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새 둥지 (完)
방송국에서는 처음부터 미드 라인전을 중심으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경기의 관람 포인트는 미드라인전이라는 것을 서서의 팬도, 그리고 OMA의 팬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시작한지 10분이 넘었는데 두 팀의 정글러 모두 미드라인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네요. 기싸움이 팽팽합니다.
-지금 탑, 완전히 비었거든요? 토베노 입장에선 지금 탑으로 올라가야 맞습니다. OMA 입장에선 상당히 까다로울 테니까요. 그런데 안 가고 있어요!
비어있는 부분을 공략하지 않고 미드에 죽치고 있는 것은 OMA도 마찬가지였다.
정명은 툭하면 정글러 조시를 불러서 상대방의 틈을 노렸다.
“그냥 멀리 가지 말고 미드 근처에만 있어. 어차피 저놈들도 그럴 테니까. 딱 1킬, 1킬만 내고 빠지자.”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은 정명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전략적인 부분은 둘째 치고, 자존심을 건 싸움.
그런 경기를 치르는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지만, 팬들은 오히려 더 흥미진진해하며 환호했다. 그야말로 개막전에서 치르기에 딱 좋은 이벤트성 전략인 것이다.
“좋아. 지금 해 볼까? 조시, 부시에서 있어봐.”
하지만 서서는 정글러가 올 때면, 귀신같이 눈치 채고 거리를 벌렸다.
‘솔로킬은 몰라도, 유리하게 끌어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는데...’
서서는 정명의 스킬샷을 높은 확률로 피해내며, 꾸역꾸역 CS를 쌓아나갔다. 과연, 괜히 정명 연봉의 3배를 받는 게 아닌 것이다.
10분 후.
게임이 시작한지 20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단 1킬도 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정명은 이 지루한 대치를 깨기로 마음먹었다.
“조시. 슬슬 게임이 지루하니까, 한 판 벌려보자. 반대편 부시에 분명 상대방 정글러도 있을 거야. 그놈을 끌어내자. 2:2 싸움이면, 불리할 거 없어.”
“알았어. 가자!”
정명이 먼저 달려 나가며 신호를 보내고, 그 뒤를 조시가 뒤따른다.
하지만 서서는 조시의 모습을 보고도 도망치기는커녕 캐릭터를 앞으로 전진시킨다. 그리고 정명의 예상대로 반대편 부시에서 정글러가 튀어나왔다.
정명은 다급히 외쳤다.
“저거 무시하고 토템킹, 토템킹만 잡아!”
미드에서 2:2 싸움이 벌어지자, 탑에서도 텔레포트를 사용하고 바텀에서도 미드를 지원하기 위해 라인을 버리고 미드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의도된 소규모 한타. 화려한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팬들의 환호성이 커지기 시작한다.
-첫 킬은 정명 선수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OMA, 정글러를 내 주고 미드를 잡아옵니다!
-이야, 두 팀 모두 적절할 때 빠져서 어그로를 분산시키는 어그로 핑퐁이 예술입니다. 저렇게 오래 싸웠는데, 두 명밖에 안 죽었어요!
첫 한타의 결과는 1:1 교환. 하지만 OMA 선수들에게서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저놈 저거 드디어 잡았네. 잘 했어! 개새끼 같으니.”
OMA에서는 정글러가 죽었고, 토베노에서는 미드가 잡혔다. 자존심 싸움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다.
미드에서 첫 킬이 나온 이후, 게임은 미드에서 계속 죽치고 있던 교착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미드에서 첫 킬을 내긴 했지만, 1킬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토베노측도 더욱 집중하며 게임을 이겨나갔다.
그렇게 OMA와 토베노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숨 막히는 접전을 펼쳤다.
개막전 첫 경기부터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수준 높은 경기였다.
-경기가 이제 50분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두 팀, 개막전 첫 경기부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요?
