과 GLG는 OMA의 연습경기 요청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정명은 SAO시절, 1부리그팀에게 연습경기 요청을 했을 때의 기분을 느끼며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 그럼 얘네들은 대체 누구랑 연습게임을 하고 있대요? 자기들끼리만 주구장창 하나?”

“듣기로는 중국이나 한국에 얘기를 해보고 있다고 하던데. 연습게임 한 판 따내겠다고 아주 열심인 모양이야.”

“진짜요? 하...아무리 중국이나 한국 팀들이 잘한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북미와 아시아권의 연습 게임.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라지만, 사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가장 큰 문제이자 유일한 문제는 딜레이이다.

아무리 좋은 인터넷 선을 써도, 쾌적하지는 않을 정도로 렉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익숙해지면 그것도 할 만 하긴 한데, 그런 것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본 게임에서 감각이 이상해질 수 있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정명은 1,2위 팀의 시도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코치는 그런 그들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월드 챔피언십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깨졌는데. 북미 팀 통틀어서 한국 팀에게 단 1세트도 따내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어?”

GLG 뿐만이 아니다. TBM 그리고 3위팀 투서든까지. 북미팀의 에이스들은 한국팀에게 단 한 세트도 따 내지 못 했고, 그 일로 많은 북미 사람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한국 팀이라...”

문득 언벤 기자의 얘기가 생각난 정명은 스마트폰을 켜서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이 오긴 했네. 딱 하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것 같은 한국 선수로부터의 메일은, 북미시장의 계약 조건이 대충 어떻게 되냐는 질문이 담긴 메일이었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한 정명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아니, 근데 이건 좀 의외인데...’

정명에게 메일을 보낸 사람은 김준상. 지난 월드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팀의 원딜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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