-그만큼 두 팀 모두에게 중요한 경기라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살짝 엿듣기로는, 각 구단주가 이번 경기에 5만 달러짜리 보너스를 걸었다고 하더군요. 꼭 이기라고 말입니다.
경기는 어느 새 극 후반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게임 시간이 50분이 넘어가면, 한 명이 실수로 짤리는 것만으로도 게임이 끝날 수도 있다. 그때쯤이면 탱커가 워낙 단단해져서 수비측이 타워를 끼고 싸운다 하더라도, 탱커가 타워에 맞으면서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OMA와 토베노의 움직임은 무척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토베노의 토템킹, 순식간에 거리를 좁힙니다! OMA의 딜러진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정명은 아차 싶었다.
토베노의 탱커가 OMA의 딜러진 뒤로 텔레포트를 타며 적절한 이니시에이팅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한타에서 지게 된다.
패배를 직감한 정명은, 지금이야말로 스킬을 사용할 때라고 느꼈다.
[가혹한 지휘를 사용합니다]
[팀원들의 결속이 B+로 증가합니다.]
[한타 집중력이 150% 상승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스킬을 너무 자주 사용한다면, 팀원들이 당신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한타에서는 오더가 거의 필요 없다.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도 않거니와, 순식간에 끝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각자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의 연습이 중요하다. 눈빛만 봐도 생각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쳐야 하니까.
그리고 이 스킬은 그런 플레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으아아아아! 나무정령, 나무정령!
-정명의 악마사낭꾼, 노마크입니다. 프리딜로 상대 탱커를 녹여버리고 있습니다!
보기 힘든 슈퍼플레이가 펼쳐지자, 해설자와 캐스터들은 알아듣기 힘들 괴성을 쏟아냈다.
어차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TV로 보는 시청자와, 현장에서 관람하는 팬들 또한 서로 괴성을 질러대며 눈앞에 펼쳐지는 슈퍼플레이에 집중하기 바빴으니까.
[스킬 지속시간 카운트다운. 5, 4, 3, 2, 1....]
[모든 버프가 사라집니다.]
[팀원들의 스트레스가 대폭 상승합니다.]
스킬의 효과가 끝나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타 상황에서 5초 정도면, 상대 딜러를 붙잡거나 탱커를 녹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토베노는 한타에서 대패한 뒤, 허겁지겁 넥서스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토베노. 딜러가 2명 살아남긴 했지만, 막기 힘들 것 같네요.
-OMA, 바로 넥서스를 향해 달립니다. GG! 첫 경기의 승자는 OMA입니다! OMA가 마지막에 엄청난 한타력을 보여주며 개막전 첫 승리를 따냈습니다!
OMA 선수들은 기진맥진한 얼굴로 부스에서 나왔다. 스킬 사용시간은 고작 5초에 불과한데도, 가중되는 피로감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조시는 부스에서 나오자마자 몬스터레이드라는 에너지드링크를 찾았고, 어떤 팀원은 담배를 태우러 흡연 부스를 찾았다.
조시는 에너지드링크를 꿀꺽꿀꺽 마시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 너무 힘들다. 이상하게 힘들어. 뭐지 대체...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괜찮아? 혹시 다음 경기에 집중 못 할 정도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연습을 쉬는 시간 없이 6시간정도 한 기분이야. 정명, 넌 괜찮아?”
“응. 난 평소와 똑같은데? 아무튼, 조금이라도 쉬어. PD한테 물어봐서 쉬는 시간을 좀 더 줄 수 있는지 물어볼 테니까...”
조시의 질문에 시치미를 뚝 뗀 정명은, 스킬에 대한 판단을 조금 수정했다.
‘조금 불쌍하긴 하군. 앞으로는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써야겠어. 2경기에는 이 스킬은 쓰지 말자.’
그리고 잠시 뒤. 2경기가 시작되었다.
자존심이 걸린 싸움. 선수들의 마우스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한다.
애초에 두 팀은 팀 순위도 별로 차이나지 않는 팀이었다. 때문에 두 번째 경기도 첫 번째 경기만큼이나 팽팽한 접전이 펼쳐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 Abyss선수, 조금 더 집중해야 합니다!
-이건 실수라고밖엔 볼 수 없네요. 시야가 안 보이는 곳은 함부로 발을 디디는 것이 아니죠.
“진짜 미안. 아, 이거 큰일났네. 어쩌지...와드 심으러 갔다가...”
OMA의 서포터가 시야를 밝히러 가다가 집중력 부족으로 인하여 짤린 것이다.
정명은 황급히 후퇴하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서포터를 잡느라 4명이 궁극기를 사용했어. 딜러는 소환사 주문도 없다. 그렇다면...’
정명은 바로 탑 라이너, 울브즈에게 말했다.
“뒤로 텔레포트 타! 스킬 빠졌을 때, 한 판 붙는다!”
울브즈가 적진 한 가운데에 박힌 와드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어그로가 쏠렸을 때, 정명은 다시 한 번 스킬을 사용했다.
[가혹한 지휘를 사용합니다]
[무리한 행군으로 인하여, 능력 증가치가 소폭 감소합니다.]
[팀원들의 결속이 B+로 증가합니다.]
[한타 집중력이 125% 상승합니다.]
“룰라, 서포터랑 놀고 있지 말고 딜러 물라니까!”
“미안. 알았어.”
“그래! 그렇게 저놈들 다 물어 뜯어!”
확실히 스킬의 힘은 대단했다.
OMA는 한국 리그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팀플레이를 펼치며, 토베노 선수들을 전멸시켜버렸다.
거기다 운이 따라주게도, 라인 상황까지 좋았다.
토베노 선수들이 부활하기까지 30초. 정명은 마지막 오더를 내렸다.
“나무정령 몸 대! 그냥 타워 뿌셔!”
뒤늦게 부활한 토베노 선수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스킬을 난사했지만, OMA 선수들은 자신을 때리건 말건 넥서스를 점사했다.
그리고 정명은 1부리그에서의 기분 좋은 첫 승을 따 냈다.
-개막전 첫 승리는 OMA가 가져갑니다! 5:4 상황에서의 기적의 한타!
-OMA가 이렇게 잘 하는 팀이었나요? 아니면 정명 선수의 영입이 그만큼 좋은 영향을 줬던 걸까요?
[1부리그에서 승리했습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2:0 완승 보너스! 500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됩니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로군. 생각보다 많이 주지는 않지만...’
정명은 부스에서 나온 뒤, 서서를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휴, 저 십새끼. 이제는 더 이상 트위터에서 입 털지 못하겠지.”
정명은 부스에서 나왔지만, 팀원들은 책상에 엎드리거나 의자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명은 이 스킬의 한계점을 명확히 알 것 같았다.
‘1경기에 1번 사용할 수 있다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고 보는 게 맞아. 그것도 마지막 경기에서나 쓸 수 있겠어.’
고려해야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1경기에서 체력이 소모된다면, 2경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체력 소모를 걱정하여 계속 스킬을 아껴둔다면, 제 때 스킬을 활용하지 못 할 수도 있었다.
정명은 입맛을 다셨다.
‘3000포인트를 투자한 것 치고는 애매한데. 물론 오늘 효과는 톡톡히 보긴 했다만...’
팀원들은 며칠 밤 샌 사람마냥 멍 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결국 코치가 달려 나와 다른 선수들을 먼저 숙소에 보냈고, 정명은 그들을 대신하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늘의 전략은 뭐였냐, 이때는 정말 위기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극복해냈느냐 등등의 게임 전략에 관한 인터뷰가 끝나고,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했던 게임의 뒷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정명의 인터뷰와 이번 대결에 대한 기사는, 북미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한국에서까지 이슈가 되었다.